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500년경 유연의 영역입니다.)
유연은 4세기말부터 6세기에 몽골지역에 있었던 유목국가로 연연(蠕蠕), 여여(茹茹), 예예(芮芮) 등으로도 불렸습니다. 이들의 시조는 목골려(木骨閭)로 불려 그 왕족은 욱구려씨(郁久閭氏)라고 불렸습니다다. 이들은 선비와 같은 동호계통의 민족으로, 3세기 경에는 선비에게 종속되었지만, 선비족들이 오호십육국 시대에 이르러 남하하면서 독자노선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5세기 초 사륜(社侖)이라는 자가 유연의 지도자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들은 고차를 정복하고 본격적인 유목국가체제로 접어들었습니다. 위서 연연전에 따르면 이들의 세력은은 서쪽으로는 언기의 땅, 동쪽으로는 조선의 땅, 남쪽으로는 대적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륜은 유연을 흉노이후 전통이 된 십진법 체계의 군사, 행정, 사회조직으로 재편하고, 그 위에 구두벌카간(丘豆伐可汗)이라고 스스로 명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때 우리가 잘 아는 유목국가 지도자들의 명칭은 칸 혹은 카간의 명칭이 처음으로 출현하였습니다. 위서 연연전에 따르면 "카간은 역시 위어로 황제와 동일하다.'라고 하였습니다.
※ 이 이전에 흥안령 북부의 알선동 동굴 벽에 새겨진 제문 중에 가한(可寒)이라는 말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이미 이전부터 쓰여진 것으로 보이긴 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유목제국의 출현은 당시 화북의 지배자인 북위로써는 위협적이었기에, 북위의 건국자인 태조 도무제 탁발규는 황하의 만곡 지역에서 사륜이 이끄는 유연군을 패퇴시키고, 이후 3대 황제인 세조 태무제 탁발도 무렵에는 한 때 유연의 위협을 받았지만 이들을 성공적으로 물리치고 오히려 기병을 이끌고 유연에 대한 습격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태무제는 429년과 443년, 448년, 449년에도 계속 유연을 공격하며 유연의 지속적인 세력 약화를 가져왔습니다. 이후 고종 문성제 탁발제 무렵인 458년 고비의 유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계속 털리는게 이상한 일이기도 하지만 유연이 결정적으로 약화된 것은 485년, 486년에 지배하에 있던, 고차가 독립한 이후입니다. 고차의 반란은 수습하였지만, 돌궐이 강성해져서 552년 돌궐의 이리가한(伊利可汗)과의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아나괴(阿那壞)가 전사하고 맙니다. 유연의 잔당은 북위에 원조를 요청하였지만, 돌궐의 요청에 의해 살해당하고 완전히 멸망하고 맙니다.
※ 출처 :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유목민이 본 세계사,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