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모처럼 하늘은 온통 파란 색깔이고 햇살은 더 없이 맑게 느껴진다. 늘 미세먼지며 황사에 시달리든 삶이라 이런 하늘을 보는 것도 드문 일 같다. 어린 시절에는 늘 하늘은 푸르렀고, 뭉게구름이 피어있었다. 그래선지 미술시간에 풍경화를 그릴 때면 어김없이 하늘은 파란 색이고, 몽실몽실한 구름 두어 덩이를 그 위에 그려 넣었다. 어린 시절의 하늘은 푸른색과 동의어였다. 그러나 지금의 하늘은 잿빛과 동의어일 정도로 푸른 하늘을 보기가 어렵다. 그런 하늘에 모처럼 온통 푸르른 색깔이 가득하다. 눈부신 투명함이 기분 좋게 했다.
남자는 소파에 몸을 깊이 묻고 커피를 마시며 여자를 건네다 보았다. 여자가 사무실 창밖으로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은 신기할 정도로 하늘이 참 맑아. 저런 하늘을 언제 봤는지 모르겠어. 참 좋다.
그러면서 여자는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중얼거렸다. 자기는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주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그런데 한번 마음을 주면 남김없이 주는 스타일이라고. 그래서 때로는 자기가 줄 수 있는 것 이상까지도 무리를 하며 상대를 배려한다고. 그리고는 일단 마음이 통한다고 생각하면 아주 스스럼없이 상대에게 자기의 있는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다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건네다 보며 웃어보였다. 그게 자기에게 하는 말일 것이라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여자는 때때로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단다. 남자에게 무언의 경고 같은 듯한 그 말을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배신? 꽤 묵직한 말이네. 설마 경험을 한 건 아니겠지?
-가끔 불안해. 당신이 사라져버릴 것 같은 불안감. 늘 지금처럼 당신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당신을 향해 느끼는 이런 감정은 사실은 좀 낯설기도 해. 그런데도 그 느낌이 참 좋아.
여자는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여자는 그러면서 자신의 행동이 때로 반복적이니 실수를 한다는 것에 대해 사실 다른 사람도 대체로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어떻든 막연하게 두렵다는 것이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목덜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투명하리만치 하얗고도 가는 목덜미가 시원스레 흘러내리다 하얀색 블라우스 안으로 사라졌다. 스스로에 대한 자책 같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남자는 그런 여자가 자기에게 상처를 주지 말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여자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지금까지는 무엇인가를 잘 하려는 용기도 없고 무엇을 하든 당연히 준비된 것도 별로 없는 자기의 무료한 일상에 어느 날 남자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걸 여자는 행운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여자는 삶 가운데 누구를 만나느냐가 정말 중요한 일임을 남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사람과의 만남이 삶의 방향도 바꿀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도 했다. 그 말을 할 때는 여자의 눈이 반짝였다. 여자는 남자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 만큼 남자는 여자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되어 있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공적인 것이든 사적인 것이든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끝없이 물고 늘어졌다. 때때로 남자가 자기를 귀찮게 생각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들기도 할 저도였으나 다행스럽게도 남자는 도움을 청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남자는 늘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도와주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런 남자의 행동은 여자에게 더욱 깊은 신뢰를 주었다. 남자의 해박한 지식, 일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 왜 그것을 해야만 하는 지에 대한 정확한 해답, 논리 정연한 이야기들은 여자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어느 때부터 여자는 남자의 행동 하나하나가 자기 것인 양 받아들였다.
-정말이지 늘 함께 하고 싶고 하나이고 싶어. 그것이 때로 자유가 아니라 속박이 되어버리지나 않을까 두렵기도 하지만 말이야. 눈빛만으로도 서로를 느낄 수 있으면 그게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싶기도 해.
여자는 탁자에 턱을 괴고 앉아서 커피 잔을 홀짝였다.
-당신의 그런 마음은 알 것도 같아. 그러나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행복이 훌쩍 달아날까 무서운 거야. 어떤 때는 당신이 늘 옆에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해.
여자는 진정으로 행복해 하고 있었다. 남자의 시선 하나하나를 느끼려는 듯 여자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참, 당신 그거 알아? 사람들은 당신 눈매가 날카롭다고들 해.
-그래? 당신도 그렇게 느껴?
-아닌 난 오히려 당신 눈이 참 선하게 느껴져. 날카로움이라기보다 뭐랄까 주변을 꿰뚫어보는 예리함 같은 걸 느껴. 실제로 당신이 업무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그걸 종종 느껴. 어쩌면 그 때문에 사람들이 날카롭다고 하는지도 모르지.
-그건 그렇고, 발표 준비는 잘 되고 있어?
남자가 커피 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럭저럭. 어떻든 당신처럼 잘 하고 싶어. 그런데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
-잘 됐으면 좋겠어.
여자는 경력을 좀 더 쌓고 싶었고, 다른 일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는 그저 마음뿐이었고 욕심일 뿐이었다. 그러나 남자가 오고 나서 여자는 욕심을 현실로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당신이 많이 도와줘야 해.
여자는 남자의 도움으로 발표할 자료를 차근히 준비해나갔다. 준비하는 과정이 힘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남자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다.
여자는 남자의 조언에 따라 차근히 준비를 해나갔다. 준비하는 동안 힘들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남자는 여자에게 다정하게 속삭여주었다. 여자가 힘들어 하면 남자는 금방 눈치를 채고 아무도 모르게 가만히 안아주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갔고 마침내 발표가 시작되었다.
너무 긴장을 한 탓이었는지 아니면 너무 기대가 큰 탓이었는지 여자는 발표가 끝나자 자기의 발표 내용에 대해 상당히 불만족스러워했다. 스스로 느끼기에 기대가 처참히 무너져 내렸고, 그런 스스로에 무척 화가 났고 속상해 했다. 당연히 자존심도 매우 상하는 모양이었다. 도저히 스스로를 주체할 길이 없을 지경이었다. 누군가 이야기 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 순간에 남자가 있다는 것이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남자는 전화 한 통화면 언제 어디서든 달려왔다. 둘은 조그마한 맥주 집에 마주 앉았다. 자리를 잡고 앉기 무섭게 여자는 스스로를 자책하듯 남자에게 평소에는 잘 하지 않던 말들을 포함해서 무지막지한 양의 말들을 쏟아댔다. 마치 발표가 잘 되지 못한 것이 남자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 여자를 감싸 안아주고 위로해 주었다.
-나는 관리자가 될 자격이 없나봐.
발그레해진 얼굴로 여자가 남자를 지긋이 올려다보며 웅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