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가 말했던가. “케네디의 머리를 관통한 총탄은 링컨의 가슴을 관통한 총탄이었고, 그 이전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달았던 못이었고, 시저의 가슴을 꿰뚫은 브루투스의 칼이었고,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배였고, 아벨을 내리친 카인의 돌이었다.”
동일자의 영겁회귀라고 할까.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되며 계속 반복되는 어떤 ‘원형’ 같은 게 있는 듯하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이 이미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주는 건 그 때문일 게다.
◇동일자의 영겁회귀
집권 3년이 채 안 됐건만 보이는 풍경이 벌써 낯익다. 언젠가 본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 드루킹의 매크로는 그전엔 십알단의 댓글이었다. 김태우의 처벌은 이석수의 파면이었고, 조국의 사찰무마는 우병우의 직권남용이었다. 윤석열의 수난은 채동욱의 수모였고, 윤 총장을 노린 한겨레의 저격은 채 총장을 날린 조선일보의 폭로였다. 청와대의 선거개입은 국정원의 대선공작이었고, 황운하의 충성은 김용판의 충정이었다. 조민의 표창장은 정유라의 금메달이었고, 고대생들의 항의는 그전엔 이대생들의 시위였다.
“대리시험이 오픈 북”이라던 유시민은 그전엔 “주어가 없다”던 나경원이었다. “문프께 모든 권리를 양도해 드렸다”는 공지영은 그전엔 “나라를 팔아먹어도 1번”이라던 어느 경상도 아낙이었다. “강남에 건물을 소유하는 꿈을 꾸는 게 유죄냐”는 안도현은 그전엔 “강남이 일궈온 성공과 가치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정권 잡는 끔찍한 상황을 피하려 악착같이 투표장에 간다”던 어느 대치동 사내였다. 서초동 조국기부대는 그전엔 헌재 앞 태극기부대였고, 그보다 훨씬 전엔 이승만 박사의 출마를 청원하던 우마차 부대였다.
진보적으로 사유하는 이들에게 이 상황은 당혹스럽다. 진보주의자들은 사회가 선형적으로 발전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진보사관에 따르면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르며, 사회는 나날이 나아져 언젠가 최종목표(텔로스), 즉 완전한 자유와 평등의 유토피아에 도달한다.
그렇게 믿어온 이들에게 사회가 과거보다 나아지지 않았거나 심지어 더 나빠졌다는 느낌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리라. 진보적으로 사유하는 이들은 이때 참담함 속에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패닉에 빠지게 된다.
수많은 이들과 촛불을 들고 광화문을 걷고, 탄핵소추가 이루어지던 국회를 에워싸고, 탄핵이 인용되는 장면을 TV로 지켜볼 때만 해도 희망이 있었다. 그때 탄핵 당한 대통령은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치며 나라를 비정상이 정상의 행세를 하는 곳으로 바꿔놓은 바 있다.
그래서 촛불후보는 장미대선에서 “이게 나라입니까?”라고 외쳤고, 당선되어서는 ‘적폐청산’의 이름으로 그 비정상을 청산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청산된 국가의 국민은 벌써 이렇게 묻고 있다. “이건 나라입니까?”
◇주류의 교체
앞만 보고 걸었는데 사회는 제 자리로 돌아왔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사실 탄핵을 기점으로 이 사회에는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다. 그새 한국사회의 ‘주류’가 보수주의 세력에서 자유주의 세력으로 교체된 것이다. 탄핵 이후 보수는 휘날리는 태극기와 함께 지리멸렬해졌고, 아직도 그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 사이에 자유주의 세력은 날로 지배를 공고히 했고, 지금도 승리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그들의 교만한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것처럼 보인다.
과거에 진보는 한국정치의 ‘변수’였다. 진보정권이란 그저 스쳐 지나가는 현상일 뿐이었다. 국민의정부는 IMF 사태라는 ‘예외적 상황’에서 자민련과의 연합으로 가까스로 탄생했다. 참여정부 역시 노무현이라는 ‘예외적 개인’의 인기로 탄생해 탄핵역풍으로 겨우 유지됐다. 잠시 정권을 잃었을 뿐 ‘상수’로 여겨진 것은 보수였다. 그러나 지금 한국정치의 ‘상수’는 자유주의세력이다. 보수는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복귀할 가망이 없어 보인다.
과거의 386들은 어느덧 586이 되어 사회의 주류로 똬리를 틀었다. 1990년대 호경기 때 사회에 나온 그들은 아파트를 가진 중상층이 되었다. 반미전사 이석기는 아들을 ‘철천지 원수’ 미국으로 유학 보냈고,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 ‘의장님’의 딸도 미제의 대학에 다닌다. 사노맹의 은수미는 성남 조폭에게 자원봉사(?)를 받았다 하고, 같은 조직에 있던 조국은 아내와 함께 강남에 건물 사는 혁명적 꿈을 공유한다. 그런 586을 젊은 세대는 이미 새로운 기득권세력으로 바라본다.
지난 정권에서 낙하산 태워내려 보낸 수많은 이들의 자리에는 지금 이 정권에서 내려 보낸 수많은 이들이 앉아 있을 게다. 진보가 과거의 보수가 되었다는 불편한 진실은 가끔 검찰의 공소장을 통해서나 알려진다. ‘드루킹이 오사카 총영사 자리를 요구했다’ ‘민정수석 딸에게 장학금을 준 의사가 어디 의료원장이 됐다’ ‘대통령 친구에게 후보자리를 내준 이에게 공기업 네 자리 중 하나를 권했다’ 등. 모든 게 바뀌었는데 하나도 바뀐 게 없다. 아무리 올라도 제 자리로 돌아오는 에셔의 계단에 갇힌 느낌이다.
◇후안무치
물론 바뀐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은 그래도 머리 숙여 사과는 했다. 비록 잘못은 했어도 ‘윤리기준’은 존중하여, 그 기준에서 벗어난 자신을 탓하거나 혹은 탓하는 척했다.
문재인 정권의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잘못을 해놓고 외려 적발한 사람들에게 성을 낸다. 그냥 비리만 저지르는 게 아니라, 그 행위가 잘못이라 말해주는 ‘윤리기준’을 건드린다. 아예 기준 자체를 바꿔버림으로써 자신들은 하나도 잘못한 것이 없는 대안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결과 ‘아빠 찬스’는 기회의 평등함이 되고, ‘문서 위조’는 과정의 공정함이 되고, ‘부정 입학’은 결과의 정의로움이 되었다. 가치는 전도됐다. 비리를 저지른 자들이 외려 피해자 행세하며 그것을 적발한 검찰과 그것을 알리는 언론을 질타한다. 이 적반하장이 문재인 정권 하에서는 일상의 풍경이 되었다.
왜들 이렇게 뻔뻔해졌을까. 가장 기가 막힌 것은, 부르주아 중에서도 질 나쁜 축에 속하는 이들의 방식으로 살아온 장관후보가 여전히 자신을 “사회주의자”라 칭하는 대목이었다.
어쩌면 여기에 그 뻔뻔함의 비밀이 있는지도 모른다. 부패한 기득권층이 된 지 오래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이 진보운동을 한다는 환상에 빠져 있다. 종로에 전셋집까지 얻었던 임종석은 한때 정계를 떠나며 ‘앞으로 통일운동에 헌신하겠다’고 말했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는 악마의 ‘원환’에 빠졌지만 머리로는 여전히 자기가 사회의 진보를 위해 싸운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보수세력의 낙후성은 ‘그래도 이들이 상대적으로는 진보’라는 착시를 일으킨다.
여전히 운동가라는 착란은 ‘나를 지키는 게 곧 운동의 대의를 지키는 것’이라는 독선으로 이어진다. 운동가는 순결하다. 혁명가는 고결하다. 그런 내가 부도덕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도덕이 잘못된 것이다. 고로 도덕부터 청산해야 한다. 그리하여 부도덕한 자들은 도덕적 인간이 되고, 도덕을 지키며 사는 이들은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가 된다. 그리고 “내가 조국이다!”라는 슬로건과 더불어 이 뒤틀린 도덕은 만인의 것이 된다. ‘포스트-진리’의 시대는 ‘포스트-윤리’의 시대이기도 하다.
무능하나 순결했던 진보는 어느새 유능하나 부패한 보수로 변신했다. 이는 ‘예외’가 아니라 새로운 ‘정상’이다. 정권은 바뀌어도 권력은 바뀌지 않는다. 불편한 기시감은 여기서 나온다. 상상인은 그전엔 부산저축은행이었고, 환경부 블랙리스트는 그 전엔 문화부 블랙리스트였다. 추미애의 아들은 그전엔 황교안의 아들이었고, 방송에서 하차 당한 양희은과 박미선은 그전엔 김미화와 김제동이었다. 심지어 이 기시감마저 이미 본 듯하다. 사실 이 글의 첫 문단은 2005년 황우석 사태 때 쓴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조국은 그전의 황우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선거개입 공소장에 35번이나 등장했다는 ‘대통령’이란 단어도 불편한 예감을 준다. 얼마 전에 봤던 장면마저도 순환의 고리를 돌아 기어코 회귀하고야 말 것인가. 진중권 미학자, 전 동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