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대회는 주말이면 전국의 어디선가 열린다. 마라톤을 즐기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또 다른 마라톤 대회가 한 주일 앞으로 다가왔으므로 남자는 일요일을 이용해서 마무리 훈련에 몰두했다. 모처럼 하프코스를 완주했고 몸 컨디션은 제법 괜찮은 것 같았다. 3분 정도 기록을 늘려 잡으면 무난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참으로 상쾌했다. 남자는 운동을 마친 오후 여자를 위해 주말이라 텅 빈 사무실에서 계획서의 마지막 작업을 했다. 남자가 막 계획서를 완성하였을 즈음 여자가 사무실로 찾아왔다.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계획서를 여자 앞에 내밀었다.
-어머, 벌써 다 하셨어요? 이렇게 빨리요?
여자는 탄성을 지르며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를 뒤에서 안았다. 여자의 얼굴에는 기쁨과 놀람이 함께 어울렸으며 진정으로 남자에게 감사했다. 오, 나의 천사. 남자는 자기의 목을 둘러싼 여자의 손을 흐뭇한 표정으로 쓰다듬었다. 여자는 남자 앞으로 돌아와 바짝 의자를 당겨 앉으며 감사의 표시로 무엇을 어떻게 해주면 좋을지 말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래?
-그럼요.
-글쎄. 무엇을 해달라고 해야 하나. 고로쇠 수액을 잔뜩 담아왔을 테니까 그걸 마실까?
-흐흐흥, 당신을 주려고 정말 잔뜩 담아왔지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무데서나 주지?
그러면서 여자는 즐겁게 웃었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가볍게 안았다. 여자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 좋아. 당신에게 이렇게 안겨 있으면 너무도 편안해요. 신기하지요?
여자는 가볍게 남자의 가슴으로 파고들었고 남자가 귓불을 간지럽히자 몸을 꿈틀댔다. 여자의 가슴은 봄 날씨처럼 안온하고 따듯하다.
-그래. 당신을 안으면 참으로 편안해. 그래선지 하루 종일 일에 시달려 피곤해도 당신을 안으면 피곤이 눈 녹듯 사라져. 사실 삶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닐까? 거기에 우리가 쓸데없는 덧칠을 하고 있을 뿐이지. 여자와 남자는 똑같은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여자는 안긴 채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내일이 마라톤 대회야.
남자가 말했다.
-알아요.
-응원해 줄 거지?
-그럼요. 그런데 이번에는 얼마를 달릴 거지요?
-하프코스. 이제 풀코스는 좀 힘든 것 같아.
-그렇군요. 잘 달리세요. 절대로 너무 무리하지 말고.
남자는 여자가 끓여주는 커피를 마시고 다음날 마라톤 대회 준비를 하기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커피 잘 마셨어. 커피 맛이 일품이었어. 고마워.
-파이팅.
여자가 귀여운 표정으로 대답대신 주먹을 불끈 쥐며 응원을 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얼마가 지나서 남자는 집 주변 학교 운동장에서 가볍게 몸을 풀었다. 남자는 천천히 운동장을 돌며 신체의 구석구석을 점검했다. 그것은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일로 마라톤을 할 때 몸에 무리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남자는 운동장을 몇 바퀴 돌다가 문득 여자가 생각나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신호음만이 길게 늘어지고 전화는 끝내 침묵을 지켰다.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켜자 여자에게서 메일이 와 있었다.
-부재중 전화1통. 핸드폰에 당신의 이름이 찍혀 있었답니다. 당신의 이름 석 자를 보는 순간 벅찬 전율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곤 이내 그리움으로 다가왔습니다. <보고 싶다>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임을 처음 알았습니다. 어느 드라마 노래에서 나왔던 <죽을 만큼 보고 싶다>라는 가사를 가슴으로 이해 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당신과 헤어진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그런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네요.
생각해 보면 저는 당신의 어린아이 입니다. 제 길을 또 당신께 찾아 달라고 응석을 부리는 걸 보면 정말 저는 어린아이 입니다. 그래도 당신이 이제는 네가 알아서 가라고 아니하고 길을 열어 주시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가슴은 가슴으로 이성은 이성으로 받아들이렵니다. 그리고 그리움은 또 그렇게 그리움으로 담으렵니다. 누군가 당신에 대해 그랬었지요. <따뜻한 사람> 이라고. 이제 비로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합니다. 새롭게 보여주신 당신의 순수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사랑합니다. 내일 눈 뜨면 당신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