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지도 않은 시간의 숲에서 길을 잃었지.
길을 잃은 자들에게 숲은 어디에서든 무서운 것만 튀어나오는데 그런 곳에서 세이렌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를 따라갔지. 낯익어 반갑지만 가까이 가기 싫음에도 내 발길은 목소리를 따라 같이 걸었지. 나를 위로하는 목소리는 내 안에 불안이라는 이름의 아이를 잉태시키고 말았지만 진창에 빠졌을 때에서야 불안은 기어이 만월을 채우지 못하고 튀어나왔고 목소리는 힐난하며 도처에 숨어 있지. 숲은 여전히 미로. 어디로 가야 할지, 어느 곳이 어느 곳인지도 모르는데 어디는 과연 어디인지.
쉬고 싶다.
질척이는 진흙탕이라 해도 아무 생각 없이 누워 쉬고 싶다.
비가 내려 눈가를 막아도 숲길 어디에나 있는 풀들이나 낙엽이 되어 쉬고 싶다.
어쩌면 그들도 나와 같이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여보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있을지도 모른다.
무지개 너머에는 무지개 너머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지.
너는 움직일 수 없고 나는 움직일 수 있고.
너는 움직이면 죽고 나는 움직이지 않으면 죽지
세이렌의 목소리는 여전히 남아 있으나 천천히 지워질 테고 나는 여전히처럼 계속 걷겠지.
진흙이든 뻘이든 허공이든 걸어야 하니 걷고, 걷다 보면 무엇이 나타날까
무엇이 나타나든 걸어야 내 길의 끝을 보겠지
내 길의 끝이 어떻다 한들 지금이 끝과 같을지 아닐지
두렵다. 두렵다고 말한 적이 내게 있었는가.
한 목숨과 두 목숨의 차이가 나를 비겁하게 하는가
두 목숨이라는 이유로 나를 내가 비겁하게 하는가
모험이란 자신에게 한해서만 허락될 뿐
타인의 목숨까지 담보로 하는 모험은 모험이 아닌 이기
스스로를 이타적이라 생각하며 모험을 하지 않으려는,
낯선 길로의 여행을 망설이고 있는 나는 이제 신발을 갈아 신어야 할 때
어떤 신발을 신을지는 내가 결정하나니
부디 질기고 편하고 아름답고 오래토록 함께 할 새신을, 시간을
언젠가 다시 마주하게 되면 그때는 평온의 바다 위에서
이때의 자신에게 한없는 존경을 표하리라
버티며 쉬지 않고 걸어준 자신에게 사랑과 감사를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