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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거나 뻔한 이야기(9) / 여자에게서 온 메일
게시물ID : readers_3440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철수와영이
추천 : 1
조회수 : 28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12/14 22: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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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4월초인데도 아침나절은 여전히 겨울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일찍 출근한 탓인지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얼마가 지나서 그녀가 문을 가만히 밀고 들어왔다.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건넸다. 컴퓨터 모니터 너머로 바라다 보이는 그녀는 종일 밝은 표정이었다. 턱을 괴고 어제의 일을 다시 그려보았다. 그게 환영이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도 갑작스런 일들이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탓에 남자는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건 어쩌면 여자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남자는 까만 밤에도 하얀 하늘이 있음을 비로소 안 것 같았다. 정말이지 바다의 저 끝이나 밤의 저 끝은 매한가지였다. 그 안에서 여자가 끊임없이 꿈틀거렸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그것은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 본 일이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때, 남자는 저만치 하늘이 다시금 환하게 열리는 걸 보았다. 그 까만 밤 한가운데에서 남자는 여자의 깊은 곳에 스스로를 풀어놓았다. 사실 그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마침내 남자는 자기가 여자일 수 있고 또한 그녀가 자기일 수 있음을 알았다. 바다 그 끝에 봄이 오고 있음도 보았다. 남자는 늘 그녀 속에 살아있을 것이고, 그녀 역시 자기 안에 살아있을 것이라는 황홀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것만이 간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고 우리다울 수 있을 것이라는 나름의 해석까지 덧붙였다. 남자는 종일 환영에 휩싸였고 최면에 걸린 듯 중얼거렸다. ‘내가 그녀이다. 내가 그녀이고, 그녀가 나이다.’ 그 즈음 남자는 여자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메일을 통해서 남자는 자기가 느끼는 그러한 기분을 그녀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루 전 일에 대해 아직은 심사숙고할 만한 시간은 없었지만 언뜻언뜻 생각나는 일은 부끄러움이었다. 메일을 통해 여자는 독백하듯이 중얼거렸다.
-하루를 무슨 정신으로 보냈는지 모릅니다. 당신의 따뜻한 체온. 그리고 그 아릿한 여운. 어렴풋이 연결되는 순간순간의 장면들이 떨림으로 다가옵니다. 오늘은 차마 당신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 술을 마시고 당신 앞에서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도 답이 구해지지 않습니다. ‘혹여 실수 한 것 없나요?’ 라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데 부끄러워 물을 수도 없습니다. 절대로 교감선생님 앞에 추한 모습은 싫었답니다. 언제나 우아함과 완벽함으로 서고 싶었습니다. 그게 미양이가 당신 앞에 존재할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는데... 이제 호흡을 가다듬어 미몽 속을 헤쳐 봅니다. 문득 교감선생님과 함께 찾은 접점이 불안으로 다가옵니다. 당신이 언제부터 제 마음에 이렇게 큰 부분에 자리 잡고 있었는지 놀랍습니다. 그냥 옆에서 지켜보는 행복을 택하고 싶습니다. 존경의 대상으로 당신을 세워 놓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을 제대로 사랑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이 당신이 많이 밝아지셨다고 하네요. 그렇게 누군가 당신을 좋게 이야기 하는 것만 들어도 제가 왜 행복해지는지 그 이유를 당신은 아세요?-
메일을 통해 여자는 자신의 내면에 감추어진 은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그 속에서 여자는 당신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었다. 남자도 그것이 싫지 않았다. 그건 충분히 상대방을 받아들인다는 말일 테니까.
여자는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을 접점이라는 멋진 말로 표현하기까지 했다. 그 까만 밤이 지난 후 남자에게도 오직 그 여자 한 사람만이 가슴 한 가운데에 크게 자리하고 있는 듯 했다. 남자는 오래된 드라마의 명대사 하나를 기억해냈다.
-내 안에 너 있다.
처음엔 가슴에 손을 얹고 하던 그 대사가 전엔 참으로 천박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대사가 참으로 큰 마력을 지니고 있는 듯 새삼스레 다가왔다. 마치 구름 위를 나는 듯 했다.
-그게 꿈이 아니라면 말이지요. 정녕 산다는 건 참으로 멋진 일이군요.
남자는 여자에게 메일을 통해 그렇게 엉뚱한 실토를 하고 말았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남자의 솔직함에 여자는 감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에게 그렇게 매력 있게 글을 쓰면 어떻게 하느냐고 투정을 부렸다. 황홀하고 행복해서 숨을 쉴 수가 없다고 했다.
누군가를 안다는 건 그냥 일상생활의 스침일 것이다 . 스침이 켜켜이 쌓여 비로소 서로가 가깝게 되는 것이다 . 가깝다는 것은 서로의 시선이 잠시 머물 수 있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상대방의 행동을 조금씩 더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점차 상대방에게 시선이 더 오래 머물게 되고 마침내 상대방에게 강하게 이끌리면 그게 곧 사랑이리라 . 그런 점에서 보면 사랑에 눈이 멀었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오히려 그것은 서로에 대한 눈뜸이다그러므로 눈뜸은 말 못할 행복이다 .
눈뜸은 가슴 속에 활화산 하나를 지피는 것이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에 대해 눈뜸의 기쁨을 얻을 수 있음에 감격해 했다. 그러다 갑자기 남자는 언젠가부터 하늘이 투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눈뜸은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한다. 그러나 여자는 한편으로 스스로의 돌발적인 행위로 인해 빚어진 갑작스러운 일상의 변화에 당혹해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자는 메일을 통해 그런 여자를 토닥여 주었다. 새로움이 가득하다면 그것으로 즐거움인 것을. 그건 이기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탓에 거기에 또 얼마를 받아들이고 얼마를 물러서야 하는지 망설일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함에도 여자는 이성과 감성이 서로 다르게 표출됨에 몸을 떨고 있었다. 가슴이 이성과 싸움을 벌이다가도 그냥 무뎌지고 만다고 했다. 여자의 까만 눈동자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들을 싣고 남자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남자는 적절한 말을 찾지 못했다. 다만 그러다가 그로인해 가슴이 아리면, 그 조차 상체기로 남으면 어쩌나 싶다는 말을 겨우 우물거렸다.
-숨이 멎을 듯 가슴 깊이 그대를 생각하고 또한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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