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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싱어<동물의 도덕적 지위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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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MiŜatasVin
추천 : 1
조회수 : 190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2/02 19:52:13
피터싱어의 강연 중 2007년 5월16일 대구에서 했던 강연 'Animals and Ethics'의 번역본입니다.

< 동물은 왜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피터 싱어 (프린스턴대 교수)/박 상 혁 (계명대 교수) 옮김

오늘 내 강연의 주제는 우리가 동물을 다루는 방식의 윤리 문제이다. 서양 문명을 통해서 동물은 도덕적으로 전혀 중요성이 없거나 기껏해야 아주 사소한 중요성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은 보다 이성적인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즉 인간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경의 창세기에서도 인간은 동물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받은 것으로 그리고 오직 인간만이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고 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은 “황소들을 걱정하시는가?”라고 묻지만 사실 이 질문은 수사학적 질문에 불과한 것으로, 그의 대답은 명백히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 후 아우구수티누스나 아퀴나스같은 기독교 사상가들 역시 동물의 고통은 그 자체로는 동물들에게 해를 안 끼치거나, 동물에게 친절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이 동물에게 잔인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런 행동이 인간에 대한 잔인함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지 동물들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은 아니다.)

대부분의 서양철학자들은 이런 견해를 받아들였는데, 데카르트는 동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조차 부정했다. 칸트는 그러지는 않았지만 오직 이성적 존재만이 목적 그 자체이고 동물은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서양의 전통에 대해서 예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몽테뉴는 인간의 거만함에 의문을 제기했고, 흄은 사람이 동물에 정의를 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친절하게 동물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양의 주된 전통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는 벤담, 밀, 시즈위크 같은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들 각자는 동물의 고통이 그 자체로 문제가 된다고 강조했다.

벤담은 동물이 권리를 가진 것으로 인정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이런 고전적인 공리주의자들조차도 동물에 대한 그들의 언급을 자신들의 철학적 저작의 구석에 남겨 놓았을 뿐이다.

그들의 사고는 동물에 대해 지나치게 잔인한 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을 입법하는 데 영향을 미쳤지만,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동물들의 이해관계와 상충할 때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동물의 이해관계에 대해 우선한다는 가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동양의 전통은 달랐다. 힌두교와 불교에서 인간과 동물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우리가 동물로 환생할 수 있다는 힌두교의 관념은 우리를 동물들과 연관시키는데 이런 사고방식은 유대교, 기독교, 회교의 전통에서는 완전히 배제되는 사고방식이다.

모든 쾌고감수성(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동물에 대한 동정은 불교의 핵심교리이다. 인도 왕 아쇼카와 일본 토쿠가와 막부 시대에 “개쇼군”이란 별명으로 불렸던 쓰나요시는 동물을 보호하는 법을 만드는 데 있어서 동시대의 서양인들을 훨씬 앞서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에서 동물은 인간보다 열등한 것으로 생각된다. 동물로 태어나는 것은 명백히 부정적인 일이다.

그리고 불교에서 모든 쾌고감수성을 가진 동물에 대한 동정의 원칙은 동물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른 관행으로 발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동물에 대한 태도는 불교국가와 서양의 국가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

위의 논의를 배경으로 해서 나 자신의 생각을 소개하겠다. 30년도 전에 나는 “뉴욕책서평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우리는 흑인해방운동, 동성애자 해방운동,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종류들의 운동들을 잘 알고 있다. 여성해방운동이 일어났을 때 어떤 사람들은 이제 우리는 해방운동의 마지막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성차별은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자유주의자들조차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시행한 마지막 차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늘 “차별의 마지막 남아있는 형태”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조심해야 한다.

이 인용문 뒤에 따라 나오는 글에서 나는 인간과 동물사이의 명백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물 역시 인간처럼 고통받는 능력을 소유하며,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동물도 우리 인간처럼 이해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동물들이 인간종(human species)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동물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거나 평가절하 한다면, 이런 논리는 어떤 사람이 자신들이 속한 인종(race)이나 성(gender)에 속한다는 한 가지 사실 만으로, 그 사람이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든지 말든지, 우월한 도덕적 지위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의 논리에 가깝다.

비록 대부분의 인간들은 추론의 능력과 그 밖의 지적인 능력에 있어서 동물보다 탁월하지만, 그런 차이가 우리가 인간과 동물사이에 갈라놓은 선을 정당화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아기나 심한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어떤 동물들보다 지적으로 열등한 능력을 갖지만, 만일 어떤 사람이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회사가 생산한 상품이 안전한지를 검사하기 위해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가해 보자고 제안한다면 우리는 그런 제안을 한 사람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나 심한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작은 우리에 가두고 그들을 식용으로 쓰기 위해 죽이는 것을 도덕적으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동물들에게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은 현행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관행이 “종차별주의”라는 신호이다. 어떤 형태의 차별주의는 지배적인 집단에게 편하기 때문에 존속되는 편견인데 “종차별주의”의 경우에 주된 집단은 백인이나 남자가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다.

오늘날에는 거의 믿기 어려울 정도로 70년대 초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물을 다루는 것이 심각하게 고려할 만한 윤리적 문제를 제기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때에는 동물의 권리도 동물해방 기구도 없었다. 동물의 복지는 고양이나 개 같은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문제였고, 좀 더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쓸 것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늘날은 상황이 변했다. 사람들이 동물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문제들이 뉴스에 종종 나온다. 동물권리 단체들이 산업화된 모든 나라에서 활동 중이고 어떤 나라에서는 종요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적으로 활기찬 논쟁이 진행되어 왔다. (동물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가장 방대한 문헌 목록에 의하면, 서양역사에서는 역사 이후 1970년까지 단지 94종만의 문헌이 있었지만, 70년에서 88년까지는 240종 이상이나 출현했다. 지금은 그 수가 수 천종에 이를 것이다.

게다가 이런 논쟁이 단지 서구의 현상만은 아닌데, 동물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선구적인 저작들이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세계 주요어로 번역되었다.

그렇다면 이 분야에서 내가 30년 전에 처음으로 개진한 입장이 지난 30년간 나의 입장에 반대해서 제기된 다양한 비판과 논변에 대해서 얼마나 잘 견뎌 왔을까?

이 논쟁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질문을 구분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호모 사피엔스의 성원이라는 근거에 기초해 인간들에게 우월성을 부여하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생각인 종차별주의가 방어될 수 있는가?

둘째, 만일 종차별주의가 방어될 수 없다면 우리가 동물의 이해관계보다 인간의 이해관계에 더 중요한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인간의 다른 성질들이 있을까?

어떤 종에 속한다는 것이 어떤 존재를 다른 존재보다 도덕적으로 더 중요하게 대하는 이유라는 견해는 자주 가정되어 왔지만, 논변에 의해 옹호되는 일은 드물었다.

종차별주의를 옹호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사실상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우리가 인간의 이익에 좀 더 무게를 둘 권리를 주는 도덕적으로 적절한 차이들이 있다고 논변하면서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긍정적 답변을 하고 있다.

하지만 故 버나드 윌리엄스 (Bernard Williams)는 그의 생전에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이제 곧 출판될 “인간의 편견 Human Prejudice”이라는 논문에서 종차별주의를 옹호하고 있고, 윌리엄스의 논문에 대한 나의 응답 역시 “공격받는 싱어”라는 책에 수록될 것이다.

윌리엄스는 종차별주의에 대한 나의 비판에 맞서서 종차별주의를 옹호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유능한 철학자이게 때문에 나는 잠시 그의 논변을 논하고자 한다.

윌리엄스는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에 대한 여러 가지 가능한 견해들에 대한 논의로 그의 논변을 시작한다. 그는 우주가 문자 그대로 혹은 비유적으로 우리 주위를 공전한다는 종교적이고 인간중심적인 견해를 부정한다.

그에 따르면 이런 견해들의 문제는 우리가 우주적 관점에서 우리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관점”이 있다고 우리가 가정하는 것에 있다. 따라서 우리가 어느 정도의 중요성, 하지만 아마도 상대적으로 적은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은 사고의 혼동으로 부정된다.

대신에 윌리엄스는 “옛날 옛적에 우주의 한 구석에 별이 하나 있었고 그 별을 도는 행성이 있었고 그 행성에 지식을 개발한 어느 정도 영리한 생물들이 있었고 그리고 나서 세월이 지난 후에 그들은 죽었고 별도 폭발되어 없어졌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는 니체의 견해를 선호한다.

인간 존재가 혹은 더 나아가 이 지구상의 모든 쾌고감수성(sentient)을 가진 존재들이 어느 날 사라지게 될 지도 모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은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만일 지구상에 사는 쾌고감수성을 가진 존재들이 행복과 만족에 가득 차서 사는 것보다 구제되지 않는 고통 속에 살아야만 한다면 그런 우주는 그렇지 않은 상태보다 영원히 더 나쁠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에는 어떤 사고의 혼동도 없다.

이것이 우주의 상태에 대한 전체적인 판단에서 얼마만한 차이를 만들 것인지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것에, 즉 전체 우주에 존재하는 쾌고감수성을 지닌 존재들과 지구상에 발견되는 쾌고감수성을 가진 생명체들의 비율에 달려있다.

지구만이 우주에서 쾌고감수성을 가진 존재들이 존재해왔고 존재할 유일한 장소라는 것은 그다지 개연성이 없지만 그럴 경우에 우주가 잘 지내고 있는지 아닌지 하는 데 관한 우리의 판단은 지구상에 있는 쾌고감수성을 지닌 존재가 어떻게 지내는 지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하지만 지구가 수십억 개의 행성들 중 하나이고 그 각각의 행성에 수십억의 쾌고감수성을 지닌 존재들이 존재해왔고 존재하고 존재할 것이라면 지구에서 쾌고감수성을 지닌 존재가 얼마나 잘 지내는지 하는 것은 우주가 얼마나 잘 지내는지 하는 전체적인 판단에서 아주 작은 부분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주가 사실상 어떤 목적이나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유사 종교적 주장을 함축하지 않는다. 하지만 목적 있는 우주를 부인한다고 해서 우리 인간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의 유일한 의미는 인간의 존재가 우리 인간들에게만 중요하다는 결론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 인간의 생명은, 그리고 우리의 선호의 만족과 좌절이 객관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최소한 니체나 윌리엄스가 말한 것 중에 이런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관련된 모든 쾌고감수성을 지닌 존재들의 위치에 자신을 놓고 만일 자신이 그 모든 삶을 산다면 어떤 우주를 선호할지를 고려하는 불편부당한 관찰자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뿐이다.

우주적 관점이라는 생각에 반대하는 윌리엄스의 요점은 우리의 모든 가치가 필연적으로 “인간적 가치”라는 것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가치는 인간적 가치이다.

아직 우리가 자신들의 가치를 분석하고 반성하고 토론하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 모든 가치들은 인간적 가치이거나, 우리가 진화론적으로 인간 이전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행동의 경향으로부터 우리 인간에 의해 발전시켜온 가치들이다.

하지만 우리의 가치들이 이런 의미에서 인간적 가치라는 사실로부터, 우리의 인간 본성이 다른 존재들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성적 존재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가치를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의 가치가 인간적 가치라는 사실이 우리의 가치가 무엇일 수 있는지 혹은 무엇이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 별다른 제한을 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동물들의 고통과 즐거움과 생명들을 인간의 고통과 즐거움과 목숨들을 덜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윌리엄스는 우리의 가치가 인간적 가치이기 때문에 우리가 동물을 배려한다는 것이 방향을 잘 못 잡은 것이라고 논변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동물들을 어떻게 다루어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인간적이거나 인도주의 적인 태도의 일부이며 내가 말한 어떤 것도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에 윌리엄스의 논변은 인간이 다른 동물들에 우선한다는 편견을 가지는 것에 대해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초기의 글부터, 나는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종차별주의 사이의 유사점을 지적했다.

나는 이 각각의 경우에, 우세한 집단이 자신의 집단 외부에 있는 존재들을 자신의 집단의 이익이 되도록 다루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개발해왔다고 주장했다.

이 이데올로기는 이들 외부 존재들의 이익을 무시하거나 평가절하 한다. 간단히 말해 이 외부존재들의 이해관계는 내부 존재들의 이해관계만큼 중요하지 않다.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종차별주의 사이의 유비는 유용한데,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그 유비가 인간을 유일하게 중요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다른 존재들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우세한 집단으로 볼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유비는 단순한 생물학적 차이가 우리가 다른 존재들에 대해 얼마만큼의 고려를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차이를 정당화한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 유비에 대해서 윌리엄스는 종차별주의가 인종차별주의나 성차별주의와 다르고 도덕적으로 반대할 만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물론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종차별주의 사이의 유사성이 완전히 정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히 맞는 말이다.

윌리엄스는 왜 그런지 몇 가지 이유를 든다.

예를 들어 정상적인 인간과 캥거루사이의 차이는 다른 인종간의 차이와 남성과 여성의 차이보다 훨씬 크다.

하지만 “동물해방”의 초판에서 나 자신도 그렇게 말했다. “정상적인 성인의 탁월한 정신적 능력이 큰 차이를 만드는 영역이 있다: 기대, 보다 구체적인 기억,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보다 많은 지식 등등.

하지만 이런 종류의 논변은 종차별주의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만하다는 주장에 대한 성공적인 응답이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다른 종의 성원들이 우리 종의 성원들이 가지는 탁월한 정신 능력을 가지지 않고 있다하더라도, 나는 종차별주의를 이런 종들 간의 정신 능력의 차이에 기초한 차별이라고 정의하지 않고, 종에 기초한 차별이라고 정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윌리엄스의 종차별주의 논의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런 차별이 가장 명백한 경우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어떤 사람들은 개나 돼지의 정신능력보다 탁월한 정신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다른 사람과 동일한 도덕적 지위를 가지는 경우이다.

우리는 침팬지, 원숭이 돼지와 개들을 고통스럽고 치명적인 실험에 기꺼이 사용한다. 만일 이런 실험에 사람들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그런 실험이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 간주할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아마도 비정상적인 유전적인 요소 때문에 혹은 출생 시의 문제로 인해 이들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고, 가지지 못할 것이다.

이런 사실이 인간을 동물보다 우선시하는 편견 즉 종차별주의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정신적 능력의 차이나 그 외의 특징들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가?

우리가 지금 동물을 다루는 방식을 옹호하려는 사람은 이 가능성에 응답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것은 순전히 가정적인 경우가 아니다.

심한 뇌의 손상이 있는 인간을 실험에 사용하는 것은 많은 경우에 의학을 위해서 이익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종들 사이에는 의미 있는 차이들이 존재하고, 인간이 아닌 동물에 관한 연구로부터 나오는 결과들은 우리를 오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어도 일부의 사람들보다 보다 높은 지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는 동물에 대해서 수백만 번의 실험을 계속하지만 이런 연구를 인간에 대해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인간의 편견을 방어하는 윌리엄스의 마지막 수단은 가장 중요한 부분에 이르면 놀랍도록 단순하다. 그는 자비롭고, 공정하고 먼 안목을 가진 외계인들이 지구를 식민화하고, 이 외계인들이 의심할 바 없이 공정한 마음과 완전한 정보에 근거해서 “우리를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상상해 보라고 한다.

그는 이 상황에서 우리는 외계인들의 잘잘못을 논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비록 외계인들이 공정하고 모든 존재들의 더 많은 좋음을 위해서 행동한다 하더라도, 이 때 유일한 질문은 “너는 어느 편이냐?”는 것이다.

윌리엄스가 인종차별주의와 종차별주의 사이의 유비를 부정하고 나서 “너는 어느 편이냐?”를 자신의 논변의 궁극적인 거점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의아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이미 많이 들어온 질문이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혹은 이념적 갈등의 시기에 그 질문은 집단의 단결을 촉구하기 위해 사용되고 이런 싸움에 의문을 표하는 것은 반역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50년대 미국의 매카시주의자들은 공산주의와 싸우는 자신들의 방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물었고, 지금 미국의 부시행정부는 자신들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물음으로써, 자신들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너는 어느 편이냐?”는 세계를 “우리”와 “그들”로 나누고 이런 구분은 우리가 무엇을 행하는 것이 올바른가 하는 윤리적 문제들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런 질문을 받은 상황에서 우리가 행해야 할 올바른 일은 그리고 용기 있는 일은 옳든 그르든 나의 부족 (나라, 인종, 민족, 종교, 종 등)이라 말하게 하는 부족본능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올바른 쪽에 서겠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록 공정하고 모든 정보를 알고 먼 안목을 가진 판단자가 더 많은 부정의와 비참을 피하기 위해 우리 종족을 제거하는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결정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부족 혹은 종 본능을 누르고 윌리엄스의 질문에 같은 식으로 대답해야 한다. 즉 올바른 쪽에 서겠다고 대답해야 한다.

인종차별주의와 종차별주의 사이의 유사성의 문제를 끝내기 전에 종차별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다른 논변을 거론해야 한다.

이 논변은 부모들이 다른 사람들의 아이들에 우선해서 자기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아야 할 특별한 의무가 있는 것처럼 다른 종의 성원들에 우선해서 우리 종의 다른 성원들에 대해 특별한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이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가족과 종 사이에 있는 명백한 경우들에 관해서 침묵한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 대학 (리버사이드 캠퍼스)의 명예교수인 루이스 페트리노비치는 조류학과 진화론의 권위자인데 그는 우리의 생물학적인 본성이 어떤 경계를 도덕적 명령으로 전환시킨다고 말한다.

이런 경계들로 “아이들, 친족, 이웃 그리고 종”을 들고 있다. 만일 이 논변이 가족과 친구라는 보다 좁은 범위와 종이라는 보다 넓은 영역 양쪽 모두에서 성공적이라면 이 논변은 그 중간 범위인 인종에 대해서도 성공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페트리노비치는 그런 결론을 도출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자신의 인종의 이해관계를 다른 인종의 이해관계보다 우선시하는 것을 지지하는 논증은 오늘 날은 친족, 이웃 그리고 우리 인간종의 성원들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논변보다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만일 인종이 도덕적으로 적절한 경계가 아니라면 왜 종이 도덕적으로 적절한 경계여야 하는가?

1983년에 로버트 노직은 종의 성원이라는 것의 도덕적 중요성에 관한 이론을 우리가 아직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로부터 많은 결론을 끌어낼 수는 없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이유는 그런 문제는 최근까지는 그렇게 절실한 문제로 보이지 않았고 아무도 그런 이론을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노직이 그렇게 쓴 이후부터 많은 철학자들이 종의 성원의 도덕적 중요성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설득력 있는 것을 말하지 못했다.

따라서 노직의 언급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종의 성원이라는 것의 도덕적 중요성을 정당화하는 것이 점점 더 성공하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제 두 번째 질문에 관해서 논의하겠다. 만일 종이라는 것 자체가 도덕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면, 우리가 동물들의 이해관계를 과소평가하는 근거가 되는 인간과 동물의 다른 특징이 있을까?

도덕을 일종의 사회계약으로 보는 사람들은 상호작용을 하는 능력의 결여가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피터 캐루터스는 도덕은 만일 내가 너를 해치지 않는다면 너도 나를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합의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동물들은 이런 사회계약에 참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들에 대한 직접적인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도덕에 대한 이런 사회계약론적 접근 방식의 문제는 이런 접근방식이 우리는 어린 아이들이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세대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도덕적 의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수천 년이나 유해한 방사성 쓰레기를 생산하고 그것을 150년 동안만 유지되는 용기에 넣어서 그것을 가까운 호수에 버리는 것이 비도덕적이 아닐까? 만일 그런 행동이 비도덕적이라면 도덕은 상호성에 기초할 수 없다.

인간의 특별한 도덕적 중요성을 지적하는 많은 다른 방식들이 제시되어 왔다; 추론 능력, 자의식, 정의감, 언어 자율성 등등. 하지만 이 모든 구별하는 표지들의 문제는 위에서 윌리엄스를 논할 때 언급한대로 어떤 사람들은 이런 특징들을 완전히 결여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동물들과 동일한 범주에 넣으려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동물을 대하는 방식이 종차별주의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동물의 지적 능력보다 탁월하지 않은 능력을 가진 인간을 다루는 방식을 언급하는 논변은 ‘한계적 경우로부터의 논변’이라는 논쟁을 도발함직한 이름으로 알려져 왔다.

이 논변은 우리가 특별한 도덕적 지위를 가지는 존재들과 그런 지위를 결여한 존재들의 경계를 나누는 우리의 현행방식에 반대하는 강력한 논변일 뿐만 아니라, 종차별주의에 대한 비판이 우리가 동물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는 만큼이나 사람에 관해서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함축에 놀란다. 이런 함축에 대해서는 다른 강연에서 더 충분히 논의할 것이다.

오늘 강연의 목적을 위해서는 이 문제에 관한 간략한 요약만이 필요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인간들은 그들의 지적 능력에 상관없이 동일한 기본적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현재 통용되는 도덕적 수사학을 받아들인다면, 동물들 역시--최소한 모든 정상적인 조류들과 포유류들이--일부의 인간들만큼 이성적이고 자의식적이고 자율적이라는 사실로부터 모든 동물은 생명권을 포함한 기본적 권리들을 가진다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우리가 심한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동일한 지적 수준을 가진 동물들이 권리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는 것처럼 심한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동물들을 고통스럽고 치명적인 실험에 사용하는 것처럼 그런 사람들도 그런 실험에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정상적인 조건에서 사람들은 권리에 의해 보호되는 도덕공동체의 성원들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비정상적이라 해도 그 사람들에게 이 공동체의 성원권을 취소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로저 스크러튼은 심한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정상적인 인간과 동일한 권리를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들이 그런 것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예제 사회의 사람들은 권리를 가진 인간과 권리를 가지지 않은 인간 사이의 경계를 나누는 것에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들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정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들 때문에 동물들보다 왜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지도 명백하지 않다.

이 논변은 필요한 특징들을 “우연히” 갖지 못한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이 불공정하다는 것에 기초하는 듯이 보인다.

만일 “우연히”가 단지 통계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도덕적 적절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필요한 특징들을 결여하는 것이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동물로부터 구별하는 기초가 되지 못한다.

나는 과거 30년의 논쟁에서 모든 쾌고감수성을 가진 존재들의, 즉 이해관계를 가진 모든 존재들의 이해관계가 평등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대해 어떤 근본적인 반대도 제시되지 못했다고 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든 쾌고감수성을 가진 존재들의 이해관계가 평등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입장은 그런 이해관계가 무엇인지를 평가해야하는 어려움에 불가피하게 봉착하게 된다.

한 존재가 자신의 삶이 지속되는 것에 대해서 가지는 이해관계는―따라서 그 존재의 생명을 빼앗는 그릇됨―은 부분적으로는 그 존재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도 존재하고 미래지향적인 욕망을 형성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도 존재한다는 볼 수 없는 존재는 계속 살기를 원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이 그런 욕망을 좌절시킬 수 없다.

그 정도까지의 자의식이나 미래를 지각하는 감수성 같은 특징들은 한 존재를 죽이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해를 끼치는 지에 대한 차이를 만들 수 있다.

만일 물고기가 물 밖으로 잡혀 나온다면 물고기조차도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라고 반대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물고기가 자신을 의식하고 계속살기를 원한다는 표시인가?

대답은 물고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물밖에 나온 물고기는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에 확실히 고통을 받고 있고 서서히 질식되면서 아마도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런 고통 때문에 그것이 버둥거린다. 하지만 물고기가 버둥거린다는 사실로부터 물고기가 시간이 흘러가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계속 살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른 강연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 강연에서) 더 얘기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쾌고감수성의 경계에 대해서 좀 더 말을 해야 한다. 내 견해는 쾌고감수성을 가진 모든 존재들은 이해가 동등한 고려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쾌고감수성을 가진 존재”라는 용어로 나는 이해관계를 가진 존재를 말하고, 고통을 느끼는 능력은 그 존재가 이해관계를 가지는 데 충분하다는 것이다. 즉 그런 존재는 최소한 고통을 안 느낄 이해관계를 가진다. 하지만 어떤 존재들이 그런 능력을 가지는가?

아무도 다른 존재의 의식을 직접적으로 관찰할 수 없다. 우리가 직접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의식은 우리 자신의 의식뿐이다.

다른 모든 경우에 우리는 유비에 의해서 의식의 존재를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다른 동물들이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상황에 있고 우리가 행동하는 것처럼 행동할 때 우리는 동물들이 우리가 고통을 느낄 때 경험하는 것을 경험하리라고 믿을 만하다.

이 유비는 동물들이 우리의 신경계와 아주 비슷한 신경계를 가지고 있고 우리의 뇌와 유사한 뇌에 강한 욕망을 전달한다는 것을 발견할 때 더욱 강화된다.

우리가 공통된 진화론적인 근원을 공유한다는 지식을 더하면--동물들은 동물행동을 모방하기 위해서 장난감 회사가 만든 영리한 로봇이 아니다--동물들이 우리가 가진 의식적인 경험들을 가지리라고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따라서 모든 포유류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듯이 보이고, 새에 대해서도 별다른 의심이 없어 보인다. 물고기와 무척추동물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논란이 있다. 하지만 물고기의 행태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물고기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갑각류와 벌레들에 대해서는 확신하기가 어렵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들의 행동은 보다 의식이 요구되지 않는 것 같은 방식으로 더 프로그램 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에 대해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윤리적인 행동의 방식은 우리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런 동물에게 고통을 가하 것을 피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도덕적 논변이 실제 생활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들은 도덕적 논변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가 하고자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고 전혀 사람의 마음을 바꾸지 못하거나 아주 드물게만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동물운동은 이런 견해에 대한 반례를 제공한다. 제임스 재스퍼와 도로시 넬킨이 “동물권 십자군 운동: 도덕적 항의의 성장”이라는 책에서 관찰하고 있듯이, “철학자들이 70년대 말 동물운동의 산파역할을 했다.”

이 운동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개혁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했다. 동물실험에 있어서 개혁, 특히 유럽연합에서는 최악의 형태의 가축사육공장을 금지하는 법률들을 통과시켰다.

이런 최악의 가축사육공법이란 육용 송아지들과 돼지를 걷거나 돌아서지도 못할 작은 우리 속에, 암탉들을 알을 낳은 통도 없거나 본능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조차 없는 아주 작은 철망우리 속에 가두어 기르는 것이다.

유럽연합 내에서 취해진 이런 개혁들은 수많은 동물들에 영향을 미치고 대규모 산업들을 변화시킬 것이다. 이 모든 변화들이 동물의 복지에 대한 배려에 기인한 것이다. 미국 역시 이제 유럽의 예를 따르기 시작하고 있다.

가장 잔인한 공장식 사육방식을 금지하는 미국의 플로리다 주와 애리조나 주의 주민투표에 의해서 세계 최대의 돼지 사육업체인 스미스필드가 자발적으로 돼지들을 개별우리에 가두어 기르는 것을 단계적으로 없애 나가겠다고 발표했다.

캐나다 최대의 돼지 사육업체인 메이플리프 역시 그렇게 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미국의 송아지고기 생산업체들도 송아지를 개별우리에 가두어 사육하는 방식을 단계적으로 없애 나가겠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철학이 관념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영역에서도 중요한 변화를 촉발했다는 데에서 사회에서 진정으로 비판적인 역할을 했다.

우리가 동물들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에 대한 이런 현대적인 철학적 도전이 “분석적 전통”이라 불리는, 영어권 철학의 전통에 있는 철학자들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유럽의 대륙철학의 전통, 하이데거, 푸코, 레비나스와 들뢰즈 등의 전통에 있는 철학자들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이런 철학자들이 어떤 사회의 주된 가정과 제도에 대해서 취하는 여러모로 가치 있는 “비판적 자세”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유체계는 우리가 동물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하는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물론 동일한 질문을 1970년대 이전의 분석적 전통의 철학에 대해 묻는 것도 가능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 가능한 어떤 대답들은 모든 철학적 전통에 공통될 것이다.

노예상인들과 노예소유주들이 아프리카계 사람들을 재산으로 취급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믿는 것이 편리했던 것처럼, 동물이 소유할 수 있는 사물이고, 동물이 도덕적 요구를 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는 것이 우리에게는 편리할 것이다.

영국철학 전통에 있는 철학자들이 동물을 다루는 문제를 다루고 있을 때, 대륙전통이 이 문제에 대해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보다 구체적인 이유가 있다.

한 이유는 흄, 벤담, 밀의 영국적 전통에서는 어떤 존재가 쾌와 고통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 도덕적 지위를 가지는데 중요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미 도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대륙 전통에서는, 그 중에서도 칸트에 주목하자면, 이성능력과 이성능력에 의한 자율성의 능력이 도덕적 지위를 가지기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이 아기들이나 심한 정신적 장애를 가진 인간들의 도덕적 지위에 관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에 주목한 칸트의 추종자들이 거의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만일 이성 능력 혹은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을 다른 사람의 목적을 대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로 만드는 것이라면 명백히 어떤 사람들은 목적 자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대륙철학이 동물의 도덕적 지위 문제를 다루는 데 실패한 사실로부터 배워야 하는 참된 교훈은 ‘비판적 자세’를 취하는 것이 심오하거나 우리를 고양시키는 듯이 보이지만, 이에 사용된 애매한 수사학은 비판적 고찰을 돕기보다는 추론의 약점을 위장하는데 더 큰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런 수사학에 대해서 비판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은 과거의 위대한 철학자들의 권위에 무조건 굴복해서는 안 되고, 명백한 논변을 결여한 부풀려진 수사학의 바람을 뺄 준비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소크라테스가 고대 아테네에서 그랬을 때 인기 없게 만들었던 것처럼 우리를 인기 없게 만들지라도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이 강연의 처음에서 인용한 “뉴욕책서평지”에 실린 내 글은 동물해방운동을 인간본성에 대한 시험으로서 보는 문단으로 끝이 난다.

이런 종류의 순전히 도덕적인 요구가 성공할 수 있을까? 물론 아주 어려울 것이다. 이 책은 어떠한 유인책도 내 놓지 않는다. 이 책은 우리가 동물을 더 이상 착취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더 건강해진다거나 인생을 더 즐기게 될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동물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동물 해방을 요구하거나 착취에 반대해서 투표나 데모나 폭탄으로 항의할 수 없기 때문에 동물해방은 다른 어떤 종류의 해방운동보다 인간의 입장에서 더 많은 이타주의를 요구한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만일 이 책이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면, 이 책은 인간의 마음속에 잔인함과 이기심 외에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온 사람들의 입장을 입증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는 무엇을 성취했는가? 우리가 거둔 성과를 인간본성에 대한 낙관주의자들과 냉소주의자들은 양쪽 모두 자신들의 견해를 지지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동물실험과 동물학대의 영역에서 종요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레브론 에이본, 브리스톨-마이어스 같은 큰 화장품 회사들은 그들의 상품을 시판 전에 동물에 통상적으로 실험해 왔다.

그들은 수천마리의 토끼들을 나무상자 속에 움직이게 못하게 하고 토끼들이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화장품에 사용되는 요소들을 토끼들의 눈에 집어넣었다.

그 후 기술자들이 하루나 이틀 후에 돌아와서 토끼들의 눈에 가해진 피해를 측정했다. 때로 매우 부식성이 있거나 산성이 있는 것들을 토끼 눈에 넣었고 그 결과로 안구에 수포가 생기고는 했다.

우리는 이것이 토끼들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할 수 있다. 다행히 동물해방운동의 결과로 이 회사들은 더 이상 그 생산물들을 동물에게 실험하지 않게 되었고 동물 눈에 대한 실험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모피 역시 어느 정도 진보가 이루어진 다른 영역이다. 많은 유럽의 국가들과 북미에서 모피산업에서 동물에 가해지는 고통이 공중들에게 알려진 후에 모피는 예전보다 인기가 없다.

하지만 현재까지 인간의 동물 학대가 가장 중요한 분야는 동물 사육인데 이 영역에서 사용되는 동물의 수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만 1년에 100억 마리의 동물들이 사육되고 음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도축된다. 내가 이미 언급한 대로 유럽에서는 이런 산업 전체가 공장 식으로 사육되는 동물의 복지에 대한 공중의 관심으로 인해 변화되고 있다.

아마도 이런 변화가 북미에서도 시작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낙관주의자들에게 가장 고무적인 일은 수백만의 운동가들이 동물해방운동을 위해 자신들의 시간과 돈을 자발적으로 제공하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동물학대를 지지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의 식생활과 삶의 방식을 바꾼다는 것이다.

(계란과 유제품 등은 먹는) 통상적 채식주의와 (계란과 유제품 등 동물로부터 산출되는 어떤 것도 먹지 않는) 완전한 채식주의가 북미와 유럽에서는 30년 전보다 훨씬 더 널리 퍼지고 있다.

비록 이런 변화가 얼마만큼이나 동물에 대한 배려에 의해 촉발된 것인지 알기는 어렵지만, 이들 중의 일부가 그렇다는 데에 대해서는 의심할 바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 동물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철학적 논쟁은 일반적으로 동물이 도덕적 지위를 가진다는 입장에 대해 우호적인데 반해 대중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종의 차이를 무시하고 이들 존재들의 이해관계가가 평등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과 여전히 아직 거리가 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먹는 고기들이 산출되는 동물의 고통에 대해서는 망각한 채 여전히 고기를 먹고, 가장 싼 고기를 찾는다. 현대 동물해방운동이 이루어낸 성취에도 불구하고 지구적 차원에서 동물을 위한 상황은 좋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나빠졌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동물해방의 성취는 중산층이 점점 증가하고 더 부유해지는 중국 같은 아시아 국가들에서, 공장식 가축사육이 증가하는 것에 비교해볼 때 거의 아무것도 아니다.

확신컨대 한국도 그런 나라 중의 하나이다. 공장식으로 사육되는 대부분의 동물들은 살아있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신선한 공기나 태양이나 풀도 모르고 도축을 위해서 트럭에 실려지기 전까지 실내에서 비참한 삶을 산다.

요약하자면 지금까지 우리가 동물해방운동에서 거둔 결과가 입증하는 것은 한 종으로서 우리가 다른 존재들을 위한 이타적인 배려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는 불완전한 정보, 강력한 이해관계와 불편한 사실들을 알지 않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이 동물해방운동이 이룩한 성취를 제한적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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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법으로 반출생주의를 이해하는 경로는 내가 "염인론”을 통해서 주장했던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수십억의 다른 인간과 비인간 종 동물들의 고통과 죽음에 깊은 책임을 져야하는 심각한 결함을 지닌 파괴적인 종이다. 만약 그런 수준의 해악이 다른 종에 의해 야기 되었다면, 우리는 진작에 그 종에게 새로운 구성원을 더 만들지 않도록 부탁했을 것이다.”
~ 데이비드 베나타
"우리는 존재하지 않아야 할 생물이다": 반출생주의 이론, 2015

ex2) 대륙 철학에서는 동물권에 관심을 가지고 육식을 비판한 사람이 없다는 건 지나친 편견이다. 육식이 아무런 도덕적 근거가 없으며 인류의 이성이 발전하게 되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문화라고 본 아주 유명한 철학자가 있다. 바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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