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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요동정벌에 대한 짧은 생각
게시물ID : history_1499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6/5
조회수 : 1870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4/03/25 12:28:01

사극 정도전 탓인지는 몰라도 요동정벌이 화두에 오른 것 같은데, 요동정벌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차 요동정벌도 실패했겠지만, 여기서는 주로 고려가 작심하고 준비했던 2차 요동정벌을 중심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1. 고려의 사정

 

당장 요동정벌군을 편성하는 고려의 사정은 별로 안 좋았습니다. 일개 국가의 정규군도 아닌 해적집단 왜구와의 전쟁으로 나라 멸망직전에 갔다가 최영과 이성계, 정지 등의 맹활약으로 간신히 기사회생한 것이 당시의 고려였습니다. 비록 진포해전과 황산대첩에서 최무선, 이성계 등이 맹활약을 펼쳐서 이후 왜구의 침입은 잠잠해졌다지만 왜구 세력 자체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장 고려가 요동 정벌을 위해 주력병력을 모두 북으로 집중시키자 기다렸다는 듯이 왜구가 고려를 공격합니다. 1388년 4월 21일에 초도에 왜구가 80여척의 배를 이끌고 나타나자 고려에서는 5명의 원수를 파견하고 전라도와 양광도의 남자란 남자는 모두 군사로 징발해서 이를 막으려 하지만 왜구를 이겨낼 수 없었고, 왜구는 양광도의 40여개군은 자기네 집 안방 드나들 듯이 돌아다니며 약탈합니다. 당시 양광도 안렴사 진리가 적을 막고 싶어도 병력이 부족해서 힘들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왜구의 공격은 가을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왜구의 공격은 위화도 회군이후 요동원정군에 소속되어 있던 정지가 돌아옴으로써 간신히 해결됩니다.

 

요동도 정벌하기 전에 왜구에게 또 시달리는 이런 상태에서 고려가 어떻게 요동을 정벌할 수 있을까요? 본진도 이 모양인데 요동을 정벌하겠다는 것은 완전한 무리수에 불과합니다.

 

 

2. 북원과의 연계?

 

북원과 연계를 하더라도 고려가 요동의 명나라 군을 몰아내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당장 북원 상태가 개판이었으니까요. 뭐 북원 혜종의 뒤를 이은 북원 소종 아유르시리다르 무렵에는 코케 테무르가 맹활약해서 명의 명장인 서달이 이끄는 명군을 이기고(물론 간쑤성에서 재대결 벌일 때에는 서달이 이끄는 명군에게 대패하고 고비로 도망칩니다) 한 때 산시성까지 세력을 확장하지만 북원 소종과 코케 테무르가 죽음으로써 사실상 중원 진출은 무력화됩니다. 그 뒤를 이은 북원 평종 토구스 테무르도 중원진출을 노력하지만 우익에서 명을 견제하던 나하추가 1387년 명에게 항복함으로써 사실상 중원진출은 실패로 끝나버리고, 그 자신도 다음 해인 1388년 부이르 누이에서 10만의 명나라군과 대회전을 벌였지만 패배하고 그는 카라코룸으로 도망쳤다가 투울 강 근처에서 이수데르 조리트구에게 살해당합니다. 그리고 북원은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집니다. 이 때가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기 한달 전입니다. 이 상태에서 고려가 북원과의 연계는 힘들었을테고 연계한다 치더라도 요동의 명군을 이겨내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습니다.

 

 

3. 전쟁은 역시 물량싸움

 

고대나 중세나 현대나 그리고 창을 들던 총을 쓰던 전차를 쓰던 기동전을 하던 참호전을 하던 전쟁 승리의 기본은 적보다 많은 물량을 투입하는 것입니다. 물량 앞에서는 장사 없습니다. 고려가 요동정벌군으로 편성한 병력을 보면 실 전투병력 38,830명에 이를 지원하는 병력 11,634명이었습니다. 합쳐서 대략 5만이었는데 지원병을 제외한다면 대략 약 4만 여명 정도입니다. 그럼 명나라도 한번 병력규모를 봐볼까요.

 

1369년 명태조 주원장의 지시로 서달이 총사령관이 되어서 편성된 북벌군이 25만명

1372년 나하추의 군대를 개박살내려고 동원한 병력이 20만명

1388년 부이르 누이에서 벌어진 북원과의 전투에 투입한 병력이 10만명

 

대충 훑어봐도 명나라는 고려의 최소 2배 최대 5배 이상의 병력을 동원합니다. 동원능력면에서 차이가 나버리고 명나라가 설사 고려군에게 패배하더라도 그만큼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고려는 그럴만한 능력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당장 요동정벌군으로 5만 편성하니깐 남쪽에 쳐들어온 왜구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 고려였습니다. 물량을 동원하는 면에서도 명이 고려를 능가하면 능가했습니다만 고려는 그냥 현시창이었습니다. 진짜 엄청 쥐어짜내면 10만 정도는 뽑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안 그래도 왜구에게 시달리던 고려 남부 지역은 아예 황산대첩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4. 자 이겼다 칩시다. 그런데 그 이후엔?

 

네. 최영과 이성계, 조민수 등등 고려의 모든 장수들이 알렉산더와 한니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손자, 손빈, 악의 등을 뺨치는 엄청난 전술로 일단 명나라군을 몰아냈다고 해봅시다. 그럼 그 이후엔 이 요동이라는 땅이 고려에게 넘어왔으니 후속 대책을 세워야합니다. 행정구역과 행정제도도 고려 입맛에 재편하고, 조세제도도 마련해야 하고 그럴려면 관리도 새로 파견해야 하고 그리고 백성들도 이주시켜야 하고 그리고 명나라나 다른 유목민족들에 대한 공격을 대비하려면 성을 새로 쌓거나 무너진 거 복구하고 점령만하고 군사를 되돌릴 수 없으니 군사도 재배치해야합니다. 그리고 원정에 참여한 군사들에 대한 혜택도 주어져야 합니다.

 

오히려 점령 이후에 이 산더미 같은 일을 고려가 처리할 만한 국력이 되느냐 전혀 안 됬습니다. 그야말로 현시창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것이 당시의 고려였습니다.

 

약간 뒷날의 이야기지만 세종이 4군 6진 개척하면서 그것도 명나라나 북원에 비한다면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여진 야인을 상대하면서 그 땅을 조선의 영토화하는데 걸린 시간이 약 8년 이상입니다. 그나마 세종과 김종서가 그럴만한 뚝심이 있었기에 영토화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여기 영토화한다고 남부지역에 사는 백성들을 강제로 함경도 정착시키는 가혹한 정책인 사민정책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세종 때의 조선은 2차 요동정벌 당시 고려보다 훨씬 상태가 좋았고, 함경도 지역은 요동에 비한다면 작디 작은 지역이고 상대하는 적도 여진 야인들이라 명나라를 상대하는 것에 비하면 수월하다면 수월한 상대였습니다. 이런 지역을 개척하는데에도 엄청난 국력과 노력이 필요한데 요동을 정벌하고 영토화할 만한 능력이 당시 고려에게 있었냐는 말입니다.

 

그 이전의 일을 예를 들어볼까요? 고려 숙종과 윤관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동북 9성 개척의 일입니다. 결국 원정 시작은 예종 때 했지만 이 때만 하더라도 고려가 그래도 안정적인 상태였습니다. 준비기간 1년 이상 그리고 동원한 병력도 17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고려가 국운을 걸고 동북 9성 개척에 돌입한 것입니다. 이 때의 여진족은 세종 시절보다 강했지만 고려군은 잘 싸웠고 방어선을 구축하고 백성들도 이주시킵니다. 하지만 결국 고려 국력이 한계에 다다라서 실패합니다. 고려 국력이 왕성했던 시절에도 영토확보에 이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뭐 한마디로 말하자면 고려는 요동을 군사적으로 이길 능력도 없었지만 어찌어찌해서 이겼다치더라도 그걸 관리할 능력조차 안 됬다는 것입니다. 당장 자기네 본진도 관리가 안 되는 판에 어디 영토를 뺏어서 관리하겠다는 말입니까.

 

5. 결론

 

꾸준히 말해왔지만 결론은 간단합니다. 하늘이 무너져서 명나라가 멸망하지 않는 이상 아니면 갑자기 고려에게 쇼미더머니라도 쳐서 국력이 더 좋아지지 않는 이상 고려가 요동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고 설사 얻는다하더라도 관리할 능력이 없었기에 다시 명에게 빼앗겼을 것입니다. 역사스페셜 등에서 주장하는 것은 너무 고려에게만 유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가정한 것인데 실상은 고려에게 불리하면 불리했지 절대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요동정벌 마음을 흔드는 정말 멋진 구상이지만 현실과 이상은 엄연히 구분해야합니다. 이상은 이상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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