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데이비드 베네타씨는 남아프리카의 케이프 타운에 있는 케이프타운대 철학과장이자 철학교수이며 저서 Better Never to Have Been: The Harm of Coming into Existence에서 안티나탈리즘을 제창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안티나탈리즘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이 견해에 이르렀나?
답: 안티나탈리즘은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는 새로운 존재를 주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선적으로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지만, 동물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번식 등이 그 예이다. 내가 어떻게 이 견해에 이르렀는지는, 아마도.....세상은 참으로 추하고 인생은 무척이나 고단해 보이는데, 왜 계속해서 더 많은 존재를 새로운 사람들에게 부여하는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질: 이 용어의 역사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답:흥미로운 질문이지만, 내가 직접 지은 이름은 아니다. 그 전에 어디선가 봤는데 기억이 확실하게 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나의 저서는 그 주제에 도달했다고 본다.
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좋다, 라는 것에 대해서 말인가?
답. 맞다. 이전부터 그 주제에 대한 기사를 쓰고 있었다. 그 생각을 2006년에 출판된 책에서 보다 상세하게 발전시켰다.
질: 인간 사회는 꽤 프로나탈리스트적(친-출생주의)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신은 그것을 진지하게 주장하는 것인가? 뭔가 이상한 사상을 즐기고 있냐는 식으로 질문하는 이도 있을 텐데, 자발적 인류멸종 운동(VHEMT)와 같이, 당신은 정말 진지하게 주장하고 있는 건가?
답: 나는 완전하게 솔직하고 진지하게 주장하고 있다. 말씀대로, 많은 사회는 프로나탈리스트적이다. 그러나 일부 사회는 온건한 의미에서 안티나탈리스트적인 정책을 추진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중국과 같은 나라는, 꽤 오랫동안 인구를 억제하려고 시도해 왔다. 그런 사회의 일부 사례가, 내가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생식이 틀렸다는 래디컬한 견해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도 확실히 생식을 제한하려고 시도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그들도 일정 부분 안티나탈리스트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질: 텔레비전 드라마 "True Detective"의 퍼스트 시즌은 당신의 저서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신은 안티나탈리즘에 대한 그것의 접근 방법을 어떻게 느꼈는가?
답: 나도 실은 그것에 대해 기사를 쓰도록 부탁은 적이 있다. 최근에 Critique 라는 웹사이트에 그것을 올렸다. 거기서도 언급했지만, 등장인물 Rust Cohle은 확실히 안티나탈리스트이다. 그는 다른 여러가지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그 기사를 통해 수고했던 것은, 그의 다른 성격적 특징들을 안티나탈리즘과 구별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그의 성격에는 알콜 의존증도 포함되어 있었다. 앤티너털리스트라는 것의 특징 중에 알콜 의존증과 연결된 것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2;20에서 3:14까지 뮤지션과 픽션에서 다뤄지는 안티나탈리즘에 대한 언급은 생략)
질: 윤리학자 피터 싱어는 당신의 주장을 검토하는 에세이를 발표한 기사에서,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만한 값어치가 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출생은 그 자손에게도 마찬가지로 대부분은 좋은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이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을 할려는가?
답: 줄곧 지적해 오고 있는 것이지만, 살 가치가 있는 삶이라는 주장에는 양의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계속할 가치가 있는 삶이라는 뜻도 있지만, 시작할 가치가 있는 삶이라는 의미가 되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것들은 같은 뜻으로 다뤄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시작할 가치가 있는 삶과 계속할 가치가 있는 삶에 대해서 적용하는 기준도 달라야 한다.
여기에 있는 우리는 모두 이미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끝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우리가 지금과 동일한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그 이유는 개인은 일단 존재를 가지게 되면 실제로 계속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익관심(interest)도 갖게 된다. 그 이익관심은 어느 시점에서 삶의 퀄리티가 매우 안 좋아졌을 때는, 그 시점에 굴복해 버리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어나기 전에 당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를 얻지 않으면 이익관심(interest)이란 것 자체가 없다. 때문에 당신은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인생을 (다시금) 시작해야 겠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인생을 계속하는 것을 결단하는 기준보다 훨씬 높게 -값어치가- 설정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중대한 구별을 (너무 쉽게)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질: 일단 존재를 해버리게 되면, 우리에게는 낙관적인 바이어스가 작동하게 된다는 것을 제시하는 연구 결과가 있을것이라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답: 실제로 사람들은 낙관주의적인 바이어스를 대체적으로 가지고 있다. 상당한 양의 심리학적 문헌들이 그것을 실증하고 있다. 물론 모든 개인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일부 개인들은 보다 현실적이어서, 낙관주의적 바이어스를 가진 사람보다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경향도 있기는 하다.
질: 지금까지 사람을 늘리는 것에 대한 정당화를 주장하는 것중에 충분히 이성적이고 비이기적이라고 할 이유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지금까지 들어본 것중에 가장 강력한 논쟁은 어떤 것이었나?
답: 이성적이고 비이기적어서 정당화 될 수 있는 근거가 제시된 적 있었냐는 뜻인가? 그건 출산이 비이기적이란 뜻의 일반적인 통념에서 비롯된 것 같다. 누군가가 생식을 한다면 그것은 국가나 어떤 커뮤니티의 존속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말도 우린 종종 들을 수 있다. 이것이 정말 이타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넓은 의미에서가 이기적인 이유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전혀 확신할 수 없는 주장이다. 즉, 그것은 단순하게 '나의' 이익을 위해서는 아니긴 하지만, 어쨌거나 '내 그룹의' 이익을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를 다르게 해석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커뮤니티를 존속시키기 위해 생식한다는 것은 윤리적인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커뮤니티가 지속되게 해서 새로운 세대가 그곳에서 생식 실천을 계속하고 커뮤니티에서의 생활을 계속해 나가길 바라는 욕심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존재를 부과하게 됨으로써 초래하게 되는 사람들의 엄청난 고통의 경험을 웃도는 값어치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다.
나는 누군가에게 존재를 부가한다는 문제에 관해서 비이기적이고 이타적인 근거가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존재를 부가하는 것을 통해 그 사람에게 우리는 이익을 줄수가 없다. 그 사건은 그 사람에게 항상 해로움만 끼칠 뿐이다.
질:그동안 당신의 주장에 대해 아주 타당한 반론이나 강력한 반박이 제기된 질의가 온적이 있었는가?
답:다양한 토론들이 있어왔다. 진전된 논의가 조금씩 나오고는 있다. 대부분의 반론자들은 낙관론을 정당화 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 중 일부는 진지한 것들도 있다. 나는 반출생주의적 견해를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보기 때문에, 걱정을 느끼는 것은 전혀 없지만, 반론을 제기할 때는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 어떤 부분에서는 기쁜 발전을 느끼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 책이 처음 출간됐을때 쏟아졌던 반응은, 깊은 생각이 전혀 없었거나, 상투적이거나, 아주 불공평한 것 뿐이었다. 지금도 그런 종류의 반응은 여전히 많다. 논의를 하기 보단 인격을 부정하려고 드는 것이다. 그래도 진지한 논의 자체는 즐거운 일이다. 질의가 너무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모든 질문에 다 답변해 줄수는 없지만 가급적 많은 답변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질: 반출생주의자들은 왜 당장 자살을 실행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답: 그것에 대해 진지한 설명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런 질문자들은 내가 주장하는 것의 내용을 제대로 읽어보길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까지 줄곧 반출생주의가 자살과 직접적 관련이 없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행동을 즉시 해야할 명확한 이유 같은 것은 없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어느 때는 정말로 목숨을 끊는 것이 합리적이라 여겨질 정도로, 끔찍할 시점이 오기는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순간이 올 수 있다고 해서, 지금 당장 그런 행동이 반드시 실행되야 할 충분한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실질적으로 삶의 질이 그런 정도까지 악화될 때를 기다리지 않고, 당장 그런 결단을 하는 것은 불합리한 결정이다.
반대로 인생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누군가의 그 인생이 상당량의 고통을 매우 오래 포함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해 봐야 한다. 우리는 그 경우에 한 인간에게 인생을 계속 할 것인지, 목숨을 끊을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심각한 딜레마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명을 타인에게 부가하는 자체를 너무 가볍게 인식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 지금 듣고 계신 방송은 107.3 Siren FM The Species Barrier
질:지구나 다른 동물에게 우리가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생각한다면 염세주의는 이성적인 견해라고 생각하는가?
답: 나는 최근에 염세주의를 안티나탈리즘의 가장 기초적 원리 중에 하나로 옹호했다. 언급하고 있는 나의 전 저서 "Better Never to Have Been"에서 주된 논증은 박애주의적인 고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존재를 탄생시키려 하는 사람들을 위한 고려였다. 그러나 존재를 탄생시키는 것을 반대하기 위한 근거중에도 염세주의는 아주 좋은 동기를 제공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인간은 서로에게 매우 심각한 위해를 가하면서 지구상의 다른 유정적 생물들에게도 중대한 가해를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박애주의와 염세주의가 서로 조화불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그 주장에 대해서 내세울 수 있는 근거로는 인간은 다른 인간이이나 다른 존재에 대해서 사악한 행위를 저지르는 부조리의 가해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희생자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질: 그 발언은 염세주의란 단어가 모욕적인 뜻으로 아닌 것으로 재정의 될 수 있는, 이성적인 입장이란 뜻인가?
답: 그렇다. 물론 잘못된 염세주의도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매사에 보편적으로 염세적이고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매우 싫어하는 사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입장의 염세주의는 인간의 결점에 대한 경멸의 감정과 구분하기가 힘든 것이다. 그런 종류의 염세주의는 내가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 입장은 사람은 매우 파멸적인 종이라는 생각이다. 우리는 그것을 좀 더 인식하고 좀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세상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아무리 최소화 하려 해도, 그 모든 것을 제로로 만드는 건 아주 힘들다.
질: 당신은 남아프리카에서 곧 열릴 테드 토크 이벤트 Should Animals Be Off Menus?에 출연할 계획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동물을 식용으로 쓰기 위해, 인공적인 사육을 하면서 그들을 번식시키는 것에 대하여 특정한 견해를 갖고 있는가?
답: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사고 방식중에 가장 사악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동물들을 그저 식용화 하기 위해서 고통을 가하며 목숨까지 빼앗아 가며, 우리의 식도락을 만족시키려 하는 목적이 어떻게 유정적 생물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것을 통해서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이 수용 가능한 해악이라는 견해를 많이 접해봤지만, 하나같이 형편없는 이기주의였을 뿐이었다.
질: 그럼 당신은 비건(완전 채식주의자)인가?
답: 그렇다. 그 원칙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그것이 반드시 (안티 나탈리즘의 )필요 원칙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 자체가 이것의 목적을 위한 하나의 논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실제로 철저한 비건이다.
질: 당신은 자신의 비거니즘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다른 생물들에게 미치는 일반적인 악영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우리는 분명히 심각한 정도의 부정적인 영향을 다른 생물들에게 주고 있다. 식품산업이 하나의 명백한 사례이다. 그 업계에선 동물들을 강제로 번식시키면서 끔찍한 학대를 가하다 가차없이 죽여버린다. 포획되는 바다 물고기의 수량도 어마어마하다. 우리는 그들을 인공 번식시키면서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가하고, 의약 연구 업계가 가하는 해악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다른 유정 생물에 끼치는 악영향 못지않게 기후 변화에도 우린 부정할 수 없는 악영향을 가하고 있다. 이렇게 헤아릴 수 없는 형태의 가해를 하고 있는 종족이 바로 우리들이다
질: 당신은 모든 종류의 유정 생물들의 멸종을 지지하는가? 우리는 분명 거의 매일 200여 종의 생물을 멸종으로 몰아가고 있다.인간의 개입에 의해 이런 행위를 뒷받침 하는 것은 도덕적인 견해인가?
답: 나는 멸종이 되는 방법을 두 가지로 구별 한다. 그 중 하나인, 생식 중단으로 인한 멸종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찬성이다. 하지만 학살로 인한 절멸에 대해선 전적으로 거부한다. 우리가 인간이나 다른 생물들을 강제적으로 학살해야 할 정당한 이유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생식 중단으로 인한 멸종은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유정 생명체가 일절 없는 행성에 대해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런 종류의 행성들이 고통스런 삶과 죽음으로 가득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행성보다 훨씬 더 환경적으로 나은 곳이다. 그래서 나는 멸종 자체는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에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
질: 그 말은 도메스티케이트(가축화, 애완동물화 등)된 동물들을 인공적으로 번식시키는 것은 반대하지만, 이를 테면, 자연 상태에서 야생으로 살고 있는 생물들에 대해서도 역시 불임화로 멸종시키는 것에는 찬성한다는 뜻인가?
답: 그렇다. 지금 당장은 불임화에 따른 복지에 관련된 문제가 있다. 아직까지는 동물들에게 고통을 가하지 않는 실험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수술 후 통증도 있을 것이고, 그외에도 여러 가지 동물 복지적인 시사점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만약 이를 가능한 최선의 형태로 할 수만 있다면, 가축 동물들이나 야생동물들이 무작정 번식하는 것보단, 환경적으로 훨씬 더 나은 대안이 된다고 생각한다.
질: 우리의 임신은 일반적으로 축복 받는 일로 여겨지고 있지만, 당신은 그런 소식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답: 그것은 내게는 어려운 문제긴 하다. 사람들은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할때, 상대방이 기뻐해 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는 새로운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경험하게 될 상당량의 고통에 대해서 생각하면 깊은 슬픔도 느낀다. 그러나, 내가 나의 양심을 속이는 방법은 새 생명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는 부모를 향한 기쁨과 그 결과로 태어나는 아이를 향한 염려를 구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후자를 항상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그 문제는 상대방과 나의 관계에 달려 있다. 그래서 보통은 (임신을 한) 당신을 위해 축복한다(I'm happy for YOU)라고 말한다.
질: 그렇군요, 나도 사실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다. 당장 축하의 말을 꺼내기 보다는, 앞으로 얼마나 지나면 태어나는 거야? 같은 식의 말을 더 많이 한다. 상대방을 불쾌하게 하거나 상처는 주기가 싫기 때문이다. 그런데 왠지 그냥 축하한다는 말을 꺼내기 힘들다. 거짓말을 하는 것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답: 그런 당신의 대응도 괜찮은 방식이다.아주 재치있는 발상이란 생각이 든다. 그외에도 여러 대응들이 있을 것이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도 아이를 낳는 사람들의 감수성을 존중해줄 의무가 있다. 그들은 우리 만큼 그 문제의 (도덕적) 의미에 대해 생각하지 않거나, 다른 방식의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비록 나 자신은 (반출생주의의) 원칙을 타협하지 않더라도 그들과 사교적인 관계를 유지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질: 당신은 임신을 결정하기 이전에 출산의 도덕적인 문제에 관해 고민하지 않는 부모들에게는 깊은 좌절감을 느낄 것 같다.
답: 사실 정말로 그렇다. 어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아이를 낳으려 하는 사람들의 거의 50% 정도가, 한 생명을 태어나게 한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고민조차 하지 않고, 그저 만들고 있을 뿐이란 것이다. 그 아이들은 그저 성관계의 결과물로 태어날 뿐이다. 특별히 아이를 갖고 싶단 마음가짐 없이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태어나는 아이가 알게 된다면 치욕감마저 느낄 것이다.
그래도 숙고의 상황 끝에 결정되는 경우에 대해선 좀 더 낙관적이다.물론 나는 그들의 선택도 역시 본질적으론 옳지 않다고 보는 편이지만, 그런 경우에는 적어도 아이의 인생과 미래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으며, 강한 의지로 닥쳐올 고난을 헤쳐나갈 인내의 과정이 함께 할 것이다. 인위적 의지만으로 모든 고난이 다 극복되지 않을 것은 분명하 겠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사는 세상엔 평범한 인생보다 더 열악하고 아픔이 많은 인생을 사는 이들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원치도 않았던 출생의 결과로 발생하는 비참함의 결과보다는 그래도 그들의 인생이 더 나은 편일 것 같다.
질: 당신은 태아의 고통 감각의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조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누군가의 선택이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할 수 밖에 없도록 예정되어 있다면, 당신은 낙태를 도덕적인 선택으로 지지하는가?
답: 나는 신경의학자인 형제와 함께 이 문제에 대처하고 있다. 내 목적은 철학적 관심과 신경과학적 관심을 접목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도달한 결론 자체는, 완벽히 독자적인 연구가 아니라 기존의 증거를 종합한 것이기는 하지만,태아가 통증을 느끼기 시작하는 시기는 임신 27주에서 28주 무렵이라고 한다. 나의 반출생주의적 견해는 그 이전 시기에, 반드시 낙태를 하는 것을 의무적 권고로 채택하길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감응력이 있기 이전의 태아 상태에 대한 신경학적 견해와 반출생주의적 윤리관을 종합한다면, 낙태는 감응력을 갖기 이전 상태의 배아에 대해서는 도덕적으로 그릇되지 않으며, 오히려 바람직한 행위라는 결론을 이끌어 낼수 있다는 것이다.
태아가 감응력을 갖게 되는 시점을 본다면, 그것은 미묘하지만 유의미한 도덕적인 지위를 부여받음과 동시에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 시점도 갖게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매우 복잡해진다. 다만 임신 후기라고 해도 낙태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까지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태아가 출산 직후에도 어떤 모종의 큰 고통을 갖고 있다면, 영아 안락사를 실행할 고민에 해당하는 상황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 아이가 어떤 도덕적 지위의 여부에 해당한다 하거나, 계속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익관심을 가질 수 있다 해도, 그 목숨을 이른 시기에 끝내는 것이 더 합리적이게 보일 수 있는 그런 상황도 충분히 가정을 해봐야 한다.
그러나 반출생주의자라고 해서 낙태에 관한 어떤 특정한 결론과 반드시 관계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반출생주의자라고 해도 태아의 도덕적 지위에 관해서는 이견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내 견해만을 밝힌다면, 태아의 도덕적 지위는 감응력이 생기기 이전 시점에는 없다고 보기 때문에, 그 시기에는 낙태를 하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단 더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태아의 도덕적 지위에 관해서 모든 이들이 나와 같은 결론을 가질 필요는 없기 때문에,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지는 입장도 나는 충분히 수용하려 한다.
질: 당신의 연구를 더 많이 알고 싶다면 어디를 찾으면 좋겠는가?
답: 아마 제일 좋은 건 내 저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를 읽어보는 것이다. 최근에는 Debating Procreation(출산 토론)이란 책을 미국의 윤리학자인 데이빗 와설만과 함께 공저했다. 그 내용 절반은 나의 안티나탈리즘적 견해에 대한 변호이며, 나머지 절반은 내 견해에 대한 반론으로 구성되 있다. 출산과 임신 중절 문제에 관한 찬반 양측의 입장을 종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책 한권을 다 읽을 여유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나의 반출생주의 이론에 대한 자료를 케이프타운 대학교 웹사이트에 올려두고 있다. 그곳에서 내 이름을 검색해서 찾아볼 수 있다.
(이하 구구한 작별 감사 멘트는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