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추운 겨울, 광주 거래처 일 마치고는 전북 정읍으로 차를 몰았어. 사업 실패로 있는 돈, 없는 돈, 다 말아 먹고 낙향한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지.
대학 시절, 나도 그 친구도, 소위 말하는 ‘운동권’이었어. 차이가 있다면 나는 입학하자마자 데모하러 다녔고 친구는 고시 준비하다 2학년 겨울이 돼서야 학생운동에 입문한, 말하자면 늦깍이 운동권이었어.
사실 난 덩치만 컸지 겁이 많았어. 또 평생 사회운동하며 살 자신도 없었고. 근데 친구는 달랐어. 무서운 게 말이야, 학업과 현실 참여에서 고민을 거듭한 친구는 마음이 서자 뒤돌아보지 않았어. 누구보다 열정적이었지.
종교시설 점거시위 장면이 TV를 탔고, 하필이면 뉴스를 보던 형님이 화면 속에서 구호를 외치는 나를 보게 되자 집안은 발칵 뒤집혔지. 가난한 시골 살림에 뼈 빠지게 일해 자식 놈 대학이란 곳을 보냈는데, 사실을 알게 된 부모님이 받은 충격은... 수많은 청춘이 거리로 뛰쳐나갔던 시절, 분위기에 휩쓸려 적당히 하겠지라 생각했던 가족들은 전면에 나서 시위 주도하는 모습에 아연실색했던 거야.
스무날 넘은 단식농성을 마치고 시골로 내려간 날 저녁, 어머님은 울면서 부탁했어. 군대를 가라. 군대 다녀와서는 니가 뭔 짓을 해도 상관치 않겠다. 거절할 수 없었어. 아니, 이를 핑계로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몰라. 그땐, 계속해야 하나, 이 일에 내 인생 전부를 걸어야 하나, 남몰래 고민했었거든. 그렇게 난 동료, 후배들을 ‘배신’하고 군엘 갔고 그 빈자리를 친구가 대신했던 거지.
암울한 시설이었어, 87년의 승리도 잠깐, 정권 유지에 위기를 느낀 군부 기득권은 어떡해서든 만회하려 발악했고 이는 공안정국으로 이어졌지. 유서 대필했다 조작하고, 쇠파이프로 시위 학생 때려 숨지게 하고... 분노한 청춘은 이에 항거, 목숨까지 걸었지.
난 다행(?)스럽게도 이 모든 상황에서 빗겨나 있었어, 군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감내했어야 할 이런저런 무게는 오롯이 친구에게 돌아갔어. 패배가 예정된 거대 권력과의 싸움, 그 한복판에서 친구는 몸부림쳤고 패배의 책임까지 감내해야 했지.
졸업하자 난 후배들 원망 아랑곳하지 않고 취업 준비를 했고 친구는 몇 년 더 학교에 머물렀어. 그러다 연인이 생겨 결혼하고 아내의 배가 불러오자 조그만 사업을 시작했어. 될 리가 있나. 실패하고 시작하고 또 실패하고... 그렇게 빈털터리가 되자 야반도주하다시피 고향으로 간 거였어. 애를 셋이나 달고 말이야.
정읍IC까지 친구는 트럭 몰고 마중 나왔지. 반가웠어. 너무 오랜만이었거던. 앞서가던 트럭이 시골 마을을 지나 농로로 진입, 좁은 시멘트 길을 달리더니 막다른 구석, 조그만 비닐하우스 앞에 차를 세웠어. 그때까지 난 뭔가 살 게 있나? 그리 생각했지.
“들어가자”
친구는 차에서 내리는 내게 말했고 무심히 따라 들었는데...
눈앞에 확 들어온 광경에 할 말을 잃었지. 씨벌~ 거기서 살고 있었던 거야. 비닐하우스에서 다섯 식구가 말이야. 한겨울, 바람 쌩쌩부는 날에 말이지. 연년생 철부지 아이들이 낯선 손님을 보며 이부자리를 밀쳤고 친구의 아내이자 나의 후배이기도 한 가시내는 부엌인 듯한 공간에서 요리하다 말고 다가와서는 ‘선배 왔냐’며 베시시 웃었지. 배가 불룩한 체 말이야.
삼겹살 냄새며 연기가 비닐하우스 안을 가득 채웠어.
“그래도 여기 살만하다, 임대아파트 신청해서 내년 6월이면 입주야, 그때까지는 여기서 지낼라고...”
내내 굳어 있는 나의 표정을 살피며 친구가 말했지.
“너거 둘이 짐승이가?”
소주 한잔 탁 털어 넣고는 친구와 후배 가시내를 번갈아 봤지. 화가 났었거든. 애 셋 만해도 버거울 터, 그기다 또 임신...
시골에 부모님이 남기신 땅이 있다며 정읍 간다 했을 때 그러려니 했어. 복잡하고 정나미 떨어지는 도시보다야 시골서의 삶이 괜찮을 수 있으니까. 어쩌면 고향에서 새로운 기회가 생겨날 수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애 셋 달고서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농지 구석 비닐하우스에서 살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어.
이리 살 줄 알았다면 선배, 동료, 후배 닥달하여 단칸방 전세금이라도 모아 전했을 터. 시골 동네 빈집이 얼마나 할라고... 근데, 남은 거라곤 자존심밖에 없는 이넘은...
소주를 얼마나 마셨는지 몰라.
아침이 밝자 눈을 떳지. 머리가 깨질 듯 아팠어, 목도 말랐고. 어떻게 잤는지 기억도 없었어. 고소한 냄새, 후배 가시내는 북어국을 끓이고 있었고 친구는 비닐하우스 밖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는 듯했어. 철부지 아이들은 그때까지 서로 뒤엉켜 자고 있었고.
밖으로 나와보니 썰매를 만들고 있더라.
“돈에 물 채우면 근사한 빙상장 될 거야, 애들 신나겠지?”
“니 탈라고 만드는 거 아니고?”
“당연히 나도 타야지, 얼마 만에 썰매 타보냐?”
친구는 아이 마냥 천진하게 웃었어. 그게 보기 좋더라. 오랜만에 봤거던, 웃는 모습을 말이야.
후배 가시내가 커피를 가져 왔고 둘은 낡아빠진 의자에 앉았지.
“일은 찾았나? 생활이 되나?”
걱정돼 물은 거지.
“고향 친구와 사업 시작하려는데...”
말꼬리를 흐렸어.
“무슨 사업? 씨발~ 또 다단계는 아니지?”
친구는 손사래 쳤어. 그리고는 얼굴 조금 찌푸리고는 나를 한번 쳐다봤어. 뭔가 할 얘기가 있는 듯했는데 쉬 말하진 않았지.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나?”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친구가 어렵게 말을 꺼내더라. 순간, 올 게 왔다 싶었지. 부탁이야 뻔한 거였으니까.
“뭔데?”
“보증 좀 서 줄 수 있나?”
“보증?”
돈 빌려달랄 거라 예상한 난 뜻밖의 얘기에 놀랐지. 고향 친구와 생활용품 대리점을 할 거다. 보증인 셋이 필요한데 동업할 친구가 두 명 구했고 자신이 한 명 세워야 한다. 너도 알다시피 미안해서 동생들에겐 부탁도 못 한다...
“알았다. 언제까지 해야는데?”
피할 수 없는 거였어. 누구나 하는 말 세 가지가 있지. 동업하지 마라. 돈거래 하지 마라, 나머지는 부사어 하나가 들어가지. 보증은 ‘절대’ 서지 마라. 사업 수완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넘,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뻔한 거짓말에도 쉬 속는 넘. 넌 사업할 놈이 아니다. 그냥 따박따박 월급 나오는데 취업해라, 차라리 노가다가 어떠냐?고 싶었지만 그리 말할 순 없었어.
2박 3일 출장, 후배가 차려 준 아침을 먹고는 충청도로 차를 몰았어. 걱정되기 시작했지. 아내에게 뭐라 말해야 하나. 보나마나 펄쩍 뛸 텐데...
두어 달 전, 어렵게 사는 후배 부탁으로 이백오십만원 짜리 정수기를 12개월 할부로 산 적이 있었어. 아내는 기가 차서 며칠간 말을 안 했지. 5년 쓰면 본전 뽑는다는 궁색한 변명에 안 들어도 될 욕까지 아내로부터 들어 쳐먹고... 더 기가 찬 건, 아 글쎄 이 후배 놈이 정수기 첫 할부도 들기 전에 회사를 관뒀다는... 시부럴~
청호나이스였어. 씨발~
그런 판에 또 보증을 선다? 차라리 정수기는 나은 경우였지, 감당할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보증은, 만약 친구가 잘 못 된다면, 또 사업이 실패한다면.., 이건 뭐 차원이 다른 거였어. 아내는 머리 싸메고 앓아 누울 게 뻔했지. 아 씨발~ 어쩌지. 걱정은 또 다른 걱정을 낳고...
출장 마치고 집에 와서도 한동안 입맛이 없었어. 괜히 아내 눈치를 살피게 되고. 말 할까? 하지 말까? 설마 또 실패할라고, 잘 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럼 괜히 말해 부스럼 만들 필요 있을까? 고민은 나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지, 알고는 있어야 나중 혹 일이 잘 못 되더라도 충격이 덜하지 않을까?
그렇게 가슴 한 가운데 묵직한 근심거리 하나를 지닌 체 며칠이 흘렀을 거야. 보증에 필요하다는 서류는 다 준비해 놓았고. 약속한 날짜는 시한폭탄 돌 듯 째깍째깍 돌았지. 지금이라도 안 된다 할까. 아내 핑계를 댈까? 반대가 심해 어쩔 수 없었노라 말할까? 책상 서랍에 둔 서류 봉투를 몇 번이나 꺼내 보았었지. 하지만 그럴 순 없었어. 무엇보다 비닐하우스에 지내는 아이들이 눈에 밟혔고, 이유야 어찌되었던 낙향하여 고향 친구와 해보려는 첫 사업인데 보증인을 세우지 못해 포기한다면 너무 비참할 것 같았지.
보증 서류와 인감도장 들고 정읍의 **은행으로 가기로 한 전날 오후,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어. 약속 시간 맞추려 전화한 거라 여겼지.
“내일 언제 가면 되는데?”
이 건으로 광주 출장까지 잡아 놓은 내가 먼저 물었지.
“안 와도 되겠다야~”(엥?)
“그기 무슨 말이고?”(우편으로 보내 달란 말인가?)
“문제가 좀 생겼다”(아~ 사업 접기로 한 건가? 제발...)
“무슨 문제?”(친구님, 제발 사업 접었다고 말해주십시오.)
“은행 직원이 안 된단다. 니는~”(엥?)
“왜 안 되는데? 내 신용 나쁘지 않은데?”(이런 재수가 있나...)
“그게 아니고, 보증인 주소지가 전라도라야 된데, 부산은 멀어서 안 된단다.”(아~ 은행 직원님 고맙습니다.)
“그런 법이 어딨노?”(그런 법이 너무 고맙습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더라. 기뻐서인지 보증을 서지 못한 아쉬움이었는진 모르겠어. 십년 먹은 체증이 내려 간 듯 후련한 기분, 그러면 친구는 어떻게 하나? 애들은? 친구와 비닐하우스에서 지내는 아이들 걱정이 동시에 들었으니까.
“웃기네 그 자슥들, 일 편하게 할라고 그러는 거 아니가? 서류까지 다 준비해 놓았는데 이기 무슨 경우고?”
난 진짜 화가 난 듯, 한동안 **은행과 보증인 policy를 입에 침 튀어가며 욕했어. 정책이 그러하다면 처음부터 말했어야지 지금 와서 안 된다면 어쩌냔 거냐. 장난치는 거냐, 한바탕 하지 그랬냐. 참지 마라...
“고맙다.”
차분한 목소리였어. 난 한동안 말하지 않았지. 얄팍한 심사, 실은 날아갈 듯 좋으면서, 짐짓 아쉬운 체하는 나를 본 거였거든.
“고맙기는~”
결국, 친구는 자신 몫의 보증인을 세우지 못해 동업자가 될 순 없었어. 대신, 판매 실적에 따라 수당을 받는 직원으로 참여했지. 생활용품 판매라더니 알고 보니 변형 다단계. 다행인 건, 세상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기 다단계는 아니었어. 제품도 괜찮았고. 큰 근심을 덜게 된 난 내 가족은 물론, 선,후배 동기 백 여명을 모아 회원으로 가입시켰지. 물론 십 몇년이 지난 지금도 치약에 화장품이며 건강식품까지 시켜 먹고 있고. 아내가 더 열성이었어. 정읍 간 얘기부터 보증인이 되지 못한 사실까지 말해 줬었거던. 아마 철렁했을 테고, 가슴 쓸어내렸겠지.
살다보면, 이런저런 부탁을 하고 또 받게되지. 이후 보증 서 달라는 부탁 받은 적은 없어. 대신 돈 빌려달라는 경우는 많았어. 거절해야지만 거절할 수 없는 경우도 생겨. 대신 천만원 빌려달라면 백만원 주고, 오백 빌려 달라면 오십 주고... 물론 돈 생기면 갚으라 하지. 거절하기 힘들 때, 내가 택하는 방법이야. 돈이 있어서도 많아서도 아니야. 어쩔 수 없는 경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도움을 주는 거지. 다른 뜻은 없어. 나도 어려울 수 있는 거고, 급전이 필요한 경우도 생길 거고. 그때 기꺼이 친구도 나를 도우리란 믿음이 있으니까.
정읍 친구는 고향서 잘 살고 있어. 부자야, 그때 임신 한 아이 낳고 이후 또 낳았거던. 일 있어 부산 오거나 내가 전주 가거나하면 꼭 하루 밤을 같이 보내. 감사한 건, 친구가 잘 살아줘서고, 그때 망설임 없이 단박에 보증을 서겠노라 한 나를 지금까지 고맙게 여긴다는 게지. 친구는 모르는 거지. 나의 속물 근성을 말이야. 그래서 더 고마운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