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성장하면서, 이런저런 연유로 대표이사 가족 중 누군가가 입사하는 건 흔한 일이야. 후계 수업받아야 할 자식은 당연하고 가족, 친지들의 부탁으로 누군가는 현장에, 영업에, 총무팀에 스며들지.
대표님께는 골칫거리 막내가 한 명 있었어. 사고뭉치였지. 비교적 잘 자란 다른 이들과는 달리 4형제 중 막내인 김 상무는 늘 부모님 속 썩이는 자식이었어. 어디 한군데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던 그는, 여러 곳을 전전하다 부장직급으로 우리 회사에 입사했고 능력 있는 형님 덕에 이 년여 만에 상무이사로 진급했었어. 아무런 권한 없는 부본부장 직, 나의 직속 상관으로 말이야.
그런 상팔자도 없었어. 일주일에 한두 번은 영업 핑계로 골프를 다녔고 하루 왼 종일 빈둥거리다 형식적인 결제 하고는 오후 서너 시쯤 퇴근하는 게 다반사였지. 난 그러는 게 편했어. 괜히 밥값 한답시고, 어처구니없는 참견에, 얼토당토않은 얘기 듣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누구나 한가지 ‘재주’는 있는 법, 그의 바람기는 타고 났었어. 한번은 술자리서 그러는 거야. 클럽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10여초 정도만 지긋이 바라보면 된데, 그러면 어느새 자기 옆자리에 와 앉아 있다는 거지. 잘하는 거라고야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는 거밖에 없으면서 말이지.
그에겐 대단한 아내, 우리 업계에 전설이 된 일화가 있는데 한번 들어봐.
한때 나이 든 철강영업자들 사이에 춤바람 휩쓴 적이 있었어. 다들 사교댄스에 미쳤을 때지. 여인네 꼬시기에는 그만한 게 없었거든, 천하의 바람둥이 김 상무가 어디 춤만 추려 갔겠어. 남편의 바람기를 눈치챈 김 상무 아내는 심부름센터 직원에게 남편 미행시켰고 얼마 후, 남편이 잘 가는, 그러니 하루가 멀다 출근하는 댄스클럽을 알게되자 아직은 어렸던, 늦둥이 아이 손 꼭 잡고 댄스클럽 앞에서 기다렸다고 해, 신랑이 나올 때까지 말이야. 퍼질 게 놀다 나오던 김 상무와 일행들. 각자 댄스클럽에서 만난 여인네들과 팔짱낀 체 나오다 클럽 입구서 노려보는 한 여인과 아이를 보고선 기겁했다지.
생각해봐, 이 천하의 난봉꾼들, 중년들이 가는 댄스클럽에서 모르는 여인을 만났고 부킹에 성공, 설레는 맘으로 2차 소주집을 향하던 그들이 클럽 입구서 봤을 장면을, 누구에겐 재수 씨고 또 다른 이에겐 형수이기도 했던 한 여인이 귀신처럼 머리를 풀어헤친 체 서 있는 모습을 말이야. 그것도 어린아이 손 꼭 잡은 체...
가방 싸 친정 가려는 아내에게 두 손 다 달을 듯 싹싹 빌었데. 한 번만 용서해주라. 친구 따라 강남 한 번 가 본 거다. 그러면서 하는 뻔한 말,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 한바탕 난리를 치른 당시 부장이었던 김 상무는 몇 달간 조신한 척 지냈지.
그러기도 잠깐, 김 상무의 바람기는 시간이 갈수록 그러니 나이가 들수록 완숙의 경지에 다 달았어. 한번은 말이야, 퇴근길에 전화가 왔어. 소주 먹고 있는데 의논할 게 있으니 자기 집 근처 횟집으로 오라더군. 팔자 좋다 여기며 갔지. 내가 놀랐던 건, 아니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건, 집 근처 횟집에서 다른 여인네를 만나고 있을 줄이야, 그것도 단둘이서... 겁이 없는 건지, 철이 없는 건지.
“나 어쩌면 좋냐?”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척 봐도 품위 있어 보이는 여인이 잠시 화장실 간 사이 김 상무가 날 보며 하는 말이었어. 뭘 어쩌긴 어째? 분위기 좋구만.
“시절 좋습니다. 누구는 회사서 뺑이 치고...”
따라 준 소주를 마시며 빈정 투로 얘기했지.
“오늘 아버지 날이라고 상*이 학교 갔는데, 아 글쎄...”
얘기 듣고는 기가 찼지. 잠시 자리를 비운 여인이 아 글쎄, 늦둥이 담임 선생님이라는 거야. 6학년을 대상으로 한 40분짜리 수업 후,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는 나오려는데 자신도 모르게 말이 툭 튀어나오더래. 고생 많으시다.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시간이 되시느냐...
하~ 말이 돼? 말이 되냐고? 자식 일로 학교 가서는, 애가 사고 쳐 간 것도 아닌데, 뭔 의논할 거리가 있다고. 덜컥 수락한 담임은 또 뭐고?
“뭐하러 오라했습니까? 상*이 얘기하며 두 분이서 드시면 될 것을...”
한심하다는 듯 물었지.
“이상하게 생각지는 말고, 그냥 상*이 이쁘게 봐주시는 선생님께 식사 한 번 대접하는 거야.”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이 사람아...
“아니 그러니까, 나를 왜 불렀냐고요. 진짜...”
둘의 대화는 선생님이 자리로 돌아오자 끊어졌고 난 소주 몇 잔 더 비우고는 먼저 나왔어. 기분 나빴거던. 날 부른 이유는 다른 거 없었어. 아무래도 신경 쓰였겠지. 집 근처 식당이니 누가 볼 수도 있는 거고. 몇 달 전 그 난리를 치렀는데 아내가 알게되면 이거 뭐...
이후로도 이 천하의 바람둥이는 다양한 여인들을 만났고 자랑이나 하려는 듯 술자리에 나를 부르곤 했었어. 적당히 하시라, 길면 잡힌다 핀잔 섞인 충고를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지.
그렇게 세월은 흘러, 하늘이 무심치 않아 대형사고가 제대로 터졌었지. 노발대발한 대표님은 직원들 보는 데서도 쌍욕 섞어 동생을 나무랬어. 당장 자리 빼라면서 말이야. 동생이자 상무이사에게 지급되던 법인카드, 당근 회수되었고.
아 글쎄, 이 바람둥이가 애인이 있는, 그러니 Two timing하는 여자를 만났고 질투를 느낀, 그 역시, 불륜인 남정네는 어떻게 안 건지 김 상무 아내를 만나 꼬지런 거였어. 당신 남편 바람피운다고 말이야.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 불륜인 남자가 질투가 나 또다른 불륜인 남자의 아내를 만난다? 고자질한다? 이게 말이 돼?
뚜껑 열린 김 상무 아내는 이젠 결판내겠다며 차를 몰고 회사로 달렸고 하필이면 교통사고가 났고,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처가에까지 알려지게 되었지.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김 상무는 병원으로 달려갔고 아내에게, 장인, 장모에게 무릎 꿇고 빌었데. 실수였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바람 난 사위 덕택(?)에 애지중지 키운 딸이 교통사고로 병원 입원까지 하게 되자 화가 머리끝까지 솟은 장인어른, 이 새끼 어떻게 갈아 마셔 버릴까 했는데 막상 사위란 놈이 허급지급 달려와 땀 빨빨 흘리며 무릎까지 꿇고 사정하니 뭐 어쩌겠어? 쇼인지 진심인지 알 길 없는 장인은 사위가 하도 머리조아려 빌어대니 나중에 딸보고 그러셨데 '니가 이해해라, 남자가 큰 일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큰일은 개뿔.
그런 사람이었어, 김 상무란 사람은. 자신의 바람기를 주체할 수 없는. 사장님 입장도 난처했었지. 소문은 이런저런 그럴듯한 사연이 더해져 날개를 달아 온 철강업체에 번지는 바람에 한동안 얼굴 들고 다니질 못하셨지.
뭐 그래도 김 상무는 꿋꿋했어. 며칠간 죽을 상 되어 지내다가는 시간 흐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천연득스레 회사를 다녔지. 형님에게 면목 없어진 그는 밥값하느라 댄스클럽 동창생이자 친구 회사에 대책 없이 물건 줬다 몇천만원 떼이기도 하고 되돌려 받은 법인카드로 카드깡하다 들켜 형님이 던진 재떨이에 대글빡 맞아 디질 뻔 했지만 뭐 그때 뿐이었어. 시간 지나면 싱긋이 웃으며 나타나곤 했으니까.
대표님 모친상이 난 날, 전 영업부서는 바쁘게 움직였어. 슬픔은 가족 몫, 우린 대단한 손님들을 맞아야 했으니까. VIP급 조문객들은 본부장급이, 거래처 대표들은 팀장급이 장례식장 현관 입구서부터 도열 해 있다 안내했고 말단 직원들은 잔일을 도맡았었지. 엄청난 장례식이었어. 시장서부터 지역 유력 정치인들까지 드나들었으니까. 알만한 기업체 회장은 말할 것도 없고.
3일간의 장례식을 끝내고 가족 묘지에 도착한 아침, 양지바른 곳 고인이 쉴 터는 깊게 파져있었고, 옆 넓은 터에는 뒤늦은 조문객과 장지까지 따라 온 가족, 친지들을 위해 커다란 천막이 처져 있었지. 커다란 가마솥에는 육개장이 펄펄 끓고 있었고.
이젠 고인을 보내야 할 시간, 지관인 노인의 지시에 따라 무덤 속으로 관이 향할 때였어. 갑자기 흐느끼는 소리가 나더니 점점 커지는 거라, 퍽퍽 가슴 때리는 소리, ‘엄마’ ‘엄마’ ‘엄마~' 울며 부르짖는 소리, 김 상무였지.
팔순 지나 어쩌면 천명을 다하신 분, 병원 한 번 가 본 적 없이 편히 주무시다 생을 마감하신 분 그래서인지 장례식 내내 장성한 상주들은 슬픈 기색 한 번 낸 적이 없었지. 김 상무는 장례기간 내내 제 세상이나 만난 양, 문상객 접대 핑계 삼아 왁자지끌 떠들석하게 술을 퍼마셔 댔고. 난 그 모습 보며 혀를 끌끌 찼었고.
그런 장례식이었는데, 지금 이 낯선 광경은 뭐지? 순간 그런 생각이 드는거라. 그만했으면 될 법도 한데 김 상무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지. 자식들이 고인의 관에 흙을 덮을 시간, 맏이인 큰 형이 옆에 마련해 놓은 부드러운 흙을 한 삽 뜨자 김 상무는 급기야 바닥에 퍼질고 앉아 울어대기 시작했어. 꼭 아이가 엄마에게 떼쓰듯 말이야.
아, 순간 나도 눈물이 핑 돌았어. 나도 그랬었거던. 나도 막내였거던. 막내가 더 서러운 건 형제자매 중 부모님과 산 세월이 가장 짧아서라지.
‘엄마,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죽일 놈입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김 상무는 처절하게 울었어. 퍽퍽 가슴을 때리며 말이야. 가족들 모두 자신을 개망나니 취급할 때 넉넉하게 품어 준 사람, 끝까지 자기편이 되어 준 유일한 사람,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개쓰레기 취급해도 끝까지 염려하고 귀히 여겨 준 사람, 못난 자식놈 바람피다 들킬 때마다, 이제는 더이상 못살겠노라 하소연하는 며느리를 다독여 준 사람, 하여 가정을 건사하게 해 준 사람. 그랬던 사람, 유일하게 의지했던 어머님과 이제 영영 이별해야 할 시간이 되자 참고 참았던 울음이 터진 거였지. 어쩌면 장례식장 내내 잘하지도 못하는 술을 퍼마신 것도 그러다 문상객이야 어떻든 말든 골아떨어져 아무렇게나 퍼질러 잔 것도 믿고 의지했던 어머님과의 이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인지도 모를 일이지.
영업하는 사람, 다양한 군상들을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어. 혼란스러울 때가 많아.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목격할 때지. 평소 얍삽하다고 여겼던 이가 추운 겨울 자신의 목도리를 벗어 지하철 구석 차가운 바닥에 앉은 노숙인에게 건내는 장면을 볼 때, 직원들에겐 자린고비 소릴 듣는 사람, 찔러 피 한방울 나지 않을 것같은 사람이 남모르게 아동 복지시설에 적지 않은 금액을 꼬박꼬박 기부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가 그런 경우지.
자신의 실수를 아래 직원 탓으로 돌리는 사람 그래서 미웠고 다투기도 했던 사람, 회사에 눈꼽만큼도 도움 주지 못하면서 잘 난 형님 덕에 호위호식한다 여겼던 사람, 그래서 언젠가는 대표님께 말하리라. 저 사람 내치지 않으면 내가 관두겠다. 하지만 돌아보면 잘 못한 것도 없으면서 헹여 괜한 야단 맞을까 대표님이 출근할 때마다 좌불안석이던 사람이었고 순진한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아내에게 혼난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던 사람이었고 결과적으로야 돈을 떼였지만 어떡해서든 회사에 도움을 줘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려 발버둥쳤던... 그런 사람이었지. 김 상무란 사람은 말이야.
막내의 서러운 울음은 바로 위 형에게로 또 그 위 형에게로 또 장지까지 찾은 생면부지 사람에게까지 전해졌지. 어쩌면 나를 포함한 그기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한동안 잊고 있었던, 각자의 삶 속에서 애써 참고자 했던 눈물이란 걸 보게 된 건지도 몰라. 그러지 않았다면 호상이라 여겼던 자식들, 내내 태연했던 형제들이 오열하지 않았을 테고, 어떤 이는 손수건을 입에 댄 체, 또 어떤 이는 뒤돌아서 오랫동안 눈시울 적시지는 않았을 테지.
어머님 여의고 오랜기간 동안 김 상무는 말이 없었지, 전매특허인 천진한 웃음도 짓질 않았고. 내가 퇴사하고 얼마 있지 않아 김 상무도 회사를 접었어. 지금은 아내와 조그만 화장품 가게를 하고 있는데 그럭저럭 살만한가봐. 혹 한 번씩 만나면 전혀 딴사람처럼 행동 해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지. 그럴때마다 난 농을 던져. '이쁜 언니 한 명 알고 있는데 소개시켜 줄까요?'하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