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들이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 사실에 대해서 처음 공개적으로 증언한 때는 2005년 5월 17일 Daily NK가 "5.18 광주, 北에서는 이렇게 보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을 때였다. 이 기사에서 한영진 기자와 정영호씨와 박창선씨 등은 북한에서 “북한의 특수부대 한 개 여단이 잠수함을 타고 서해로 들어가 무장 봉기군과 합세했다. 특수부대는 남한 사람들과 같이 장발도 하고, 말씨도 서울말로 고쳤다.” "우리 공작원들이 주동이 되어 대열을 정리하고 계엄군과 싸웠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하였다 (http://www.dailynk.com/?p=9713 ).
바로 그 날 미주통일신문 배부전 기자의 주간칼럼에서 배부전 기자는 미주 탈북자들의 증언을 인용하여 북한군 특수부대 61저격여단 대대장 봉언이 인솔하는 북한군들이 광주 광천동 아세아자동차에서 장갑차와 군용트럭을 탈취하여 무장폭동을 일으키고 전라도 전 지역으로 확산시키려 하였을 바로 그때 김일성은 민주주의 인민혁명을 성공시키려 하였다는 방송을 하여 미주 지역에서 방영되었다. 바로 그 즈음 풀러신학교에 유학 중이던 한 탈북 군관도 그때까지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학우들에게 광주사태는 북한군 2개 대대가 침투하여 일으킨 것이라는 증언을 하였다. 이어 2006월 12월에는 북한군 특수부대 출신 탈북자들의 단체 자유북한군인연합이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언하였다.
가장 최근의 탈북자들의 5.18 증언은 리버티코리아포스트에 [충격 증언]. 평양 TV에 “남한에서 시위투쟁하는 아버지가 나왔다"라는 제목으로 실린 2018년 5월 24일 기사이다. 이애란 기자는 이 기사에서 한 탈북자의 5.18 증언을 이렇게 보도한다:
5.18의 진실을 알리는 이런 탈북자들의 증언이 국민에게 알려지지 못한 데에는 조갑제 대기자의 책임도 크다. 탈북자들의 5.18 증언이 있을 때마다 조 기자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믿을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 중요한 증언들이 묻히게 하였다. 2013년 5월 중순에 TV조선과 채널A가 탈북자들의 5.18 증언을 방송하여 모처럼 5.18의 진실이 규명될 기회가 왔을 때도 조갑제 기자가 갑자기 탈북자들의 증언은 신뢰할 수 없다는 내용의 기사를 내놓아 5.18 사기꾼들에게 힘을 실어 주고 탈북자들의 증언이 오래동안 묻히게 하였다. 오마이뉴스 등 좌파 언론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조 기자의 기사를 인용하며 인민재판식 여론몰이를 하였고, 그 틈을 타서 광주단체들이 상경하여 몇몇 언론사를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였고, 프로그램 담당자들이 중징계를 당할 만큼 5.18의 진실을 말할 자유는 억압되었다. 그러나 최근 비밀해제된 CIA 문건은 탈북자들의 5.18 증언이 사실이요, 아주 정확함을 확증해 준다.
광주에서의 5월 18일의 불과 수백명의 시위는 서울에서 5월 15일에 있었던 대규모 시위에 비하여 아주 사소한 시위라 남한에서는 전혀 뉴스거리가 되지 못했다. 21일 오후에 장갑차와 군용트럭을 몰고 갑자기 등장한 괴무장단체가 전남도청을 점령하니 그 다음날에야 비로소 광주사태라는 명칭이 생기고, 광주사태가 일어난 사실을 국민이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저 멀리 북한에서 김일성은 언제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 "KN Intentions/Perception in Connection with Kwangju Incident"(광주사태 관련 북한의 의도/인식) 제하의 위의 비밀해제된 CIA 문건은 5월 19일의 평양 주석궁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한다:
이어지는 다음 페이지에서의 CIA 보고 내용의 핵심은 이 첫 두 문장이다:
위 문장에서 "The KN leaders"(북한 수뇌부)는 김일성과 그의 군사 고문들(Kim Il-Song and his advisers)을 지칭한다. 김일성과 김대중이 똑같이 전민봉기(nationwide popular revolt; 전국적 민중봉기)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김일성은 남한에서 전민봉기가 일어나면 남한 사회주의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남침하겠다고 했고, 김대중은 전민봉기를 일으켜 선거 없이 스스로 대통령이 되려 하였다. 탈북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증언하는 것이 북한에서는 광주사태가 전민봉기로 확산되면 즉각 남침하려 하였다는 것이요, 광주사태 당시의 북한 동향은 탈북자들이 아는 것이지 조갑제 기자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조갑제 기자는 5.18 사기꾼들이 지어낸 유언비어는 신뢰하기 어렵다는 말은 안하면서 탈북자들 전체를 도매급으로 사기꾼 취급하며 그분들의 5.18 증언을 탄압하는가?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한 사건에 두 명의 증언이 있으면 그 증언을 사실로서 인정되었다. 그런데 '광주인민봉기' 당시 북한에서 전개된 상황에 대해서는 수만 명의 탈북자들의 증언이 모두 일치한다.
김일성이 5월 19일 남침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주석궁에 군 수뇌부들을 불러들여 비밀회의를 한 이유의 단서가 되는인물들 중 하나가 전남 가톨릭농민회 회장 서경원이다. 김일성은 서경원이 광주사태 때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1989년 그를 평양 주석궁으로 불러들여 미화 6만 달러를 현찰로 주며 다음 공작 지시를 했었다.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고, 5월 19일이 가톨릭농민회가 전남 가농대회라는 위장 대회 명칭으로 당국을 속이고 오후 2시에 광주 북동성당에 총집결하였다가 예비군 무기고를 접수하며 무장반란을 일으키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날이었다. 무장반란 거사일에 가짜 농민들이 많이 동원되도록 사전 조직되어 있었으며, 박관현은 전남대 농대 학생 3백명을 가톨릭농민회가 주최하는 무력시위에 지원해 주기로 가톨릭농민회측에 약속해 주었으며, 그 가짜 농민 시위대 조직책이 당시 농대 3학년 학생 김양래였다. 가톨릭농민회는 단독으로 그 어마어마한 무장반란을 기획한 것이 아니라 그 배후가 북한세력이었다. 농민 운동권으로 구성된 가톨릭농민회가 형식적으로는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의 지도를 받고 있었지만, 당시 독일을 자주 왕래했던 정구사 신부들은 1980년대에 김일성 공작금이 독일에 아지트를 둔 간첩단을 거쳐 서경원에게 전달되게 하는 한 통로였다.
이제 우리는 5월 19일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객관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위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제하의 삐라는 북한에 인민군 지원을 요청한 후 아세아자동차에서 생산되는 군용차량 정보 및 전라도 군 무기고 위치 정보 등을 북한에 보고한 자생간첩단 '남조선 민족해방전선'이 5월 19일에 제작하여 20일에 뿌린 유혈 무장폭동 선동문이다. 이 성명서에서 학생 혁명군은 이미 광주에 들어와 있었던 북한군의 위장명칭이고, '범시민민주투쟁위원회'는 '남조선 민족해방전선'의 위장명칭이다. 이 성명서 전문은 이러하다:
5.18 사기꾼들측에서는 아직 이 성명서에 대하여 아무런 해설을 하지 않고 있으므로 우리가 해설해 보자. 상황 보고 1차 대상은 김일성이었는가 아니면 광주시민들이었는가? 광주시민들 중에는 학생혁명위원회가 없었으니 광주시민들은 그런 보고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사망자 500 명은 거짓말이다. 무장폭도들이 등장하기 전에는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다. 가짜 학생들이었던 무장폭도들, 즉 학생 혁명군이란 우장명칭으로 활동하던 북한군이 이미 5월 19일 상무대에서 무기 탈취에 성공한 사실은 힌츠페터의 5월 20일자 영상으로도 확인된다. (가짜 학생들이 상무대에서 탈취한 무기류 중에는 M16 유탄발사기도 있었으며, 윤상원 5월 27일 새벽 박남선의 M16 유탄발사기 오발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광주는 10대 후반 혹은 20대 초반이 어린 학생들이 어른들에게 "무기를 제작하라! (다이너마이트, 화염병, 사제폭탄, 불화살, 불깡통, 각종 기름 준비) 전시민 관공서를 불태워라! 차량을 획득하라! 특공대를 조직 군무기를 탈취하라!"고 지령을 내리는 도시인가? 아니면 이 지령은 김일성이 간첩단을 시켜 내린 것인가? 광주무장폭동이 민주화운동이냐 아니냐는 5.18 사기꾼들이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다분히 달려있다.
힌츠페터가 찍은 영상은 김사복의 한민통 조직을 통해 제일 먼저 김일성에게 보내졌으며, 광주사태 당시 북한에서는 전 방송매체가 광주인민봉기를 실황중계하였다. 그때의 북한 상황에 대한 탈북자들의 증언은 '역사로서의 5.18'에 많이 수록되어 있고, 아래는 일부만 간간이 발췌한 것인데, 5월 19일의 평양 상황을 보고한 위의 CIA 문건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될 것이다.
북한에서 광주인민봉기에 나갔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80년도 당시 성인이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거의나 다 알 것이다. 처음에는 누구도 그런 사실에 대해서 잘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씩 사실이 알려지고 영웅들이 많이 생기면서 사회에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다 알게 되었다. 광주인민봉기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김대중과 짜고 만든 통일 작품이다. 우리는 확실하게 그렇다고 믿는다. 북한에서 김대중은 혁명가다 (p. 35).
1981년 초부터 북한 군인들과 사회간부들의 입에서 광주인민봉기에 북한의 특수부대사람들이 참가했었다는 구체적인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내용은 북한 전역으로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p. 47).
용감무쌍한 우리의 영웅적 인민군대가 목숨으로 지켜주는 사회주의 조국에서 사는 행복과 자부심이 저절로 넘쳐나게 해주는 소설과도 같은 5.18광주사건의 이야기였다. 광주사태에 대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구수하게 전해졌으며 마치 자기들이 갔다 온 것처럼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들뜨게 만들었다. 공공장소나 모임장소에서 사람들은 희열에 넘쳐 광주사태의 이야기를 화제 거리로 주고받았다 (p. 48).
더하고 뺄 필요도 없이 5.18광주사건은 북한정권과 군부에 의해서 계획되고 설계된 대남작전의 한 부분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지고 조작된 대표적인 사건이다 (p. 52).
광주사건! 그거다 우리군대가 했어요. 장갑차 뺏어 몰고 총 쏘는 것과 같은 기술적인 문제는 전문훈련 받은 우리사람들이 한 것이 맞아요. 평범한 시민들이 뭘 할 줄 알겠어요? 우리 쪽의 사람들이 개입되지 않고서는 판이 그렇게 커질 수가 없지요” 어디에 가든 광주사건이라는 말만 나오게 되면 저마다 입을 열고 말 나가는 대로 너도 나도 한마디씩 하는 정도였다 (p. 54).
특히 1980년 5월초에 들어서면서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광주를 비롯해서 전국적인 규모에서 시작된 청년학생들의 반정부시위는 북한정권의 대남작전에 활력을 주고 기지개를 펼 수 있게 하는 큰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조 편성 발표가 끝나고 사복차림의 지휘관은 타격대장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조는 즉시 잠수함에 승선할 것을 지시했고...평상시 적진에 대한 침투훈련을 할 때마다 잠수함을 이용한 작전훈련을 많이 했던 차라 그들은 일상적인 훈련의 반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태운 잠수함은 바다 밑으로 깊숙이 잠수하여 마양도 해군기지를 출발하였다. 잠수함의 항해 방향과 도착지가 어딘지, 목적지에 도착해서 훈련내용은 어떤 것인지 그들은 전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잠수함을 타고 바다 밑으로 들어 온지 3일째 되던 날 안내요원이 나타나서 지금 잠수함의 위치가 남조선 전라도 쪽의 해상이라고 전달해 주었다 (p. 68).
다른 때와 같은 가상적인 훈련이 아니라 이번만은 실제적인 상황이라는 현실이 배안에 타고 있던 11명의 전투요원들을 긴장시켰다 (p. 69).
11명의 침투요원들은 잠수함에서 내리기 전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목숨을 바치며 적들의 손에 잡히면 무조건 자폭을 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였다고 한다. 잠수함에서 하선하여 남쪽의 안내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남조선의 전라도지역인 목포라는 해안가 도시의 작은 상점가계 안방이었다. 침투인원들은 그곳에서 7명의 현지 북한요원들(그들 일곱 사람은 이미 전에 북한에서 파견되어 내려온 공작조)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서 앞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계획하고 있는 작전내용과 이를 위한 사전준비 작업이 무엇인지에 대한 임무사항을 전달받았다.
그들이 당시 임무내용을 전달받으면서 한순간에 파악했던 것은 조만간 남조선에서 4.19인민봉기를 능가하는 전국적인 대규모의 인민항쟁이 무장폭동의 성격으로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며 자신들이 목포지역으로 급파된 것도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목포에서 만난 7명의 북한요원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에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던 대학생들의 반정부폭동을 배후조종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람들이었고 북한은 부산, 마산 폭동을 5.18광주사태와 마찬가지로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부산, 마산사태가 전국적인 인민봉기로 확산되지 못하고 조기에 진압된 것은 폭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와 확대될 수 있는 명분이 취약했으며 부마사태의 정당성에 대한 지역 민심의 합법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 주요한 실패의 원인이라고 했다. (....)
그들이 남조선전라도 지역에 침투하여 처음으로 착수한 일은 무장폭동을 준비하는데서 관건인 무기를 확보하기위한 사업이었다. 북한의 계획대로라면 원래 광주폭동이 정상적으로 시작되어야 하는 날자는 1980년 3월경이었다고 한다. 북한이 봉기시기를 농번기가 시작되기 전인 3월로 택한 것은 폭동이 일어나서 전국적인 항쟁으로 신속하게 번지려면 농사철과 같은 불필요한 계절요소들의 제한적인 방해를 피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미리 침투해 있던 7명의 인원들과 합류한 안창식을 비롯한 11명의 인원들은 여러 개의 소조로 분산되어 전라도 현지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조직들이 사전에 확보해놓은 무기고들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한편 새로운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3개월여 동안 전라도 전 지역에 대한 정찰을 이 잡듯이 샅샅이 진행하였다고 한다. 1980년 2월말을 넘기면서 폭동이 전개되면 임의의 시기에 무기탈취가 원만히 진행될 수 있도록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무기고들에 대한 사전파악과 요해사업이 성과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1980년 3월로 계획되어있던 광주폭동이 5월로 늦어진 것은 1980년 4월말에 일어났던 강원도의 사북탄광사태와의 밀접한 연관 때문이었다. 사북탄광에서의 폭동조짐을 첩보망을 통해서 사전부터 구체적으로 감지하고 있던 북한은 3월로 예정되었던 광주폭동을 4월말로 연기하라는 지령을 내려 보냈고 득보다 실이 많은 산발적인 소요보다는 전국각지에서 일시에 동시다발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전국규모의 항쟁이 성격으로 보나 위력으로 보나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계산하였다.
목포에 침투하였던 11명의 요원들이 사북탄광사태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일은 없었다고 했지만 그들의 말로는 그곳에도 북한의 계획적인 지령을 받고 파견된 별도의 특수부대요원들이 잠입하여 사북사태가 강원도지역 전반으로 확산되도록 배후를 은밀히 조종하였다고 증언하였다. 1980년 5.18을 전후로 하여 북한이 남조선에서의 전 인민적인 항쟁을 위해 얼마나 치밀하고 계획적인 작전을 세웠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단편적인 내용의 한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북한쪽의 입장에서 사북탄광사태는 치명적인 실패작이었고 그것이 무산됨으로써 광주폭동은 부득이하게 5월 중순을 넘기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놀랄만한 것은 목포를 중심으로 광주폭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5개월 여 동안 목포,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숨은 지하조직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침투 조 인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그들의 조직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같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질적으로 째어있는 북한의 당 조직과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체계적인 조직구성과 집단화된 규율을 가지고 있었고 정신적인 무장상태나 각오정도에서도 북한의 조선노동당원들의 수준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지휘부 형태로 사용하는 공간에도 김일성의 초상화는 물론 김정일의 초상화까지 걸려 있었고 김일성 선집이라든가 김정일의 주체철학 등 북한에서나 볼 수 있는 사회주의 내용의 북한용 정치서적들이 대거 비치되어 있어 마치 북한 땅에 있는 어느 박사의 사무실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pp. 69-72).
당사자들한테서 직접들은 이야기지만 북한은 5·18사건을 배후에서 계획하면서 철저하게 두 가지 목적을 노렸다고 한다. 하나는 남조선사회를 북한체제가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전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라도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직하고 충실한 친북정권 수립이었다. 내가 북한에서 이런 내용들을 들을 때는 신기할 정도로 희한했었지만 지금 남한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위험하고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인민항쟁이 일어나서 공권력이 흔들리게 되면 인민군대의 남침도발도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 당시의 정세였다고 하니 소름이 끼칠 만도 한 일이었다. 잔인하고 피비린내가 났던 5·18광주폭동에 대한 계획은 이런 북한의 끈질긴 도발과 조작의 어두운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준비상태가 마무리되어 갔다.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북한 특수부대 요원들과 부마사태에 참가했던 7명의 요원들이 합류된 18명의 소부대는 광주사태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북한과 수시로 교신하면서 광주작전과 관련된 필요한 지시들을 지령 받고 집행하였다. 광주폭동이 진압군의 작전으로 종료될 때까지 두 명의 인원은 고정적으로 목포아지트에 대기하면서 광주시내에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신속하게 지휘부에 보고했다 (pp. 73-74).
소부대작전에서 특이한 것은 죽은 시체도 적에게 내어주지 않는 엄격한 원칙이고 어느 조와 개인을 떠나서 각기 자기 분야에 특수하게 부여된 임무에만 충실 하고 작전내용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비밀을 사수하는 것이 기본적인 룰이고 성질이라는 것이었다 (p. 74).
전라도 광주지역 근처에 있는 감옥소(남조선의 교도소)에 죄 없이 감금되어 있는 혁명적인 투사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에 안창식의 일행들도 참가했었고 그중 한명이 심한 중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 총탄이 복부중심을 관통하는 중상을 입은 그 사람은 과다출혈로 치명상이었다고 했다 (p. 76).
안창식(나의 내연남)은 지체하지 않고 즉시 대원 세 명에게 여자를 추격해서 그를 조용히 처리하고 시신을 소각하되 사진기는 무조건 회수해 올을 명령했다. 분명히 다른 냄새를 맡고 따라다니는 남조선정보기관의 끄나풀이 아니면 정체를 숨기고 광주 시내를 뒤지면서 색다른 냄새를 맡고 있는 어느 특수기관의 스파이라고 짐작되었다. 그 여자는 북한요원들에 의해서 광주시내 모처로 납치되어갔고 저항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잔인하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p. 78).
안창식은 교전 중에 무릎 바로 아래에 관통상을 입고 광주폭동이 끝나기 2~3일 전쯤 목포의 아지트로 이동해서 치료를 받다가 14명의 대원들과 함께 그해 7월 중순경에 강원도 동해안으로 이동하였고 북한에서 내려온 잠수함을 타고 철수하였다고 한다. 초기에 임무를 받고 타격대에서 파견되었던 안창식을 포함한 10명의 요원들 중에서 한 명이 숨지고 안창식과 함께 4명이 부상을 당했으며(부상자중 1명은 북한으로 돌아가서 치료받다가 1년 뒤에 사망) 부산, 마산폭동에 참가하기위해서 먼저 남파되었다가 그들과 합류한 7명의 일행 중 3명은 행불이 되어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pp. 79-80).
김일성이 살아 생전에 남조선의 광주사태를 기념하기 위하여 같은 날짜인 5월 18일에 어느 공장을 현지지도하면서 북한의 철도부문에서 '5·18무사고정시견인운동'이 나왔고 1만 톤 대형프레스의 이름에 '5·18 청년호', 제철소의 이름에 '5·18청년제철소', 학생들이 파철을 모아 군수공장으로 보내서 만든 탱크 이름에 '5·18전진호'라고 이름을 붙이는 등 북한은 전 당과 전 국가, 전 국민적으로 5·18의 정당성과 계승성을 광범위하게 선전하고 대중사회에 의식화하였다. 이처럼 북한의 대남전략은 체제의 합법적인 차원에서 계획적으로 조직되고 한국사회에 다량의 친북좌파 세력들을 양성해 낼 정도로 그 범위가 질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p. 83).
(80:1의 패싸움과정) 누가 도끼를 던졌는지 “평양사람” (주: 5.18공화국영웅)이 주저앉아서 피범벅이 된 종아리를 두 손으로 조이고 있었고 그의 발치에는 도끼가 떨어져 있었다. 이때 3소대장이 달려들면서 숙이고 있던 그의 머리를 발로 내리 밟았다. 순간 “평양사람”의 입에서 괴성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그의 주먹이 3소대장의 턱 아래 목젖 부위에 강하게 들어가 박혔다. 부질없이 달려들어서 발길질 하던 3소대장은 끽 소리 한마디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목뼈가 부러져서 단번에 즉사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평양사자”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게 이성을 잃어버렸고 성난 한 마리의 사자를 방불케 할 정도로 사정없이 날뛰었다. 그의 발과 주먹은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게 번개처럼 움직였고 그의 손발을 거쳐 간 사람들은 사방으로 나가떨어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20분도 채 되지 않아서 30명이 넘게 쓰러지자(주: 이들은 다 죽었음) 다급해진 대대장이 “더 달려들지 말고 피하라”고 다급히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성난 “평양의 사자”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의 시작과는 대조적으로 상상도 할 수 없게 순식간에 싸움판의 상황이 반전된 것이었다. 겁을 먹은 군인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자 “평양사람”은 소외양간 쪽으로 피해 달아나는 대대장에게 달려가서 그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대원들이 쓰러져 있는 마당 한가운데로 잡아다가 꿇어 앉혔다. (이후 잠시 방심한 공화국영웅은 뒤로부터 도끼 공격을 당해 죽었음) (pp. 114-115).
선글라스여성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당중앙위원회의 위임을 직접 받고 내려온 사람이야. 네놈들이 어제 도끼로 죽인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어? 여기 있는 너희들 여단전체를 주고도 바꾸지 못할 사람이었어. 그 사람은 수 십 번을 적후에 드나들면서도 머리털 한 오리 다치지 않던 사람이야. 남조선의 광주에서 적들과 힘들게 싸우면서도 조국이 준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돌아온 영웅이란 말이야 이놈들아. 네놈들이 저지를 죄가 얼마나 크고 그 후과가 막대한지 너희부모들과 친척들이 평생 살 동안 고통을 느끼면서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당중앙위원회의 위임에 의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모조리 처단한다”
모두가 설마 했었는데 그는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잠시의 여유도 두지 않고 단박에 권총을 꺼내 들더니 맨 우측에 차례로 서있는 대대장과 중대장을 향해서 분노를 폭발하듯 공격적으로 탄창하나를 다 발사하였다. 대대장과 중대장이 벌집이 돼서 그 자리에 쓰러지자 무장한 보위소대원들 20명이 나서서 나머지 열 명에게 귀가 멍하게 총탄세례를 퍼부어 댔다 (pp. 122-123).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가 위쪽에 안장되어 있었고 바로 그 아래쪽에 아들인 “평양사자”의 묘가 일반사람들의 묘지와는 완전히 구별되게 웅장하게 꾸며져 있었다. 어머님의 말에 의하면 “평양사자”의 장례식은 원래 평양으로 옮겨져서 치를 예정이었는데 어머니가 고향땅에 묻히게 해달라고 간절히 요구하는 바람에 날자가 늦어져서 결국은 5일장으로 치러지게 됐고 중앙당에서 간부들이 직접 내려와서 엄숙하게 치렀다고 했다. 시멘트 콘크리트로 포장한 묘지의 높이는 1.5미터가 넘어보였고 묘지의 앞에 서있는 비석에는 중앙당에서 직접 새긴 문구가 적혀 있었다. “공화국 2중 영웅 고 장중한 동지는 1980년 5월 18일, 남조선의 광주인민항쟁을 비롯해서 살아생전 당과 수령,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싸우다가 애석하게 전사하였다. 조국을 위해서 젊음을 바친 고 장중한 동지의 투철하고 고귀한 혁명업적은 조국의 미래와 더불어 후손만대에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애석하게 전사한 장중한 동지에게 영광이 있으라!” (pp. 128-129)
자서전의 내용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것은 그가 남조선에 내려와서 대남공작을 시작하면서 진행한 일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그의 아버지 친척들의 이름을 비롯해서 자기가 공작한 대상들의 이름이 개별적으로 적혀 있었고 특히 지금까지 내 머리 속에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종교와 관련된 사람들의 명단 속에 있던 죽은 문익환 목사의 이름이었다. 1989년인가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문해서 김일성을 만났을 때 나는 '평양사자'의 자서전에서 보았던 문익환 목사의 이름이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던 기억이 있다. 어렴풋이 생각되는 내용이지만 '평양사자'가 남파되어 문익환을 만나서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하자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생의 마감까지 수령님께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하였다. 특히 1980년 5월 달에 있은 남조선의 광주인민항쟁 전후 배경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런 식의 내용으로 적혀 있었다 (pp. 131-132).
다른 탈북자들에게 질문을 던져 봐도 하나같이 나처럼 대답할 것이라고 믿지만 1980년 5월 18일 광주사건 때에 북한군특수부대 요원들이 내려갔었다는 이야기는 북한사회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국에 온 탈북자들뿐만이 아니라 지금 바로 북한에 가서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어느 누구라도 세워놓고 광주사태에 대해서 들어보거나 아는 내용이 있는 가고 물어보면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바로 이런 대답이 분명히 나올 것이다. “그때 우리 쪽에서 많이 내려가서 싸우고 왔다는 것은 비밀이 아닌데요.” “우리나라 특수부대 사람들이 참가하지 않았으면 며칠 동안 광주가 해방될 수도 없었고 남조선사람들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지요” “전라남도 광주인민봉기는 조선의 특수부대가 애국투사인 김대중 선생님을 도와주기위해서 내려가서 싸운 것으로 알고 있어요.” “1968년도에 박정희를 죽이러 남조선에 갔다가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있고 1980년도에 광주인민봉기에 내려가서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조선에 있어요. 내 눈으로 직접 봤는데요” (pp. 154-155).
이 시기에 북한은 인민군대와 민간교도대, 노동적위대와 심지어 중·고등학생들의 비 군사조직인 붉은청년근위대를 비롯해서 전 국민에게 준전시체제에 돌입하고 전쟁준비태세를 갖추도록 명령하였다 (p. 155).
남한에 와서 확인해본데 의하면 이런 사실까지는 파악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북한인민군 주력전투부대의 해당부서와 단위들은 광주사건이 터지기 며칠 전부터 상급지휘부대로부터 광주라는 정확한 지역까지는 통보를 받지 못했지만 남조선에서 조만간 대규모의 사건이 터진다는 구체적인 지시를 하달 받고 전투준비상태에 만반을 기하고 있었다. 우리부대에서도 미그19~21전투기들에 대한 특별정비는 물론 훈련반경을 일상적인 훈련지역보다 남쪽방향으로 더 내려간 군사분계선 상공으로 확대했고 4대로 편성된 전투기 편대가 주야로 항상 관할지역에 대한 비행전투근무를 감당하게 조치했다. 격납고 안에서 대기상태에 있는 전투기들도 명령이 떨어지면 신속히 출격하여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완전무장상태로 전투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부대지휘관들과 전투기 조종사들, 정비사들과 민간노무자들까지도 집에서의 출퇴근이 금지되고 신발 끈을 묶은 상태로 병영 안에서 생활하며 지휘부로부터 출격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라고 있었다.
상급지휘부에서 내려온 기밀문서에 대한 내용은 해당 중요부서의 고급지휘관들 외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대대지휘부 군관들과 중대, 소대급 지휘관들은 물론 심지어 전투기를 직접 조종하는 비행사들도 긴장하게 돌아가는 부대상황과 분위기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기고 있다는 정도로만 눈치 채고 있었지 남조선에서 금방 터질 대형사건과 관련되는 전군적인 진투준비상태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p. 156).
남조선의 혁명적인 인민들과 애국적인 청년들에 의해서 탄광과 광산 및 그 밖의 대도시들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반정부투쟁은 우리의 공화국인민들과 그들의 통일열기가 얼마나 뜨겁고 최고의 시기에 도달하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바야흐로 위대한 통일국면은 우리의 눈앞에 현실적으로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조만간 남조선 전역에서 들고 일어날 영웅적인 남조선 인민들의 대규모의 혁명적 항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은...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은 전투명령을 하달한다.
1980년 5월 18일 남조선의 광주에서 무장폭동이 전개되기 바로 하루 전인가 이틀 전에 그 책에는 광주라고 정확히 대상은 지명하지 않았지만 남조선의 전라도 지역에서 대규모의 반정부 인민항쟁이 일어난다는 내용과 함께 전당, 전국, 전민이 여기에 동참할 수 있는 만단의 태세를 갖추며 공장 기업소들은 생산라인을 군사지휘체계로 긴장하게 운영할 데 대해서 지시하였다. (....) 바로 이틀 뒤인 5월 19일 아침 노동신문을 비롯한 각종 신문에는 드디어 남조선에서 우리 공화국 북반부 인민들이 학수고대하던 전 인민적인 무장 항쟁이 일어났다고 대서특필하였다. 텔레비전에서는 광주의 무장폭동 첫 시작부터 얼굴을 가린 광주의 계엄군들이 부녀자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장면들을 반복해가면서 집중적으로 내보내었고 광주무장폭동이 남조선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며 지금이 바로 통일의 대 사변을 맞을 수 있는 기회라고 폭동 전 기간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열변을 토했다 (p. 207).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던 것은 임신을 하여 만삭인 여인의 배를 총창으로 갈라서 태아를 꺼내는 모습과 벌거벗은 젊은 처녀의 팔을 도끼로 자르고 어떤 새파란 아가씨의 옷을 홀딱 벗기고 젖가슴을 도려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이런 끔찍한 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우리는 저도 모르게 한 목소리로, “국제적인 식인종인 미국 놈들의 식민지로 있는 남조선 괴뢰도당들은 정말 인간의 가죽을 쓴 짐승들이나 다름이 없다. 아무리 지독한 살인백정이라고 해도 어떻게 백주 대낮에 여자들만 골라서 발가벗기고 도끼로 내리쳐서 죽이며, 살겠다고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처녀의 젖가슴까지 도려낼 수 있단 말인가” 라고 규탄하면서 남조선괴뢰군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p. 208)
김일성과 김정일, 그 앞잡이들이 민족 앞에 또 하나의 역사적 비극을 만들었음이 분명한 일이었다. 광주사건은 김일성이가 남조선에서 일어나는 평화적인 시위를 이용해서 친북좌파세력들과 짜고 인민군 특수부대들을 내려 보내서 만들어낸 사건이다.
당중앙위원회에서 간부들에게 보내는 지침서에서도 광주무장폭동에 참가한 동지들은 조국통일을 위하여 크게 헌신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공화국 영웅칭호를 수여하는 것은 당에서 응당 해야 할 일이고 영웅 전사들의 모범을 따라 배우기 위한 운동을 강력히 전개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1만 톤 프레스와 같은 이름 있는 대형기계에 까지도 5.18광주무장폭동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5.18청년호 라는 명칭을 달아주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희비극을 만들어 냈다 (p. 209).
김일성은 광주폭동이 성공해서 전국적인 인민항쟁으로 퍼져나갔다면 남조선괴뢰정권은 무너지고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혁명정권이 남조선에 수립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 큰 실수라고 말한 적이 있다 (p. 209). 김정일도 자기의 생일날인 1981년 2월 16일 광주인민봉기는 수령님께 바치는 나의 생일 선물이었는데 우리의 역량이 너무 적어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수령님을 볼 면목이 없다고 일군들 앞에서 말했다 (p. 210).
조직부지도원은 광주사건 당시 북한 해주시에 있는 대남연락소에서 근무하였으며 광주인민항쟁에는 소수의 대남연락소 관계자들만이 나가서 행동한 것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또한 그 목적이 광주라는 일방적인 지역을 노렸던 제한적인 작전이 아니라 남조선 정권 전복이라는 큰 그림이었던 것만큼 특수부대에서 잘 훈련된 사람들이 대거 투입되어 사건을 주도했다고 이야기 하였다.
북한 제3군단 승용차 관리소 정치부소장(남포시 연락소 초급당비서의 조카)은 동료와의 발언에서 광주사건에 개성시 연락소도 개입하였는데, 남조선 전역에서 인민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광주가 봉쇄되고 아군과 시민들의 대량적인 희생만 만들었을 뿐 최종적으로 실패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고 토로하였다.
북한 대남부서(북한중앙당 통일전선부)는 광주를 해방구로 만들어서 적후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전략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북한의 전면개입을 은폐하여 광주 사건을 남한 자체 내의 갈등과 모순에 의한 내란으로 철저하게 위장하기 위해서 광주사건 참가자 중에서 극비의 인원들을 선발하여 교묘하게 교란작전을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p. 216).
북한은 북한에 구축해 놓은 강력한 특수전부대들을 비밀리에 침투시켜서 남조선의 배후를 교란하는 한편 남한 인민들을 끌어당기기 위한 새로운 선전 시나리오를 만드는 것을 잊지 않았다.
북한은 그와 같은 대남전략 단계에서 만들어진 광주사태의 비극을 현장에서 별도로 촬영하여 실지 남조선 계엄군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건이라고 속여서 북한의 텔레비전에서 매일과 같이 보도하였다.
북한정권은 북한인민군과 인민들을 기만(남조선에 와서 북한에서 말하던 것과는 사실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하기 위해서 전두환이 공수특전단에 환각제를 먹이고 광주봉기진압에 내몰았다고 선전하였다. 또한 국군이 선량한 봉기자들, 그것도 여자들만 골라서 배를 가르고 젖가슴을 도려내고 다리 난간에 처녀들을 나체로 매달아서 죽이는 장면을 집중적으로 내보내면서 북한인민들에게 남조선에 대한 적대감을 고취시켰다. 지금도 나는 어린 나이에 보았던 무시무시한 장면들이 환영처럼 떠오른다. 텔레비전에서는 중무장을 한 진압군들에게 병에 담긴 알지 못한 물약을 나눠주고 그것을 마신 진압군들이 미친 듯이 봉기 자들에게 달려드는 모습과 약물에 마취된 군인들의 얼굴을 확대하여 짐승처럼 보이게 하는 등, 등골이 오싹하고 소름끼치는 장면을 보았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p. 218).
북한에서 파견된 공작원들이 "광주 시내가 해방되기 전까지는 뒤에서 조종을 하면서 광주시민들을 거리로 불러내는 작전을 수행하였고 광주가 해방된 다음부터 복면을 하고 주동적으로 개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직접 국군의 장갑차며 중무기들을 노획하여 봉기군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으며 무기와 각종장비들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시가전에 맞게 주요전투들을 조직하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광주의 일반적인 시위를 무장봉기로 확대하는데서 자신들이 빌미를 제공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절대로 가능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당사자 본인의 설명이었다는 것이다. 능력적으로 대학생들과 함께 시민들이 완전무장한 정규군과는 절대로 상대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희생을 무릅쓰고 항쟁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도 자기들이 국군복장을 하고 배후에서 시민군을 죽이고 시민군과 국군 사이를 철저하게 교란한 작전의 효과라는 것이었다 (p. 220).
대학교에서 볼펜을 들고 공부를 하거나 가사업에 종사하던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하던 사람들이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을 하고 아무나 쉽게 다룰 수 없는 장갑차까지 몰아가면서 정규군과 맞서 싸워서 광주시를 해방시켰다는 것은 삼척동자가보아도 베후에 강력한 배후 세력이나 주직이 개입하였다는 의혹을 충분히 가지게 하는 대목이다 (221).
평양에서 지시가 내려왔는데 광주 항쟁이 수일 안에 전국적인 무장 봉기로 확산될 것을 대비하여 서울에서도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으라는 지시였다. 그때 우리는 남조선정권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고 통일은 어떤 방법으로든 멀지 않았다는 쪽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p. 223).
당시만 해도 북한사회에서 김대중의 몸값은 ‘선생님’이라는 칭호와 함께 통일혁명당의 수괴였던 김종태, 차영도 등과 함께 조국통일과 남조선혁명을 위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영웅’으로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이 사실만 놓고 보아도 북한이 광주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5.18의 조작을 위하여 고민하고 공을 들였는가를 알 수 있다. 북한사회에서는 광주사태를 마지막까지 남조선통일과 연결시키지 못한 것을 두고 지금까지도 도처에서 후회하는 목소리가 많다 (p. 227).
북한에서는 광주인민봉기를 가지고 남조선의 애국적인 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이 괴뢰정권을 뒤집어 엎고 통일을 하려고 봉기를 일으켰으며 북한은 이런 사람들의 혁명적인 항쟁을 도우려고 특수부대 군인들을 파견하여 배후를 지원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40).
김대중이의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북한에서는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남조선의 ‘김대중 선생’이라고 하면 통일을 위해서 적후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투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p. 242).
외삼촌 아줌마는 1981년 일본에서 귀국할 때까지 남조선에 일본인 신분으로 세 번 정도를 직접 다녀왔으며 조총련과 연계하여 남조선의 지하조직들에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했다고 합니다. 외삼촌 아줌마가 남조선에 드나들면서 김대중이를 직접 만났다는 이야기는 제가 한번도 들은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조총련의 이름으로 위장되어 남조선 쪽으로 흘러들어간 자금의 대부분이 지하조직들의 운영자금과 함께 남조선에서 일어나는 각종 반정부운동의 배후를 지원하기 위한 자금으로 사용되었고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비밀사업들에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북한정권이 김대중을 믿고 있었다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p. 249-250).
5・18광주폭동 이전에 남조선의 지하조직들에 들어간 자금은 거의가 다 조총련에서 만들어져서 들어갔고 북한현지에서 직접적으로 남조선에 투입된 자금은 알지 못한다고 외삼촌 아줌마는 말했습니다. 외삼촌 아줌마는 1980년 5월 18일에 일어난 광주폭동에 직접 가담한 일은 없지만 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몇 달 전에도 남조선의 서울로 건너가서 폭동방법과 여러 가지 절차에 관한 북한쪽의 지령을 현지조직들에게 구체적으로 지시하였다고 했습니다 (p. 251).
"[위 CIA 문건대로 김일성이 주석궁에서 비상 군부회의를 소집하였을 무렵] 북한군 전 부대가 완전무장 상태로 비상대기에 들어간다는 명령이 군단참모부로부터 불시에 내려왔다."
남조선의 전라도 전 지역(남한에 와서 확안한데 의하면 당시 광주시내만 시민군에 의해서 점령되었다고 했다)이 시민군들에 의해서 장악되었고 조만간에 남조선의 전반지역으로 무장폭동이 확대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며 남조선 봉기군 측에서 북한에 무력지원을 요청하여 오면 인민군 각 부대들은 일시에 군사분계선을 뚫고 밀고 내려가서 최전선지역을 무력화 시키는 동시에 봉기군과 합세해서 남조선의 전 지역을 해방한다는 계획이었다. 정치부에서는 무기전투기술기재를 정비하면서 텔레비전에서 하루 종일 내보내는 남조선 광주의 소식을 시청하라고 지시하였다. 우리는 중대별로 병실에 모여 앉아 중앙텔레비전에서 내보내는 광주 시내의 전투장면들을 보면서 겉으로는 말을 못했지만 속으로 많아 놀랐었다 (p. 281).
창고장은 북한에서 1970년대 말에 극비밀리에 조직한 특수부대인 당원사단의 출신이었다. 그들 조는 1980년 3월 말경에 남조선으로 침투할 데에 대한 임무를 받고 한 달 정도의 가상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은 다음 1980년 4월 말경에 출발하여 남포항에서 구소련에서 들여온 디젤잠수함에 승선하였고 서울에서 가까운 서해안(어느 지역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았음)에 상륙하여 서울시내로 침투하였다. 그와 함께 남조선으로 파견되어 내려간 인원은 총 12명이었다. 그들이 남조선침투 훈련을 받으면서 가장 집중적으로 받은 훈련은 정신적인 훈련, 다시 말하면 자폭훈련이었다고 한다. 부득이한 경우로 적들에게 잡힐 상황이 조성되었거나 잡히면 신분을 노출시키지 말고 무조건 자폭해서 시체도 남기지 말라는 것이 첫 번째 임무사항이었다고 하였다. 그들의 작전지역은 서울이었고 김대중의 지휘로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중시위에 합류하여 배후 교란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남조선의 수도인 서울중심에서 국가교란사태를 조종하여 전국적인 인민항쟁으로 번질 수 있는 뇌관으로 되게 하는 것이 그들이 북한으로부터 받은 임무의 기본 핵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p. 298).
...5월 중순 북한 지휘부에서 전라도 광주로 급히 이동해서 작전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했었다. 본인들은 남조선의 서울에 있으면서도 전라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감 모르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북한에서 먼저 사태를 파악하고 임무를 바꾸라고 지시를 내려 보냈던 것이다. 창고장 일행이 서울을 떠나서 광주시내로 이동했을 때는 폭동이 시작 된지 이미 이틀정도가 지난 뒤였다고 하였다. 시내는 대학생들과 광주시민들의 폭동으로 마구잡이 판으로 변해 있었고 각처에서는 전두환을 타도하라는 크고 작은 프랑 카드들을 들고 데모꾼들이 무리지어 몰려다니는 것을 첫눈에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서울에서의 모습과는 정 반대로 광주에서는 정권에 분노한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사생결단으로 진압군에 저항하면서 국가기관을 습격하고 광주의 ‘해방군’으로 등장해 있었다고 하였다. 창고장의 일행은 광주인근지역에 있는 군수품공장을 습격해서 장갑차와 군용트럭들을 탈취할 때 북한에서 파견되어 나간 알 만한 사람들의 얼굴들을 적지 않게 보았으나 적후활동에서 지켜야 할 엄격한 준수사항이 있는 관계로 서로 침묵 속에 무언의 대화만 나누었다고 한다.
탈취한 장갑차는 시민군들이 기술부족으로 다룰 수 있는 수준이 안되기 때문에 북한에서 나간 특수부대 요원들의 몫이었고 군용트럭들도 일부는 북한요원들이 사용하면서 대부분은 시민군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기동성을 보장하게 하는 한편 항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p. 300).
창고장의 일행이 광주에서 빠져나오는 날 공수부대를 비롯한 계엄군은 탱크와 장갑자들을 앞세우고 무력으로 다시 광주 시내를 무차별적으로 점령하였고 북한특수부대요원들의 주동적인 노력에 의해서 전국적인 무장봉기로 확산될 뻔했던 광주사건은 아쉽게 실패했다고 한다.
창고장 일행은 백령도로 건너가서 며칠 동안 잠복해 있다가 북한 대남연락소 소속의 잠수정에 의해서 남조선을 빠져나갔다고 하였다 (p. 302).
삼복은 아직 멀었지만 날씨는 한여름처럼 더웠다. 하지만 날씨보다 더 뜨거운 것은 주민들의 마음이었다. 시내의 곳곳에 각양각색 선전포스터들이 나붙고 "전두환을 찢어 죽이라"는 시커먼 글자들이 주민들의 가슴을 불을 달았다. 유선방송과 TV수상기 앞에는 항시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수시로 아나운서가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라고 하며 광주의 실상을 동영상으로 내보내 시청자들의 마음을 부글부글 끓케 하였다 (pp. 308-309).
"폭동이 일어나면 정말 우리나라 특수부대들이 남조선에 나갈까요?"
"아따, 이 사람 좀 보게. 아직 영 깜깜이로군. 벌써 공작대가 나간 지가 언젠데 그런 소리를 하고 있소?"
"아 그래요? 그럼 그렇겠지. 근데 말이오. 혹시 남조선 놈들이 우리 군대가 나가면 침략자라고 할게 아니요."
"아하, 거 좀 한심한 소리 그만하오. 남조선이 뭐 외국이요? 우리가 우리 땅을 해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수령님의 교시를 좀 연구하고 다니라구요. 남조선 인민들이 언제든지 우리에게 지원을 요청할 수 있으니 그 때면 남으로 진격할 수 있게 준비하라고 한두 번 교시하신 것이 아니요."
그때부터 나는 광주시민들이 김일성의 남조선혁명 역량인줄로 알았다 (p. 313).
남한에서 만들어진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가 대한민국을 조롱하고 국방의 의무를 담당하는 신성한 국군을 정면에서 원수 취급하는 영화라면 북한의 영화 '님을 향한 교향시'는 친북세력들을 통해서 대한민국에서의 폭력혁명을 선동하고 부추긴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북한은 '님을 향한 교향시'에서 한국의 제도뿐만이 아니라 미국이 한반도에서 노리는 목적과 의도에 대해서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보라고 선동한다.
...남조선의 국민들이 남한정부에 대한 반정부투쟁과 함께 반미운동을 대대적으로 확산시켜야 한다고 부추기고 있다. 광주봉기가 실패한 원인도 올바른 혁명적 정당의 통일적이고 유일적인 지도를 받지 못한데 원인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남조선혁명의 단계를 두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는 남조선 내부에서 인민대중의 동력을 얻어 반파쇼 민주화투쟁을 강력히 전개하고 이것을 반미자주화운동과 결합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 둘째는 북한의 '혁명적인 민주역량'과의 연합전선으로 미국에 의한 남한의 통치를 끝장내고 '북한식 인민주의의 통일'을 성공시켜서 남조선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존재하는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의 것을 남조선 내부에서 단계적, 자체적 절차에 의해서 수행해야 할 기본적인 과제로 명시하고 있다. 물론 예술작품이라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통해 그럴듯하게 선전하고 있지만 실은 그 모두가 김일성의 '교시', 김정일의 '방침'들에 쓰여있는 그대로이다.
진실로 북한에게 필요한 것은 남한국민의 자유로운 민주화가 아니라 남한정부가 통제 불능의 무정부상태로 전락되고 북한군의 남침이 자연발생적으로 조성될 수 있는, 일명 공권력 부재 정국인 것이다. 북한에게 있어서 대남정책의 최우선 목표는 북한식 사회주의 통일이고 그 방법은 언제까지나 무력에 의해서 남조선 해방을 실현하는 것이다 (p. 319-320).
중앙당에서 내려온 지도검열부장은 광주인민봉기는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확실한 계획에 따라 김일성과 김정일이 대남연락소가 아닌 조선인민군 정찰국과 특수부대들을 비롯한 전투무력들을 직접 광주에 파견하여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을 도울 데 대해서 특별히 지시하고 진두지휘까지 했다고 하였다 (pp. 357-358).
광주인민봉기에는 그 사람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특수부대 전투원들이 참가했는데 그 사람들은 광주인민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남조선에 침투되어 들어가서 사전 준비 작업을 했었다고 했다. 광주에 참가했던 사람들마다 임무가 서로 달랐는데 그들이 광주에서 수행하여야 할 기본 임무는 남조선 인민들을 자극시켜서 봉기에 자각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특수 교란작전이었다고 하였다 (p. 361).
배후에서 조종하면서 전국적으로 광주인민항쟁의 여파가 퍼져나가게 만드는 것이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임무였지만 생각처럼 사건이 번지지 않자 북한에서는 현장에 파견된 특수부대 요원들에게 될수록 정체를 노출시키지 말고 주도적으로 폭동을 유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하였다. 북한으로부터 새로운 지시가 떨어지면서 특수작전요원들은 시민군들 속에 위장 침투하여 본격적인 살인, 파괴활동을 조작하면서 광주시민들을 자극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광주인민봉기에서 죽은 사람들 중에 실제로 진압군에게 맞아 죽은 사람은 얼마되지 않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요원들에 의해서 무참하게 죽었다고 공화국영웅의 말을 빌어서 친구는 말했다.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원들의 정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눈치를 채거나 이상한 기미를 보이기만 하면 그들은 두말없이 즉석에서 시체가 되어 처리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르지 않거나 그들의 요구에 불응해서 도망가면 그 사람들 역시도 절대로 살려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pp. 361-362).
5·18광주사태 당시에는 북한군 전 부대가 전쟁상태에 돌입해 있었고 우리부대도 진지에 나와서 전투식량으로 끼니를 떼우면서 신발도 못 벗고 대기상태에 있었다. 매일아침 2시간씩 진행하는 정치상학 시간에는 방어사령부에서 나온 정치소조원들이 남조선 광주에서 일어난 인민봉기는 남조선을 해방하기 위한 북한의 계획된 작전이며 많은 특수부대들이 침투해서 남조선 괴뢰군들을 제압하면서 광주시민들을 무장시켜 인민항쟁을 지원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광주폭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고 때를 맞추어 대규모 특수부대가 남조선으로 침투해서 전면전을 피하면서 배후 교란작전으로 주요 시설물들을 파괴하면 사회혼란이 조성되게 되고 이렇게 되면 남조선 해방은 거의 확정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때 평양에서부터 조직적으로 알려주던 말대로라면 남북통일은 아무리 길어야 몇 개 월정도 안팎이라고 할 수 있었다.
5.18광주사태가 끝난 지 30년이 다된 지금에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고 생생한 것은 매일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던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고 잔인하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특히 여자들을 살인하는 장면에 무게를 두고 반복적으로 방송해가면서 남조선괴뢰군들의 잔인성과 야만성은 짐승도 치를 떨 정도라고 저주를 퍼 붙던 방송원의 격앙된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p. 379).
5월 27일 새벽 국군에 의한 광주 무장폭도들의 무기 강제회수 작전이 성공하자 김일성이 "통일 기회를 놓쳤다!"고 한탄하였으며, 그 후에도 김일성은 이 명언을 되풀이하였다. 도대체 광주사태가 김일성과 무슨 관계가 있었기에 통일 기회를 놓쳤다고 한 것일까? 이호재(가명) 등 모든 탈북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그 이유를 이렇게 분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