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와 정유미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가 개봉했다.
최고의 배우들 중 하나인 그 배우들의 영화지만 엄청난 관심, 아니 논쟁이 일어났다.
지금 대한민국은 전쟁중이다.
남자와 여자라는 두 성별간의 갈등이 극대화되어 일어난 이 전쟁은 날이 갈수록 더 심화되고만 있다.
이 논란은 '캡틴 마블', '걸캅스'를 지나 '82년생 김지영'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을 영화화 시킨 작품이다.
원작 소설 안에도 작가가 한국 사회에 뿌리깊게 박혀있다고 생각한 남녀 차별에 대한 내용들이 가득 들어있고, 많은 여성들이 그것들에 동감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렇기에 이 소설의 영화화는 기념비적일 수 밖에 없다.
수많은 여자들의 마음을 대변해준 영화이기 떄문이다.
여기까지 읽고 왜 모든 '여자'에게 페미를 바르냐고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틀린 말이다.
'페미니스트'가 아닌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면 흉자일뿐이다.
타인에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을 '여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녀'들은 그렇게 말하더라.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많이 울었다.
고요한 바닷가에서 산책을 하다 만난 강한 파도였다.
찝질한 바닷물이 내가 신고있는 꾸밈 노동의 증거인 구두가 신겨진 발을 적셨고, 그 바닷물이 빠져나간 곳에는 물기가 남아있었다.
그 이후로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구두 안에 든 물 때문에 질척거리는 걸음을 걷게되었다.
나에게 하나의 흔적을 남겼고, 이 영화를 보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아주 예쁜 구두를 신고 있었다.
대게 가죽은 바닷물이 닿으면 망가진다.
즉, 이 개같은 쓰레기 같은 영화가 내 신발을 망쳤다.
어쨌든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울긴 했다.
정말로 안쓰러움에서 나오는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자신이 없으면 이런 영화에 자신을 동일시할까?
자기애를 가지지 못한 그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드리기는 두렵기에 그것을 타인에 대한 증오로 돌린 그들이 불쌍했다.
나는 성소수자, 아니 그냥 레즈비언이다.
사실 내가 레즈비언이라서 여자를 좋아하는게 아닌 여자를 좋아해서 레즈비언이기에 "나 레즈에요! 성소수자! 사랑받아야 하죠"라고 말하는 것이 멍청하게 보기긴 하지만 주변에서 프라이드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라고 하니까 그렇게 해야겠다.
어느 정도 앞뒤를 바꾸는 것은 지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까하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멋진 도치법이었구나 싶다.
어쨌든 나는 레즈비언이고 더하여 성폭행 피해자다.
그날 이후로 정말로 지랄맞은 시간들을 보내왔고, 아직도 식사를 마치고 나서와 자기 전에는 약을 털어 넣는다.
어떤 사고를 당했을 때 그 사고의 순간보다는 그 이후 몸을 회복하는데에 더 큰 고통과 시간이 따른다.
더하여 이젠 임신이 불가능한 몸이 되었고.
그래도 이젠 일상이 되었기에 이 사실이 날 우울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타인과의 고통의 비교는 어리석은 일이지만 나는 그들이 겪은 고통이 얼마나 그들을 불행하게 하는지를 생각할 때 고작?이라고 생각을 하곤 한다.
물론 나쁜 버릇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버틸수는 있는 고통처럼 보인다는건 사실이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즉, 내가 이 영화를 보며 느낀 감정은 세상에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많다는 것에 대한 슬픔이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에 서툰 사람은 그 사랑을 다른 곳에서 찾는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사랑을 받아 받아야하는 사랑을 만끽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노력이 부족한 게으른 사람들은 관심이 사랑이라고 착각하며 산다.
그들의 관심 안에 안쓰러움과 불쌍함을 지나 어쩌면 혐오감이 담겨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거나 모르는 척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내 생각은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무엇도 가질 자격이 없다.
노력은 자격을 잉태한다.
비록 그들 중 대부분은 계속 그렇게 살아갈 걸 알지만 나는 부디 그 사람들이 이런 영화에 자신을 걸지 않기를 바란다.
평점: ★☆
배우는 좋았다. 물론 이 영화를 찍기 전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