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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 이래로, 망국의 치욕으로, 북송(北宋) 같은 경우가 없었다
1125년 겨울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하고 대거 남하, 닥돌한다. 수도인 변경이 공략 당하자, 송나라 황제 휘종은 한편으론 조서를 내려 각지에 구원군을 요청하고, 한편으론 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니 즉, 흠종이다. 그리고 자신은 간신들의 호위를 받으며 장강 남쪽으로 토낀다.
제위를 물려받은 흠종은 항전파 이강을 기용하여 전투에 나서 저항했고, 결국 황금 백은 소와 말 비단 등과 태원 중산 하간 세 곳 땅 할양으로 강화를 맺는다.
금병이 물러가자 휘종 일행은 조용히 수도로 돌아왔다. 그리곤 항전파를 축출하고 태상황의 썩어빠진 궁정 생활을 보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불과 반 년 남짓 후 금병이 또 쳐들어왔다. 휘종과 흠종, 부패하고 무능한 두 황제는 묻지마 항복한다.
1126년 12월, 흠종은 친히 금나라 군사 진영으로 찾아가 항복을 요청하는 동시에 칭신청죄(신하로 칭하고 죄를 청함)한다. 또한 하남 하북 두 커다란 지역을 바친다. 금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금괴 1000만정 은괴 2000만정 비단1000만 필을 더 요구했다.
천문학적 액수의 전쟁배상금 요구는 송의 속사정을 훤히 꿴 상태에서 나온 하나의 술책이었다. 그들이 의도한 바는 바로 송의 부녀자였다. 그들은 이렇게 요구했다. “금 얼마 은 얼마...열흘 안에 수레로 보내라. 만일 부족하면, 공주 또는 왕비(황제의 며느리) 1인=금 천, 옹주 1인=금 오백,... 종실부인=얼마, 족실부인=얼마,...단, 금나라 사령부가 골라서 받는다, 이 말은 너무 박색은 퇴짜란 소리.
요구액 금 100만정, 황제의 딸과 며느리의 값어치가 금 1000정 :1000x1000=100만. 황제의 딸과 며느리가 1000명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된다.
흠종은 견디지 못하고 황실 여인네들, 자기 딸들 포함하여 모두 금나라에 팔기로 동의한다.
비빈 83人, 황제의 며느리 24人 ,공주와 옹주 22人, 후비 3000여人, 종실남녀 4000여人, 황제의 인척 5000여人, 각종기술자 3000여人, 관기 3000여人, 민간 미녀 3000여人, 각급 대신과 종실의 가족 수천 명이었다. 마치 새둥지를 탈탈 털은 격이었다.
1127년 4월 초, 세찬 바람에 돌멩이가 나는 삭풍 속에 금나라 군사는 휘,흠 두 황제와 왕비 태자 부마 공주 기타 포로들을 일곱 무리로 나누어 압송하여 변경을 떠난다. 포로 중에는 훗날의 매국노 진회 및 훗날 남송 황제가 되는 조구의 생모와 왕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궁은 비고, 북송은 멸망했다. 이로써 두 황제는 온 하루를 눈물로 얼굴을 씻는, 남은 반생 포로 생활을 시작한다. 이 치욕을, 흠종의 연호인 정강을 빌어 정강의 치욕이라 한다.
여자포로가 11635명으로서, 그중 공주가 21人이다. 휘종의 딸은 모두 26人인데, 요절한 4人 및 생사 불명 1人, 그 나머지 21人이 일망타진된 셈이다. 여자 포로들은 도중에 부지기수로 죽는다.
2월 20일에 모모 왕의 부인이 어디에서 자살, 2월 24일 모 공주(16세)가 병으로 사망, 2월 25일 모 공주(16살) 어디에서 돌아가심, 2월 28일 모 공주(16살) 같은 곳에서 돌아가심.
2월 29일 모모 두 비와 두 공주가 말에서 떨어져 낙태하여 더 이상 이동 불가능. 강간당하여 임신한 것이다.
3월 4일 황하를 건널 때, 금나라 모모 대왕이, 임신한 모 공주와 모 공주가 말을 같이 탄 모양을 보고선, 모를 죽이고 시체는 황하에 버리고 모는 데리고 갔다. 이 모 대왕은 훗날 남송 황제가 되는 조구의 처 형비도 강간하였다. 형비는 하남 어디어디에서 자살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죽지 못했다.
일곱 무리 중 한 무리에 부녀자 3400여人이 3월 27일 출발하여 4월 27일 북경에 도착, 살아남은 부녀는 1900여人이었다. 한 달 만에 거의 반이 죽었다. 죽지 않은 건 행운이라 하겠으나, 그들에게 남겨진 운명은 비극을 면할 길 없었다.
휘종은 도교를 숭상하여 도교 사원을 크게 지었으며, ‘도군황제’로 자칭했다, 또한 토목 사업을 크게 일으켜 화양궁을 지었으며, 강남의 진귀한 꽃과 기이한 돌을 수탈하였으며, 궁에서 사치와 호화에 도취, 주지육림에 빠져 지냈다. 그리하여 충신은 떨어져나가고 간신만 득실거렸다.
그해 5월에 연산(베이징)에 당도하여 시들어 떨어진 살구꽃을 보고, 자기 신세를 떠올리며 한 수의 사(詞)「연산정燕山停」을 지었다. 그는 이 사에서 비바람에 시든 살구꽃을 들어, 허리 째 꺾여버린 자신의 운명에 비유, 이를 빌어 맘속 무한한 애수를 토로하였다.
휘종의 아들 흠종 일행은 휘종 일행과는 따로였다. 출발할 때 금나라 군사는 흠종으로 하여금 검은 옷으로 갈아입게 하고 머리엔 삿갓을 쓰게 하고, 검은 말에 태워 전담 병사로 하여금 압송케 하였다. 가는 길에 흠종은 시시때때 하늘을 우러러 곡을 함에, 그때마다 금병은 크게 질책하며 제지하였다. 흠종은 곡소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해 9월 중순에 금나라 조정은 두 황제를 멀리 내몽골로 옮겼다. 북녘의 찬바람이 이따금 불어오던 날, 참혹한 눈물을 날리며 종실 일행과 이별한 두 황제와 황실 일행은 거의 천리 길을 가서 시월 중순에 내몽골에 도착한다. 그곳은 매우 황량하고 소슬하여 모든 것이 연산보다 못했다.
1128년 3월, 두 황제 및 그 수행원들은 통새주로 옮겨졌고, 각각 1500경(여의도 면적의 약 12배)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밭을 갈고 개간하고 파종하는 등, 자급자족하라는 뜻이었다. 궁중에서 존귀한 몸으로 떵떵거리던 생활에 익숙한 휘종은, 콩과 보리 분간조차 못 할 정도, 어떻게 이러한 거친 농사를 해낼 수 있단 말인가! 자연히 지난 추억이 생각났고, 시「안아미眼兒媚 beautiful eyes)」를 지었다.
제왕가는 만리나 멀어졌구나
단청이 아롱진 전각들에서는
아침에는 삼현륙각 요란했고
저녁에는 생황과 비파소리 흥겨웠네
꽃 같던 도읍은 주인 없어 쓸쓸하고
춘몽에 오랑캐 땅의 모래바람만 감도네
고향산천은 어디메뇨?
오랑캐 피리소리 듣노라니
매화가 속절없이 지는구나
이에 흠종은 눈물을 비 오듯 쏟으며 다음과 같이 답시를 짓는다.
왕업이 3백년 전해온 도읍이었고
인효가 넘친 명문대가였소이다
어느 아침 간사한 무리가 일어나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번져졌는데
비파소리 듣고 계시다니요?
눈앞의 이 광경 소슬하기 그지없고
오랑캐땅의 모래바람만 감도는군요
집과 고국에서 만리나 떨어진
외톨이 두 부자는
새벽서리 맞은 꽃과 같사옵니다
오랑캐 땅 모래바람과 비파 소리 뒤얽힌 중에, 옛 번성했던 시절을 추억하니, 이러한 슬픈 신음소리를 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8월 하순에 두 황제 일행 1300여 人은 멀리 흑룡강으로 또 옮겨졌고, 금나라 사람들은 포로봉헌의식을 거행한다. 휘종과 태후 및 흠종과 황후, 종실, 여러 왕들, 부마, 공주들은 죄다 머리는 두건으로 동여매고, 피가 뚝뚝 흐르는 양가죽을, 웃통을 벗은 맨살에 걸쳐야 했다.
부자는 이 차림으로 한 발자국에 한 번씩 머리를 땅에 박는 절을 하면서 아구타의 릉을 세 바퀴나 돈다. 흠종의 아내인 주황후는 이런 희대의 치욕을 참지 못 하고 그날 밤 목을 맸고, 다행히 발견되어 깨어났으나, 이번엔 물에 몸을 던져 기어코 죽었다.
다음날 금태종은 휘종을 혼덕공(덕이 혼미한 이)으로, 흠종을 중혼후(아주 혼미한 이)로 봉하였다.
5월 23일 조구(남송 고종)의 생모인 위후와 아내 형비 등 일행은 금나라 상경에 도착하였다. 금황제는 이들을 접견한 후, 위후 형비 공주 모모 등등을 ‘옷 빠는 곳(세의원)’으로 배치했다. 이 ‘세의원’이란 곳은 단순히 옷 빠는 곳이 아니라 군영 내의 기루였다. 현대식으로 말해서 종군위안부가 된다.
위후 등 18명의 귀부인이 먼저 들어갔다. 세의원은 북적거렸다. 훗날 명나라 사람이 남긴 책「신음 소리」에는 이렇게 기재되어 있다. ‘비빈 왕비 공주 종실부녀는 예외 없이 상체(일부)를 노출시키고 양가죽을 걸쳤다.’ 그 차림은 여진족 부녀들 차림이라 한다. 또 누군가 수치를 참지 못하고 자살을 기도했다... 이들은 세의원에서 10년 안팎 세월을 보낸다. 이후 각자의 운명으로, 갈 길을 밟아갔다.
세월이 지나 1141년, 남송 황제 고종은 아버지 휘종과 어머니 정태후, 처 형씨의 유골과 생모 위현비의 귀환을 조건으로, 금나라와 협상을 타결하였다. 이리하여 금나라는 다음해 4월, 휘종 및 정태후 그리고 형비의 유해가 든 관, 그리고 살아 있는 위현비를 송으로 돌려보냈다. 위현비는 향년 80에 생을 마쳤다.
흠종의 동생 남송 황제 고종은, 애초 흠종을 영접할 생각이 없었기에 금나라와 협상에서 말도 꺼내지 않는다. 흠종은 절망에 빠져 한스럽게 생을 마쳤으니 향년 51세였다.
원래 금나라 군사가 변경을 공략할 때, 궁을 이 잡듯이 뒤져 조씨 송나라 황실 사람들을 생포했다. 휘종의 형과 동생 또한 행운은 없었다. 휘종의 32명 아들과 22명 딸들은 나중의 남송 황제 조구 및 한 살짜리 딸아이 하나 외에는, 죄다 일망타진 당했다. 옛 사람이 이에 탄식하며 말했다 : “먼 옛날 이래로, 망국의 치욕으로, 조씨 송나라 같은 경우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