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장님(전편)
넓은 야드에 대형 지게차와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컨테이너 차량 들이 보였고, 굳게 닫힌 공장동 도어 사이로 빛이 새 나는 걸 봐서는 내부에서 뭔가를 작업 중인 거 같았어.
불이 훤히 켜진 경비실 창문을 두드렸지.
“회장님, 뵈러 왔는데 혹시 나오셨습니까?”
“어디서 오셨습니까? 약속은...?”
“6시 30분에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근데 그게...”
끝을 얼버무렸지. 시간은 정했지만, 오전인지 오후인지 모르겠단 말은 하지 않았어. 야간 근무로 얼굴이 핼쑥한,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경비 아저씨는 이런 상황이 처음은 아닌 듯, 정면 전체가 유리로 된 사무동을 가리키며 5층으로 가라 하셨지.
하~ 회장이란 사람은 그 시간에 출근한 거였어.
시계를 봤어. 06:10분, 약속한 시간은 20분이나 남았었지. 넓은 부지, 촘촘히 들어선 공장건물, 사무동까지는 대략 50여 미터 거리, 천천히 걸었어. 대박이다. 설마가 현실이 된 순간, 난 나의 촉에 소름이 돋았어. 짜릿한 희열을 느꼈지. 경쟁사 영업자들은 지금 세상 모른 체 디비 자고 있을 거다.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6시 30분이 오후가 아닌 06:30분 인 것을...
사무동 현관에 다다라 홀로 불이 켜진 꼭대기 층을 봤어. 담배 한 대 피우고 갈까 하다 관뒀지. 새벽 담배는 쉬 옷에 배어 고약한 냄새를 풍기거든.
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사무동 현관문을 열었지, 좌우로 늘어선 사무실은 컴컴했고 복도 등만 엘레베이트 앞까지 켜져 있었어.
땡~ 엘리베이트 문이 열리자 난 재빠르게 주위를 살폈어. 좌, 우측은 등을 켜지 않아 흐릿했고 정면 회장실 입구 쪽만 훤했지. 비서가 사용할 법한 안내데스크는 비어 있었는데, 그 옆 기다란 쇼파엔 노타이 차림에 슈트를 입은, 중년의 신사 두 분이 결재판을 무릎 위에 두고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어.
생판 모르는 사람들, 어색했지만 달리 할 게 없으니 다가가 정중히 인사를 했지. 습관적으로 명함을 건네려는데 회장실 문이 열리더니 작업복 차림의 젊은 사내가 나오더라. 굳은 표정의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이내 앉아 있던 두 사람은 명함 꺼낸 내 손이 무안하게시리 매무새를 가다듬고는 재빠르게 안으로 들어갔지.
젊은 사내는 엘리베이트로 가며 뒤를 돌아봤어. 나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데, 난 그냥 가볍게 눈인사만 했고... 그렇게 기다란 빈 쇼파에 홀로 앉아 있는데 하, 씨발~ 간간이 고함 소리도 나는 거라. 물론 귀에 익은 목소리였지. 걍~ 쇼파에 퍼질고 앉아 있던 난 회장실 안에서 고성이 나올 때마다 흠찟 놀라며 자세를 고쳐 잡곤 했어.
20분쯤 지났을까? 똥 씹은 표정으로 두 사람이 나왔고 나를 본체만체하고는 한숨을 푹푹 쉬며 엘리베이트 쪽으로 가더라. 하 씨발~. 나도 모르게 바짝 긴장되는 거야. 내가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말이지. 이거 어쩌지? 그냥 갈까? 분위기 안 좋은데?
회장실 문 앞에 선 난 노크를 할까 말까 손을 들었다 놨다 했지. 그렇게 오만가지 잡생각으로 망설이고 있는데 회장실 문이 덜컥 열리는 거라.
“박 차장 아니요? 이 시간에 웬일이요?”
“아 예~ 회장님... 그게 저~”
코앞에서 마주한 회장님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어. ‘웬일이라니?’ 6시 30분에 보자매...
“일단 들어오소”
사실대로 말했어. 메일 시간 확인한 것부터 06:30분, 18:30분도 아니라 6시 30분이어서 혹시나 하고 와봤다는 것까지. 만약 06:30분이 맞다면 내가 큰 결례를 범하는 셈인데 그럴 수는 없었노라. 단 한 번이라도 일과시간에 메일을 보내셨으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까지.
“야 이 사람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다고 내가 새벽에 귀한 사람들을 오가라 하겠소. 내가 부탁할 처진데... 하하하~”
껄껄 웃으셨지. 난 얼굴이 벌게졌는데 말이야. 후에 알게 된 건데. 이분의 라이프싸이클이나 업무스타일이 좀 독특했어. 10시 취침, 새벽 3시 기상. 그 시각에 빵 한 조각 커피 한 잔 들고 새벽 업무를 보는 거였어. 메일 확인하고 보내고... 그리고는 06시 회사 도착. 계열사(라 하기엔 조그만 공장이지만) 사장들이나 주요 간부들로부터 현황 보고 받은 후 07:30분쯤 공장 둘러보고 08:00쯤 되어 다시 회사를 나서는 거였어. 거래처와의 주요한 미팅이 있으면 직원들이 다 퇴근한 저녁 시간에 다시 들어오고. 그러니 보통의 일과시간엔 회사에 없다는 거지. 매일 그리하겠냐마는...
“견적서부터 한번 봅시다.”
“제품 설명부터 먼저 드리겠습니다.”
고급화, 내가 택한 전략이었어. 어짜피 동일 제품으로는 일군 업체와의 가격 경쟁에서 밀릴 터. 메이져 철강회사에서 생산이 까다로워 잘 취급하지 않는 고급 강종으로 밀었지. 자재 단가 후려치는 건설업체였으면 어림없었을 터. 자기 공장, 자신이 직접 짓고자 하는 사람이면 달라지는 거지, 내가 살 집이라면 값이 좀 더 들더라도 좋은 재료로 잘 짓고 싶거든.
회장님은 내가 준 브로셔와 별도로 준비한 일반 강종과 고급 칼라강판 비교표를 유심히 살폈어. 거제서야 난 한숨 돌리며 이 특이한 사람의 집무실을 둘러 볼 여유가 생겼지.
도자기...
테이블 뒷, 옆,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식장 안에는 갖은 형태의 흰색 도자기가 즐비하게 들어 서 있었고 심지어는 테이블 구석 꽃병도 난이 그려진 백자였어. 이 역시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이 분 유일한 취미가 도자기 수집이었지. 그것도 하얀 도자기, 백자 말이야. 이것봐라. 순간 휘리릭~ 스치는 생각. 아~ 순간 난 무릎을 탁 쳤어.
“제품은 좋은 갑소. 단가는?”
견적서를 내밀자 회장님은 안경을 코끝 쪽으로 조금 내리고선 눈을 가늘게 뜨고 찬찬히 살폈지.
“좀 비싸네, 그리고 공장 껍데긴데 이리 두꺼울 필요가 있나?”
예상한 바였어.
“회장님, 3만평 대지에 1만 여평의 공장을 지으려면 토목공사, 기초공사, 지붕, 벽체 마감에 이르기까지 150억 정도 소요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붕, 벽체 30억 예상할 때 10%, 비싸봤자 3억입니다. 전체 공사비 대비로는 2% 정도 추가됩니다. 조금 비싸더라도 내식성 뛰어난 제품을 쓰시는 게 장기적으로 이익이라 생각합니다.”
고개를 끄덕이셨지.
“시편은 가져 왔소?”
중요한 순간, 대부문 공장 색깔은 비슷해. 좀 우중충하지. 요즘은 특이한 색상들로 공장을 많이 짓지만 그래도 거기서 거기야. 파랗거나, 회색이거나 아니면 은색 정도... 난, 미리 준비해 온 시편을 제쳐두고 서류가방에서 색견표를 꺼내 들었어.
“회장님, 이 색상 어떻습니까?”
해가 이미 떠오른 듯 창문으로 밝은 빛이 사무실 안 구석까지 들었고, 나는 전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내가 지목한 색견표 색상을 진지하게 쳐다보는 한 노인의 모습을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어.
(죄송합니다. 이 건 에피소드가 너무 길어, 도저히 여기서 끝을 못냈겠네요. 선물세트도 돌려야 하고... 후편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