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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 영화 관련 영상 댓글들을 보고...
게시물ID : history_2990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잿빛나래
추천 : 2
조회수 : 110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0/01/04 18:28:20
안녕하세요.
영화 천문을 보게되었고, 그에 관한 리뷰 영상등을 수십개씩 보고 그 영상들에 달린 댓글들도 대부분 보았습니다.
당시의 역사와 과학기술에 관심이 생겨서 그를 다룬 다큐멘터리와 역사 프로그램을 몇편을 챙겨보고 사료조사도 어느정도 해보았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주제는 세종대왕과 장영실과 관련된 영상들의 댓글들에 악플을 달던 사람들 관련해서입니다.
한두명도 아니고, 3~5명의 사람들이 세종대왕과 관련된 영상마다 찾아다니면서 악플을 달면서 비방하고 있더군요.

이 사람들이 비방하는데는 이유가 있겠지 싶어서 그 사람들의 주장에 관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일단은 세종시기의 대표적이였던 물품중 하나인 자격루 관련해서입니다.

자격루가 물이 일정하게 흐르고 물의 부력을 이용해서 현대의 화장실 변기에 있는 장치와 유사하게 작동해서 쇠구슬 등을 사용한 기계장치를 격발시키게 되고, 기계장치로 인해서 더큰 구슬이 격발되는등 기계식으로 힘을 증폭시키고 2차 격발하는 장치가 들어가더군요. 그로 인해 악기를 연주하는 인형들이 북과 징등을 치고 12지신 인형들이 시간에 맞게 튀어나오면서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더군요.

이 자격루와 관련해서 악플을 다는 사람들의 주장으로는
1. 유럽에는 저때 시골 마을마다 시계탑이 있었다. 저런건 아무것도 아니다.
2. 유럽에는 저때 이미 오토매틱 시계가 있었다.
3. 당시 조선의 기술이 워낙 낙후되고 미개했기 때문에 저런것을 대단하게 생각했다.

이러한 주장을 하면서 서양을 찬양하고 우리나라를 깍아내리더군요.
그래서 찾아보았습니다.

당시 유럽의 기계식 시계가 같은 시기인 1400년대에 체코의 프라하에서 최초로 개발된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이제 막 최초로 개발 성공한건데 이게 시골 마을마다 설치되어 있었다????
이건 좀 허황된 주장으로 생각되어집니다.

프라하에서 개발된 시계가 기계식 시계인것은 맞지만, 오토매틱(자동) 시계는 아니였습니다.
조선의 자격루도 물시계와 기계장치들의 결합이였는데... 기계식이라고 무조건 오토매틱(자동)이 아닙니다.
프라하에서 개발된것은 수동 시계 였습니다.
유럽에서 오토매틱 시계가 처음 개발된것은 1780년입니다.
약 350여년 이후의 일 입니다. 

그리고, 유럽의 시계탑 등에서 기계장치로 인형들이 움직이는것은 약 400여년 이후인 1800년대 입니다.
유럽의 시계탑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영국 런던의 빅벤도 1800년대에 만들어 졌습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서양보다 400여년이나 앞선것이니 당시의 자격루를 사람들이 대단하게 생각했는게
당연했습니다.
그걸 수백년 앞서 만든 조선의 기술이 낙후되고 미개했다고 보기에는 많이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많았던 주요 비방 내용은 세종대왕때의 노비 종모법 입니다.
노비 종모법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노비의 신분은 어머니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양인 남편과 노비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노비라는 것이죠.

일단 그들의 주장을 살펴보겠습니다.
1. 노비 종모법 때문에 노비가 늘어났고, 당시의 노비 여성들은 아이낳는 기계가되어서 잔혹하게 혹사당했다.
2. 노비 종모법 때문에 조선 인구 절반이상이 노비가 되었다.
3. 노비 종모법으로 개인 사유재산(노비)가 늘어난 양반계층의 권력이 강해지고, 왕권이 약화 되었다.
4. 노비 종모법을 주장한 양반계층에 굴복해서 이를 시행한 세종이 우유부단하고 못난놈이다.
5. 노비 종모법이 시행되기 이전에는 태평성대였다.
6. 이런 노비 종모법을 시행한 세종은 완전 개XX 였다.

노비 종모법을 시행하기 이전에는 노비 종부법(아버지가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이 시행중이였습니다.
노비 종모법도, 종부법도 모두 장단점이 있었지만, 노비 종부법이 시행중이던 당시에는 노비 종부법을 악용한 일부 양반계층 사람들때문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일부 악덕 양반들이 자신의 남성 노비에게 사주해서 양인 여성들을 강간시킨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강간당한 양인 여성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은 노비 신분이 되고, 남성 노비의 주인인 양반의 사유재산이 되는것입니다.
물론 이런 강간은 범죄이지만, 신분계급, 돈, 권력등의 대다수를 양반계층이 차지하고 있었기에 암암리에 이를 지시하고 뒤에서 무마시켜주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노비 종부법이 잘못되었다. 세종이 시행한 종모법이 낫다고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둘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다만, 당시에 종부법을 악용한 사람들때문에 종부법에 대한 인식이 안좋아졌다는것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들의 주장으로는 세종대왕때문에 여성 노비들이 혹사당했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아시다시피 세종대왕은 출산한 노비에게 출산휴가를 주고 그 남편에게까지도 남성 출산휴가를 주는 정책을 펼치면서, 노비들의 복지에까지도 신경을 썼었습니다.
그들의 주장과는 상반됩니다.

또한 세종대왕이 시행한 노비종모법 때문에 양반들의 권력이 강해지고 왕권이 약화되었다고 주장하는데...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아시다시피
세종때는 왕권이 매우 강했던 시기입니다. 이것 역시 그들의 주장과는 상반됩니다.

그들의 주장으로는 양반계층인 사람이 노비종모법을 주장했고 세종대왕이 이를 받아들였으니 양반계층에 굴복하고 신하들에게 끌려다니는 우유부단한 못난 왕이였다?!!!
우선, 노비종모법을 주장한 그 양반계층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살펴봅시다.
여러 신하들이 주장했었지만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세종대왕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좌의정 맹사성 입니다.

나라의 주요 대신이자 세종대왕의 최측근이였던 맹사성이 나라를 위해서 그런 주장을 했는지, 세종대왕의 뜻으로 그런 주장을 했는지, 그들의 말대로 자신이 속한 양반계층의 이익을 챙기고 주군이였던 세종대왕의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그런 주장을 했는지는 수백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명확히 알수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믿고 싶은대로 믿으세요!! ^^ 라고 말해주고 싶군요.

그리고 조선시대때에 노비가 많이 늘어난 계기는 노비 종부법이나 노비 종모법 때문이 아니라고 봅니다.
종부법과 종모법은 한쪽만 따르는 것이지만, 이후에 세조때에 부모 둘중 남녀 상관없이 한명이라도 노비이면 자식도 무조건 노비라는 정책을펴면서 부터라고 생각합니다.

세종대왕 이전에 노비 종부법을 시행중일때가 태평성대였다는 주장에 관해서는 너무 할말이 없네요...
태조 이성계가 왕되고 나서도 고려 세력들과 다투고, 왜구들 침입도 있었고,  태종 이방원이 외척들과 강대해진 권력을 가진 신하들 상대로 칼춤 추면서 피바람이 불던 때인데...
이때가 태평성대라니... 너무 Dog 소리 같아서 뭐라 할말이 없군요.


하루 정도만 투자해서 알아보면 다 나오는것들인데 이들은 왜 이런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는걸까요?
한두명도 아니고 어딘가 특정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고 의심됩니다.
혹시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커뮤니티가 어딘지 아시는분 계신가요??


(역사전공도 아닌 제가 하루정도 알아보고 쓴건데, 혹여나 미흡한점들 때문에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았을까 우려스럽군요.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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