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aker. 강
음악소리가 너무 커서 뇌가 흔들릴 지경이었다.
“강이씨, 여기 어때요? 분위기 괜찮죠?”
도진씨가 바짝 다가앉으며 물었다.
음악소리가 너무 커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대화가 안 되기도 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 거리자
“오늘밤 너무 예뻐요. 하얀 원피스가 천사 같네요.”
민망한 칭찬 때문인지 칵테일 때문인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강이씨는 지금처럼 부끄러워 얼굴이 살짝 빨개질 때 정말 예쁩니다. 정말 예뻐요.”
도진씨도 말하고는 쑥스러운 지 볼이 상기되었다. 친구들 말처럼 나쁜 사람 같진 않았다.
“우리도 나가서 춤출래요? 잘 추는 건 아니지만 이런 일탈도 재밌네요.”
그래, 이 정도의 일탈은 괜찮겠지? 오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행복해 보이는 친구들을 보며 도진씨를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음악에 몸을 맡기고 칵테일에 취해가는 시간이었다.
알코올이 거의 들지 않았다는 칵테일을 몇 잔 마셨는지 모르겠지만, 조금씩 웃음이 많아지고 상대가 편해져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의 즐거움은 일탈이 주는 의외의 사건들도 한 몫을 한다고 주아가 말해줬는데…….
그런데 주아는 어디 있지? 시연이는?
주위를 둘러보는 내 의도를 알았는지 도진씨가 날 끌어당겨 귀에 대고 말해준다.
“친구 분들은 좀 전에 파트너들과 나갔어요. 아마도 해변을 산책하거나, 분위기 좋은 조용한 바에서 가볍게 한 잔 더 하겠죠. 우리도 나갈까요?”
고개를 끄덕이자 도진씨는 내 어깨에 가볍게 팔을 둘러 밖으로 인도했다.
상쾌한 밤공기와 바닷바람내음이 섞여 순간 술이 깨는 듯 했다. 이국적인 도시의 밤거리가 꽤나 낭만적이었다. 이 순간 오빠와 함께 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보같이.
“어디 가서 한 잔 더 할까요?”
“아니요. 그냥....들어가서 쉬고 싶어요.”
“그래요 그럼. 바래다줄게요.”
친절한 웃음을 지으며 땀에 젖은 곱슬머리를 쓸어 넘기는 도진씨를 보니 좀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호텔 바에서 가볍게 한잔 할까요?”
내 제안에 금세 환하게 웃는 걸 보니 이번엔 내가 잘한 것 같았다.
침대에 누워있었다.
잠시 동안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정신을 바로하려 애썼다.
실오라기 같은 기억 하나가 잡힐 듯 잡힐 듯 코앞에서 아른 거렸다.
세상에..... 실오라기를 간신히 잡고 보니 기억의 타래가 풀려나온다.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가볍게 한잔 하면서 얘길 나누다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고....그리곤 기억이 없다.
기억들은 조각조각 단편이 되어 사진처럼 컷으로 떠올랐다.
거친 손길이 옷을 헤치는 기억, 조금도 힘이 닿지 않았던 반항의 몸짓.
얼굴로 날아든 얼얼한 손바닥의 힘. 바닥을 뒹굴 던 내 몸....전라의 몸…….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거울 앞으로 갔다.
오른쪽 눈은 심하게 부어 잘 떠지지 않았고, 입술엔 피가 엉겨 붙어 버렸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엔 군데군데 멍이 들어 거울속의 내가 정말 내가 맞는지 지금의 모든 게 현실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방문이 열리며 주아가 들어오다 멈춰 섰다.
“아악!”
주아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쓰러졌다.
speaker. 주아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며칠 째 시연이에게 전화가 오고 있지만 받을 수가 없었다.
괌여행을 끝으로 더 이상 시연이도 강이도 볼 수가 없었다.
각자 파트너와 밤을 보내고 우리 객실로 돌아와서 마주한 강이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엉망인 얼굴과 망가진 몸보다 다리 사이로 흐르던 핏자국은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멍한 눈빛의 강이가 날 돌아보는 순간 그대로 정신을 잃었고, 어쩔 줄 몰랐던 난 이불로 강이의 몸을 가리고 시연이를 불렀다.
눈물이 계속 흐르며 정신이 없었다.
이대로 죽으면 어쩌나... 만약 잘못 되기라도 해서 나에게도 죄가 있다고 하면 어쩌지?
온갖 생각들로 손이 떨리고 진정이 되질 않았다.
시연이가 강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오사장을 불러 강이를 침대에 눕히고 수건을 적셔 온몸을 닦일 때에도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신고해야 하나? 이 나라의 법은 어떻게 되는 걸까?
안 좋은 생각에 더 더욱 안 좋은 생각들로 빠져들고 있을 때 시연이가 소리를 꽥 질렀다.
“너 뭐하는 거야! 일단 대충 짐 챙겨. 강이 일어나는 대로 떠날 수 있게. 그리고 오빤 비행기 표 얼른 예약해줘. 주아야, 강이 여권도 좀 찾아줘. 표 예약하게.”
그래, 빨리 떠나야한다. 지옥으로 변한 이 곳을 빨리 떠나야 한다.
문 밖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렸다.
“새끼야! 그 버릇 또 나왔냐! 이 X신 새끼. 네가 다 망쳤잖아!”
“술버릇이 그런걸 어떻게 하냐. 어제 저 년이 너무 반항을 하더라고. 다 내 잘못만은 아니야. 지가 방까지 불러들여놓고. 성질나게. 으이 ~~썅!”
나가서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너무 무서워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사람인 줄 알았다면 애초에 강이를 데려오지도 않았을 거였다.
아니, 이런 세상에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추잡한 일에 꼬여 버린 걸까?
언제부터 였을까? 가난이 문제였다.
아빠의 죽음이후 찾아 온 가난 때문이다.
난 돈이 필요했고, 성공을 해야 했다.
그래서 다단계에서라도 성공해야 했고,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끌어 들였다.
결과적으론 남은 게 빚뿐이지만 사람들을 속였다는 죄책감보단 성공하지 못한 분노가 더 컸다.
그 때 성공만 했더라면 시연이의 말 같지 않은 제안은 일언지하에 거절 했을 텐데…….
늙은 오빠의 돈이라도 좋았다.
힘들여 최저임금 받으며 하루 종일 서 있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렇지만 이건 아니다.
내 눈으로 본 이 세계의 종착지는 바로 이런 모습일 테니까.
저기 누워 있는 게 강이가 아니라 내가 될 수도 있으니까.
다시 눈물이 나려했다.
“정신 들어? 강아~ 괜찮아?”
강이의 몸을 연신 닦던 시연이가 강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오사장에게 나가라고 손짓을 했다.
오사장이 조용한 걸음으로 밖으로 나가고 강이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나 많이 아픈가봐.”
“강아, 놀라지마. 너 많이 아픈 것 맞아. 우리가 돌아 와 보니 네가 바닥에 쓰러져 있어서……. 잘 모르고 해서 병원에도 못 갔어.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오사장님도 전화 안 받고…….”
시연이는 뻔뻔스런 거짓말을 해댔다. 이번 일에 자신의 무관함을 보이고 싶어서겠지.
한 편으론 시연이의 뻔뻔함이 감사하기도 하다. 덕분에 나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나……. 기억이 잘 나지 않아. 그냥....집에 가고 싶어.”
“그래 강아. 안 그래도 비행기 표 제일 빠른 걸로 알아보고 있어. 우리가 다 준비할 테니 넌 누워있어. 좀 더 잘래?”
강이는 대답 없이 스르르 눈을 감았고 시연이는 재촉하는 듯한 눈빛을 내게 보낸 뒤 조용한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우린 먹지도, 자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헤어지는 순간에도 그 흔한 손인사도 하지 않았다.
강이는 어떻게 됐을까?
speaker. 중하
오늘 꽃 같은 세 명의 여자가 우리 펜션을 찾았다.
모두 너무 예쁘고 화사 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아마도 그녀가 초대를 한 것 같았다.
그녀는 왜 그녀들을 내게 보낸 걸까?
그녀를 위해서라도 그 사연을 들어봐야 될 것 같다.
그래서 일부러 수영장으로 쫓아가 소주 한잔 같이 하자 너스레를 떨어 두었다.
이렇게라도 해둬야 중년의 아저씨가 들어갈 조금의 틈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늘 여자들은 참 힘들다.
25년 전, 나도 나름 꿈 많고 인기도 많은 공학도였다.
과 동아리와 봉사 동아리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동기와 선배들에게 예쁨도 받고 애교도 많은 신입생이었다.
술과 유흥으로 대학 1학년을 멋지게 망치고 따발총 맞은 성적을 피해 군 입대를 결심하고 휴학을 했던 21살.
단기 알바로 유흥비를 연명하며 휴학한 대학 근처 술집을 전전하던 그 때, 어느 날 아침이었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어 힘겹게 어머니를 불렀다.
내 딴엔 큰소리를 쳤는데, 나오는 건 모기만큼 가느다란 소리뿐이었다.
내 소리를 들어서가 아니라 날 깨우기 위해 방문을 여신 어머니는 다짜고짜 내 등짝부터 후려갈기시며 소리치셨다.
“어디서 또 장난질이야! 얼른 일어나! 해가 벌써 중천이다.”
꺽꺽 거리는 내 모습을 한참 보시던 엄마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시며 놀라셨다.
“에고! 이놈이 왜이래? 중하야! 정신 차려봐!”
부랴부랴 119에 실려 병원으로 가는 사이 난 거짓말처럼 온몸의 마비가 스르륵 풀렸다.
병원에 도착했을 땐 내 발로 구급차에서 내려 걸어 들어갔으니 내가 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구급대원의 설명을 들은 의사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몇 가지 검사만 해보자고 했고, 검사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엄만 술 먹는 귀신이 돈 잡아먹는 귀신도 됐다고 구박을 하셨고, 그렇게 난 입대를 했다.
군시절은 어떤 걸 말해도 다 지루하고 뻔 하지만, 내 군대 생활은 좀 특별했다.
이등병에서 일등병으로 막 진급했을 때 내 밑으로 막내가 들어와서 놀려먹기 딱 좋을 때였다.
교육을 핑계로 따로 불러내 노래도 시키고 무서운 얘기도 시키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을 때 이놈이 갑자기 내 머리 위를 가리키며 순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이 일병님은 얘를 왜 달고 다니십니까?”
“뭐? 너 죽을래? 뭐 임마!”
“꽤 된 거 같은데 말입니다. 이렇게 위에 달고 계시면 피곤하지 말입니다. 혹시 아픈 덴 없으십니까?”
뭐....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다. 입대 전 응급실 다녀온 거랑, 훈련소에서 수류탄을 잘 못 던져 죽을 뻔한 거랑, 후반기 교육받을 때 부대에서 나만 식중독에 걸려 일주일 정신 못 차렸던 거랑, 지난 이등병 생활동안....그러고 보니 수도 없이 많은 죽을 고비를 넘겨왔다.
“그래도 이 일병님 조상신인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수호신이 계신 것 같지 말입니다. 더 위험해 지시지 않으시려면 하루라도 빨리 받아 들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때만 해도 이 녀석이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넌 뭔데 임마! 알지도 못하는 게 선무당이 사람 잡겠네.”
그 녀석은 대대로 무당 집안이라 했다. 자신도 기운 정도는 볼 수 있다고…….
아무리 그렇다 해도 무당이라니...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난 촉망받는 공학도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 날수가 없다.
도망칠수록 더 맹렬하게 달려드는 맹수와도 같다.
제대를 하고 3년이 지났음에도 복학도 하지 못했다.
매일 생사를 넘나드는 삶과 전쟁을 하고 있다.
전국을 돌며 병의원을 섭렵했고, 어머니와 기도원에 들어가 기도도 해 봤다.
조금의 차도도 보이지 않고,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가 끓여 주시는 멀건 죽 한 그릇도 넘기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문득 후임의 말이 생각났다. 어머니를 설득해 용하다고 소문난 무당을 찾아갔다.
교회를 집보다 편히 생각하시는 김집사 어머니를 설득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러다 아들 죽인다고 화를 내시는 아버지의 호통에 어쩔 수 없이 걸음을 하셨다.
소문난 무당이 있다는 안수를 찾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아무리 지도를 봐도 같은 자리만 맴돌고 있었고, 전화를 걸어 길을 묻고 또 묻고 해질녘이 되어서야 무당집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운전하시던 아버지도 4월의 쌀쌀한 날 땀에 흠뻑 젖어 뒤를 지키셨고, ‘주여!’를 외치던 어머니도 손에 쥐었던 십자가를 슥 내려놓고 따라 내리셨다.
휘청거리던 다리를 바로 세우며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을 때, 갑자기 다리에 힘이 생기고 온 몸에 알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어서 오니라.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네. 고생 많았쟈?”
대뜸 말을 놓고 살갑게 맞아 주시는 중년의 아주머니는 어머니보다 더 편안함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병마와 씨름한 고생을 말함인지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된 고생을 말함인지 알 수 없었지만 위로받음에 왈칵 눈물부터 났다.
“걱정 말어. 이제 아플 일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다.”
아주머니 품안에 와르르 무너져 하염없이 울었다. 처음으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림굿을 받는 날 우리 집 식구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지난 3년 신어머니를 모시며 공부를 했음에도 내림굿을 받는 당일엔 정말 내가 할 수 있을지 스스로 의심을 하게 되었다.
“중하야, 넌 선택받은 거여. 그동안 원망도 많고 거부도 했지야? 신을 모시기로 한 이상 그저 신의 뜻대로 하는 겨. 우리가 신의 뜻을 다 알 수 없으니, 주장신이 시키시는 대로 공수를 전할 뿐이다. 신들의 통로일 뿐이여. 뭘 하겠다는 생각은 버리고 그저 신께 맡기면 되는 겨.”
스물아홉의 촉망받는 공학도 이중하는 그렇게 박수무당이 되었다.
처음 몇 년은 어느 곳에서나 혼자 다른 세상에 살게 되었다.
점사를 보는 신방에서 뿐만 아니라 집 앞 슈퍼만 가도 귀에 물이 들어갔을 때와 비슷한 현상이 계속 되었다.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있음에도 내 주위엔 막 같은 게 형성되어 있는 듯 소리도, 빛도 다르게 느껴졌다.
이것을 표현하기는 참 힘든 일이다.
그 때의 난 꽤나 유명한 박수로서 전국팔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럴 때일수록 기도에 더욱 매진하라고 신어머니께서 찔러주지 않으셨다면 난 그로부터 몇 년 후에 주검으로 발견되었을 지도 모른다.
서른중반 쯤 되던 어느 겨울, 자미산 중턱에서 기도를 하던 중 곁에 머무는 어진혼 하나를 보았다.
아는 척을 하지 않고 기도에 매진 한 후 마치고 돌아보니 사라지고 없었다.
신어머니께 말씀드리니 언제부터 혼들이 보이는지 물으셨다.
생각해보니 보이기 시작한 건 오래되지 않았다.
늘 혼들과 가까이 지내니 그런가보다 생각했으나 혼들을 느낄 수는 있어도 볼 수는 없었는데, 언젠가부터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자미산 기도를 다니면서 그런 듯 하다 말씀드리니 무당 짓 그만두고 산에 들어가 기도를 하라 하신다.
신어머니의 말씀은 늘 옳았기에 더는 묻지도 않고 그길로 보따리 하나 싸들고 더 깊은 자미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다시 3년여가 지날 무렵 신어머니가 꿈에 나와 이제 그만 내려오라며 손짓을 하셨다.
가장 먼저 내려와 신어머니를 찾아가보니 집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너무 이상하게도 그 집은 이미 아주 오래 전 비어 있었던 듯한 모습이었다.
못해도 10년은...아니 20년 이상은 오랫동안 방치되고 있었던 곳이었다.
갈 곳이 없었던 나는 신어머니와 처음 마주했던 마루에 새우처럼 몸을 말아 누었다. 산길을 헤치고 나와 몸이 고단했다.
“남쪽으로 30분쯤 가면 허름한 집이 나올 것이다. 거기에 정착해서 사람들 위로해주고 보듬어 주면서 살다보면 네가 할 일이 보일 것이여.”
꿈속에서 신어머니와 조우한 후에 그 뜻에 따라 내려와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해너미펜션이다.
보잘 것 없던 이곳이 번성하게 된 것은 한을 풀고 떠난 혼들의 염원 때문이라 생각한다.
거둬야 할 어진혼들이 아직 많이 찾아오고 있다.
그렇게 초대받은 사람들과 함께.
speaker. 강
아직 이른 시기라서 바닷물이 차다.
파도나 즐기려고 했지만 잔잔한 바다가 그마저도 허락지 않았다.
시연이랑 주아는 금세 지쳐서 수영장이나 가자고 한다.
그래. 원래 시연이랑 주아는 금세 지겨워하고 지치곤 했지.
펜션 수영장에 도착하니 둘의 언쟁이 시작됐다.
“진짜 말 좀 해봐. 어? 왜? 왜 강이 이름으로 예약 한거야?”
“아이, 왜 또 그래~ 중요한 일도 아니고. 그냥 잊어. 아무 것도 아닌 걸 왜 자꾸 꺼내.”
“그러니까. 왜 아무 것도 아닌 건데 그랬냐고!”
“좀 그만해! 그냥 잠이나 자야겠다.”
숙소로 오르는 주아의 팔을 잡아 당겼지만 주아가 팔을 흔들어 신경질 적으로 털어내자 시연이도 더는 잡지 않았다.
“시연이 너 왜 그래? 내가 그렇게 싫어? 내 이름으로 예약한 게 뭐 대수라고 자꾸 그걸 걸고넘어지는 건데!”
내 쪽으로는 시선도 두지 않고 주아가 사라진 방향만 뚫어지게 노려보던 시연이가 몸을 돌려 수영장으로 뛰어 들었다.
난 또 이 친구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숨만 크게 내쉬고 숙소를 향해 계단을 올랐다.
주아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든 건지 그냥 눈만 감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주아야, 자? 시연이랑 그러지마. 시연이가 오늘 기분이 별로인가 봐. 그냥 이유 없이 까칠하네. 네가 더 착하니까 네가 참아. 히히히 이건 시연이한테 말하지 말고.”
농담까지 섞어 조심스레 말을 건넸어도 묵묵부답인 걸 보니 잠이든 모양이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와 아래를 보니 시연이는 여전히 텅 빈 수영장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어째 혼자 나와 계세요? 친구 분들은 어쩌시고?”
펜션 사장님이 나오시며 말을 거신다.
“네, 잠도 자고 수영도 하고 그러네요. 전 그냥 바다가 좋아서 그냥 이쯤에 앉아 바다나 보려고요.”
“여기 바다 참 예쁘죠? 파도 소리도 좋고. 많은 분들이 이곳에서 힐링도 하고 응어리 졌던 마음도 풀고 가시고 그럽니다. 손님들께도 그런 곳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참 감사한 말씀이다. 처음 봤던 사장님의 이상한 첫인상이 죄송하게 느껴질 만큼 참 포근한 느낌을 주는 분이다.
“해지고 나오시면 풍등도 띄워드릴게요. 손님들께만 특별히 해드리는 거니 비밀입니다. 으하하하하하”
저 웃음이 처음엔 그리도 음흉해 보이더니 이젠 세상 친절한 웃음소리 같다.
“저녁 식사 하실 때 한번 건너오세요. 소주 한잔하시게요.”
살풋 웃어 보이니 사장님은 더 크게 웃으신다.
“아이구, 맛있는 거 드시네요.”
사장님이 손에 채소를 듬뿍 들고 일렬로 이어진 베란다로 불쑥 들어오셨다.
이곳의 베란다는 같은 층은 통으로 사용하고 사이사이엔 파티션처럼 벽을 세워놓아 테이블에서 한걸음만 나가면 다른 호수와도 연결이 되는 구조였다.
주아가 살짝 찡그리며 불쾌한 티를 냈지만 시연이가 반가운 채를 했다.
“어머, 사장님 오셨어요? 뭘 이렇게 들고 오셨어요! 그냥 오셔도 괜찮은데…….”
“제가 드릴 게 저희 텃밭에서 자란 싱싱한 무농약 채소들뿐이네요. 이래 보여도 맛은 기가 막힙니다. 허허허허“
“잘 오셨어요. 이리 앉으세요.”
나까지 반갑게 맞으며 빈 의자를 내어 드리자 주아도 하는 수 없다는 듯 표정을 풀었다.
“친구 분들 같은데, 함께 여행 자주 다니시나 봅니다.”
“아니, 아니에요. 어릴 때 친군데 오랫동안 못 보다가 같이 오랜만에 여행 온 거예요.”
“자주 못 보셨구나……. 세분 정말 오랜만에 만나시니 더 반갑겠어요.”
“네?”
그 때 왁자지껄하게 큰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가족 손님들 바다에서 들어오시나 보네요. 여기가 해너미펜션 이잖아요. 일몰이 끝내줍니다. 여기서 식사하시면서 보시면 응어리 졌던 마음도 풀리고 답답했던 마음도 해소가 되곤 합니다. 아하하하”
그렇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사장님이 사라지고 그 방향에서 점점 더 크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시간이 어중간하여 짐도 안 풀고 바다먼저 들어갔다가 이제야 숙소에 짐을 푸는 모양이다.
세 가족이라더니 정말 시끌시끌했다.
“호텔 가자니까 굳이…….”
“애들 놀기엔 이런 곳이 더 좋은 거야. 뭘 알지도 못하면서. 이번엔 애들이랑 잘 좀 놀아줘봐.”
“그래 임마. 제수씨 속 좀 그만 썩이고 철 좀 들어. 키키키키”
“으이그, 당신이나 잘 하셔.”
유난히 시끄러운 그들 일행은 아이들은 뒷전인지 아이들이 우리 쪽 베란다까지 넘어와 뛰어 다녔다.
“야! 저리 가서 놀아!”
시연이가 시끄럽다며 짜증을 내자 아이 엄마인 듯한 여자가 다가와 화를 냈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남의 귀한 자식한테!”
“아줌마, 저도 귀한 자식이니까 좀 우아하게 밥좀 먹게 합시다. 네!”
“뭐라는 거야! 여보! 여보!! 여기 좀 와봐!”
여자가 바깥쪽을 향해 소리를 지르자 배가 불룩한 아저씨가 기세 좋게 나서며 소리쳤다.
“무슨 일이야!”
순간 공기마저 정지한 듯 억겁 같은 몇 초가 지났다.
어디서 봤더라? 낯이 많이 익은데?
“아, 죄송합니다. 식사하시는 데 방해가 됐네요. 뭐해~ 애들 안 챙기고.”
“당신 뭐라는 거야! 엉?”
“빨리 와! 창피하게!”
“대체 왜 그러느냐구! 아는 년이야? 엉? 아주 젊은 년들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지!”
“지랄말구 애데리구 빨리 와!”
부부지간 같은데 말을 어찌나 험하게 하는지 철천지원수가 싸움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남편 손에 거칠게 이끌려 가족이 사라졌는데도 저녁 테이블의 공기가 싸늘하다.
한참을 말없이 음식만 쏘아보던 시연이와 주아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 얘들아, 왜 그래? 아줌마 때문에 기분 안 좋아져서 그래? 그래도 저녁까지 굶을 건 없잖아! 응?”
나의 만류에도 아랑곳 하지 않던 그녀들의 손을 멈추게 한건 펜션 사장님이었다.
“아이구~ 벌써 파하시게요? 좀 전에 소란스런 소리가 들리던데 별일은 없으셨지요? 혹시 무슨 일이 있었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죠. 손님들 드시라고 제가 아끼던 과실주를 가져왔는데 한번 드셔보세요. 자, 자. 앉아보세요. 조금 있으면 기막힌 해넘이가 있을 테니 천천히 한잔 드시면서 감상하시면 최고일 겁니다.”
마지못해 자리에 앉으며 궁금은 했는지 시연이가 물었다.
“이건 무슨 술이 예요?”
“아 네~ 오디주입니다. 뒷산에서 제가 직접 따다가 작년에 담근 놈이죠. 제가 가져오기 전에 살짝 맛 봤는데 아주 끝내줍니다. 어허허허허허.”
한잔 씩 받아들고 맛을 보니 사장님의 말이 허세는 아니었다. 정말 맛이 기가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