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기본 모토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능력에 따라 분배 받는 것이다. 반대로
공산주의에서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받는 것이 가장 중요시되는 가치이다. 장 자크 루소 같은 자유주의자의 주장에 따르면 후천적 능력에 따라 분배받는 것이 공평한 경쟁이다. 따라서 신분과 같은 선천적 능력에 따라 분배받는 것은 공평한 경쟁이 아니다.
그런데 존 롤스는 루소의 이 같은 주장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한다.
"일단 후천적 능력에 따른 분배가 이루어지면 그 세대까지는 공평할지 모르나, 이것이 상속을 통해 선천적 능력으로 작용하면서 자연스레 불공평이 발생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자의 주장은 공평을 이룩하기에 부족하다. 공평을 이룩하려면 무지의 베일 속에서 서로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 모르는 상태로 사회계약을 작성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적은 권리를 행사하는 자가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을 때야 비로소 차별은 정당화 된다."
자본주의의 기원은
특정한 환경과 조건에서 자본의 독점이 일어나는 것을 전제로 한다. (
식민지 근대화론 참고)그래야만 자본가가 탄생하고 자본을 중심으로 한 상위구조(문화,정치,사회)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가, 또는 경제력을 갖춘 자가 경쟁을 빙자해서 서민층을 착취하여 기득권을 유지했다고 말하는 것이 마르크스 주의의 기본 이념중 하나일 정도로 이것은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전제이다.
존 롤스가 말한 것처럼 처음엔 공평한 분배 방법이었던
능력주의도
상속을 통해 선천적 능력인
신분을 부활시키는데 일조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기원인 부의 독점을 능력주의를 통해 실현한 것이며, 상속이 없어지거나 세금을 통해 제한받지 않는 한 자본주의 체제는 그 자체의 동력으로 공평한 경쟁을 방해하고 기회의 균등에서 멀어진다.
이전 문서에 서술된 내용에서 기회의 균등은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라고 하였는데, 기회의 균등은 자본주의에서 비롯된 개념이 아님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기회의 균등은 오히려 평등주의에서 기원한 개념이다. 따라서 결과의 균등과 대치되지 않으며 오히려 결과의 균등을 이룩하기 위한 과정으로써 존재한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결과의 평등을, 자본주의는 기회의 평등을 중시한다는 서사는 각 개념의 기원을 오인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가 스스로 불공평을 향해 달려갈 때 그것에 제동을 거는 방법은 학자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칸트의 경우 사람은 수단이 될 수 없고 그 자체로 목적이어야 하므로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자본주의는 제한받는다.
공리주의자의 경우, 자본주의 체제가 최대다수 최대행복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달려간다면 그것은 불공평하지 않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 불공평하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본다.
존 롤스의 경우 무지의 베일 속에서 만들어진 사회계약과 사회적 약자의 혜택 보장이 있는 사회만이 공평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국가의 간섭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노직의 경우 자본주의 체제에서 부를 독점한 자가 자발적 의지로 '기부'를 행함으로서 자연스러운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이에 국가가 간섭하는 것은 개인의 소유권에 대한 침해로 매우 부정적으로 본다.
왈저의 경우 어떤 재화가 필요로 하는 자에게 가는 것이 공평한 것이며 현재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은 부를 독점한 자가 다른 모든 재화까지 독점하는 데 있다는 의견을 냈다. 부자는 돈을 많이 소유한 자일 뿐인데, 자연스럽게 모든 의료서비스, 교육서비스, 식량, 의복, 주거까지 독점하게 되면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경쟁이 격화되면 될수록 경쟁을 강조하는 지도층들은 점점 경쟁을 안 하려고 하거나 남들보다 더 유리한 입장에서 경쟁하려는 문제가 생긴다. 경쟁이 점점 가속화될수록, 내가 99%를 이뤄도 남이 100%를 성취했다면 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대평가 환경이 만들어지고 과열 경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렇게 조금이라도 밀려나면 곧 사회에서 도태됨을 의미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잃어버릴 게 많은 지도층의 입장에서는
기득권을 자손 대대로
물려준다거나, 아니면 밀려나서 기득권을 잃기 싫으니
편법을 동원해서 경쟁을 안 하게 되거나 혹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반칙, 조작 등의 비겁한 수단도 쓰게 된다. 즉 존 롤스가 말한 것 처럼
경쟁에서 승리해서 기득권을 얻은 승리자는 다음 경쟁 때에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형평성을 훼손하게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렇게 반칙을 통해 경쟁에서 이기는 건 실력의 유무와는 전혀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능력도 실력도 없는 사람이 사회 고위층이 된 다음 자기보다 더 유능한 아랫사람을 지배한다는, 경쟁지상주의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모순이 생긴다. 따라서 이런 집단이 효율적으로 돌아갈 리가 만무하므로, 다른 경쟁집단과 비교해 뒤처지는 효율성을 보충하기 위해 무능한 윗사람이 유능한 아랫사람을 자기가 할 몫의 경쟁까지 몰아줘서 착취하는
똥군기같은 악습이 생겨나는 풍토를 만든다. 게다가 이에 항의하는 사람들에게는
꼬우면 네가 경쟁에서 이겨서 승리자가 되든가 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승리해서 사회주도층이 되더라도 뛰어난 인재 한 명이 구조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현대 사회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현대 사회보다도 구조가 단순했던 고대와 중세 사회마저 간단한 개혁 하나 하는데 온갖 반대와 훼방을 거쳐 몇십년 뒤에나 겨우 성공하는 판에, 구조가 더 복잡해지고 전문화된 사회에서 고작 한 사람의 개혁의지가 세상을 바꾼다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다. 현실은 만화도 애니메이션도 아니다. 기존의 세력에 편승하지 않는 개인(=고작 한 사람)의 힘이
닥터 맨하탄이나
슈퍼맨처럼 초월적이고 강대한 경우는 몹시 드물었고, 그런 사람이 선한 상황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뭄에 콩 나듯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면 승리자가 되어도 패배자가 되어도 사회에 끌려다니는 무력한 개인으로서 살다 죽을 수밖에 없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 있다. 사회 변혁이 불가능하다고 당당히 외치는 것은 염세주의적
허무주의에 불과하다. 역사 속에서 사회는 늘 변화해 왔다는 역사적 특징은 여전히 현대 사회 또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대상임을 암시하고 있다. 특권을 가진자들 중 그 특권을 분배하고 싶은 자가 있다면 서로 연대하는 것이 해답이 될 수 있다. 혼자서 특권을 내놓으면 그저 특권을 박탈당한 채 생을 마감하기 마련이지만, 사회적 약자와 특권을 분배하고자 하는 개혁적 사회주도층이 서로 연대해 분배구조를 재정의하면 위에서
거의 포기하듯이 언급한 사회 구조 개혁이 가능하다. 현대 사회라고 해서 과거와 완벽히 단절된, 기존의 이론이 일체 적용되지 않는 고립계가 아니기 때문에 고대 사회와 마찬가지로 변화할 수 있다. 다만 그 시간이 더 오래걸릴 뿐이고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한결같이 개혁의지를 고수한다는 보장도 없다. 비주류 출신에서 자수성가해 주류에 편입된 사람이 현 체제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낼 경우 빠르게 퇴출당하는 게 보통이다. 한 마디로
나라도 나라지만 자기 밥그릇을 깨기 싫기 때문에. 따라서 비주류→주류 테크트리를 탄 사람들은 보통
그 배고프고 추운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겨우 얻은 새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기존 주류들보다 더욱 더 보수적이고 과격하게 현 체제를 옹호하면서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보이게 된다.
하시모토 도루가 좋은 예인데, 일본 사회에서 온갖 차별을 받는 부라쿠민 출신이었는데 이 사람이
부라쿠민 문제를 공론화하긴 커녕, 되려 정치 기득권을 쥔 일본 극우들의 시각에 동조해 온갖 망언을 쏟아내고 있다.
게다가 공부를 잘 했던 최상위권 학생들 대부분이 경쟁의 위험성 때문에 새로운 도전보다는 대기업 월급쟁이를 훨씬 선호하는 등 겨우 승리자가 되어 사회에 나온 사람들도 거시적인 시점에서는 이미 기득권을 잡은 기존 승리자들의 밑에 깔리게 되거나, 자기가 사회에서 성공하고 난 다음에는 오히려 기존 기득권에 영합하여 같은 행동을 저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