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음이었다. 하루가 지났어도 남자는 취기를 이기지 못했다. 오전 내내 틈틈이 바깥바람을 쐬러 나가야했고 그 사이사이 냉수를 마셔댔다. 그게 귀찮아서 차라리 그 취기가 길게 여운을 남기며 하루 온 종일 내 몸에 그냥 머물러 있었으면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바깥바람을 쏘이며 걷다가 문득 남자는 간밤 여자의 벗은 몸을 떠올리며 황홀해했다. 여자의 하얀 피부는 눈부셨고 그 속의 가는 실핏줄이 모두 드러나 보일 듯 투명해 보였다. 그야말로 몽환적이었다.
아, 그 에로티시즘이라니!
남자는 저도 모르게 빙긋 웃음을 짓기까지 했다. 그때마다 멍하게 열어젖힌 동공은 응시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 흐린 초점 그 너머로 격하게 밀려드는 깊은 오르가즘. 비로소 맞이하는 그 끝없는 자유. 남자는 생각했다. 사랑하므로. 진정 그녀가 나였다. 그런 기분은 아마 여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었다. 여자는 그런 자기의 느낌을 메일로 보내왔다.
메일은 번거로움을 없애 주는 참으로 편리한 문명의 이기다. 만나지 않아도 만난 듯 하고 만나서 하기 어려운 말도 스스럼없게 한다. 더구나 손가락만 움직이면 아주 멋진 글씨가 쉴 사이 없이 쏟아진다. 수정 작업이 쉬우니 말이나 글의 실수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메일을 보내왔다. 그곳에는 여자의 마음이 가득 담겨있었다.
-아주 기분 좋은 행복감이 보이지 않는 그 곳에 그렇게 있었습니다. 변해가고 있는 내가 당황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래도 생각해 보면 늘 함께이고 싶고 하나이고 싶습니다. 자유가 아니라 속박이 될지라도. 눈빛만으로 서로를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열심히 연습 하셔서 원하시는 마라톤 기록 얻으세요. 마음속으로 같이 달려 드릴 게요. 미소 머금고 말씀하시는 모습이 저를 황홀하게 합니다.
메일을 받아본 것이 불과 사흘 전인데도 수도 없는 날들이 지난 것 같았다. 창밖으로 봄기운이 가득했다. 운동장 건너편의 나무들은 아직도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곧 잎이 돋아나올 것처럼 차츰 물기가 도는 듯 했다. 그 빈 가지 사이 이곳저곳에서 여자가 웃고 있었다. 남자의 눈길 닿는 곳이면 어디나 게 여자가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그런 사실에 숨 막혀 했다. 생각하는 그 속에 그렇게 여자가 있음은 분명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여자의 조용한 미소는 온통 남자의 하루를 지배하고 있었다. 종일 여자의 체취를 느끼는 것도 같았다. 그건 속박이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분명 자유, 끝없는 자유임이 분명하다. 여자를 느끼고 생각할 수 있어 참으로 행복했다. 그건 환희이고 한없는 즐거움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 바로 그것이었다. 남자도 여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새벽.
눈을 뜨면 당신은,
가만한 얼굴로 내게 미소 지으며 아침 인사를 건넵니다.
창을 열어젖히면 당신은,
언제 왔는지 창 밖에서 조용히 미소 짓고 있습니다.
내 눈길이 닿은 곳이 어디든 당신은,
그 자리에서 그렇게 가만히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습니다.
진정 비로소 봄입니다.
남자의 메일에 여자는 즐거워했고 금방 회신이 왔다.
-참 아름다운 가슴을 가지셨습니다. 아름다운 글이 진솔하게 나의 가슴에 담아집니다. 인간에게 이토록 아름다운 가슴을 주셨음을 조물주에게 감사드립니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당신 가슴에 가만히 안기고 싶습니다. 그냥 그렇게 가만히 당신 품에 안겨 같은 마음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나에게 전해지듯 나의 마음이 당신에게 전해지길 소망하면서....-
여자는 한없는 행복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여자의 회신 메일에 남자는 하루 종일 즐거워했다. 그 즈음 여자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다시 몰두하기 시작했고 남자는 이런 저런 자료 제공이며, 조언으로 여자를 도왔다. 남자는 진심으로 여자가 이루고자 하는 일을 꼭 이루기를 바랐고, 그런 만큼 더욱 여자에게 집착했다. 그런 집착은 여자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