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세미롱은 미심쩍은 부분이 남아있긴 했지만 비무장상대를 억지로 적대하려는 목적은 없었으므로 이쯤에서 납득하기로 했다.
"잠시 신뢰할 만큼은 되는 거 같네요. 저희도 딱히 싸우려고 이러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무기가 있진 않은지 소지품 검사를 먼저 할 건데. 괜찮겠죠?"
진하는 고개를 끄덕. 거기까지 들은 스크래치는 아까부터 있던 주변의 인기척을 정리하기 위해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진하에게는 근육질의 중년 남자, 원경이 다가왔다. 세미롱이 말했다.
"여자분들은 제가 체크 할 테니까 이쪽으로 오세요. 원경 아저씨는 저 고등학생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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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 조가 훔쳐보던 앵글에서 스포츠웨어가 사라졌다. 세미롱이 사무실 구석으로 데려가버린 탓이었다. 원경이 고등학생 몸수색 하는 건 관찰할 수 있었지만 현수는 시선을 거뒀다. 시윤은 여전히 스포츠웨어를 걱정하며 진정하질 못하고, 츄리닝과 삼디다스도 점점 그 안절부절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동지가 생기자 무언가 저지르려는 것인지 시윤은 우선 고등학생을 지적했다.
"저 새로 온 고등학생 형은 모르겠지만, 아까 같이 있던 여자분은 부설 고등학교 쪽에서 이상한 모임하는 사람들 중 한분이에요. 사람 수는 가끔 변하는데 확실히 그 여자분 말고도 한명이 더 있었어요. 아마 중간에 말한 반장이라는 사람일 거에요."
시윤의 설명에 현수가 혀를 차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아직 안전해 보일 때 방침이나 정해야 돼. 조용히 돌아가서 청소부들 다시 올 때까지 다시 숨어있던가, 발각되면 일단은 협력시켜 달라는 쪽으로..."
대화를 끝까지 훔쳐봤음에도 여전히 뭔가 뾰족한 수는 없었다. 저들이 청소부를 우호하는지 적대하는지도 알 수 없고, 다른 민간인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려는 성향도 아니어 보인다. 그때 누군가 현수의 뒷통수를 빡 후려 찼다. 군홧발이다. 눈을 번쩍 뜨며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한 현수가 뒤를 노려봤다.
"아니 어떤 새ㄲ..."
"뭘 훔쳐보고 있어. 그리고 뭐. 어떤 새 ? 내가 어떤 새낀지가 궁금한 거야 지금?"
스크래치는 장현수의 머리를 총구로 바닥에다 찍어 누르며 서로에 입장에 맞는 관례적인 첫인사를 했다. 현수는 관자놀이가 터질 듯한 압박에 얼굴이 벌개져서 악악거리다가 소리 질렀다.
"모..몰라도 될 것 같씁니다!!"
"나랑 생각이 좀 다르네. 난 너희들이 어떤 새끼들인지 궁금해. 그런 사람들이 나 말고도 있고."
스크래치가 총구를 치워주며 이어말했다.
"따라와라. 도망치다 총 맞거나 하지 말고."
이외에 다른 인기척은 없는지 주변을 한번 둘러본 스크래치는 쭈그러진 기숙사생들을 데리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책상에 쌓인 살벌한 용품들을 발견했다. 대인살상용 권총이 눈에 띄었다. 위험 요소가 없어졌다고 판단해 자리를 떴던 스크래치는 그것을 보고 황당한 기색이 되어 물었다.
"이게 다 뭐야??"
세미롱이 진하를 가리킨다. 스크래치가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야 너 무해한 고등학생이라며."
"저건 그냥 먼 길 오다보니까, 뭐. 주운 거에요."
황당하단 눈길로 원경을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권총엔 탄창도 빠져있고 나머지도 다 호신용품 정도야. 도시상태 생각하면 이상할거 없어."
"거야.. 그렇긴 한데.."
좀비 세상 생각하면 그게 그렇긴 하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저 어리숙하고 반듯한 상판과 너무나도 매치가 안 되는 소지품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스크래치는 역시 사람은 방심할 수 없다 실감하며 현수에게 눈짓했다.
"자 저거 보이지. 너희들도 빨리 소지품을 털어놓고 무해해진다. 실시."
각자 쌍안경, 손전등, 접혀진 3단봉 정도를 꺼내놓고 마지막으로 장현수가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꺼내놓았다. 슥 들어본 스크래치는 총알이 장전된걸 확인하고 눈썹을 찡그렸다. 현수는 필사적으로 쏠 생각은 결코 없었다며 손과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스크래치는 생긴 거랑 잘 어울리는 소지품이라고 정도만 생각했다. 저런 비협조적인 얼굴로 총 한 자루 안 들고 다녔으면 여지껏 살아남지 못했겠지.
세미롱이 다가왔다.
"이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뭐 새로운 정보가 나올까요?"
그녀도 기숙사조가 엿듣고 있었다는 것을 뻔히 아는 눈치다. 장현수는 발뺌하는 대신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세미롱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됐어요. 청소부들이 자리를 비운 이상 빨리 행동하는 편이 좋으니까요."
청소부들이 어디로 갔는지, 돌아오긴 하는지, 온다면 언제인지. 그런 것들이 모두 불분명했다. 다만 그로써 하나 분명한건 이곳을 점거하던 최대의 무장집단이 현재 부재중이라는 점이였다.
대학 부지는 굳이 따져보지 않더라도 공간이 넓고 진입로가 많으며 폐쇄성이 옅었다. 이곳을 스스로 힘으로 방비해야한다고 생각하면 다소 조급해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스크래치는 사무실 내를 훑어보며 그룹부터 나눴다.
"좋아. 각자 역할 분담을 할 거다. 야 장전권총 너 이름 뭐야."
"장현수요."
"넌 무조껀 날 따라온다. 나머진 알아서 하고. 세미롱! 쌍둥이동생 불렀어?"
"방금요. 지금 도련님 데리고 같이 올라오고 있어요. 관리소가 벌써 보인다니까 마중은 안 나가도 되겠고, 컴돌이랑 후드씨는 상처 때문에 아직 자고 있다네요. 루트 짜면서 기다리면 되겠죠."
세미롱은 그렇게 말하고 옆에 있는 벽을 올려다봤다. 종이로 된 거대한 주변 지도가 걸려있다. 새빨갛게 표시되어있는 작전 표시들. 청소부들도 군사기업이니 체계적인 브리핑 테이블 정도는 이상할 게 없지만, 디지털이 아닌 점은 조금 의아했다.
작전 자료들을 아날로그 데이터로만 구성하는 데에는 몇 가지 정해진 이유가 있었다. 당장에 전파방해나 해킹 피해 대비, 혹은 전자적 장비들을 마비시키는 무기가 동원될 때 정도가 그랬다. 다만, 그런 이유들은 인간 최대의 적이 좀비가 된 후론 대부분 무의미해졌다고 말할 수 있었다. 좀비는 무섭고 강력한 괴물이지만 도구를 다루는데 있어서만큼은 좋게 말해줘도 원시인 정도였다. EMP를 쏘아대는 좀비라니.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청소부들은 좀비가 아닌 다른 것과 싸웠던 걸까? 전모를 짐작키가 어려웠다.
'여기서 뭘 한 거야?'
몇 완료 표시가 되어있는 도시경계의 작전들과, 대학 내부를 포위하는 듯한 수많은 미완료 작전표시들을 번갈아 봤다. 무엇 하나도 목적이 분명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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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롱이 알려준 루트에 따라 관리소로 진입한 쌍둥이동생은 계단 앞에 멈춰 서서 도련님의 휠체어를 내려다봤다.
'계단인데.. 이거 그냥 밀어버려도 되는 건가?'
그 시선을 눈치 챈 도련님이 휠체어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바퀴가 확대되더니 결이 나뉘었다. 계단으로 밀어 올려도 부드럽게 굴러 올라갔다.
'우와 인간문명;'
등 뒤의 쌍둥이동생이 감탄하는 것을 느끼며 도련님은 살짝 즐거워했다.
쌍둥이동생은 산림 관리소라는 구시대적 건축물의 가운데 계단으로 휠체어를 밀어 올리며 걸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바깥 외경을 처음 봤을 땐 복고 취향의 이미테이션이라고 생각했지만, 내부로 들어오니 정말로 그 시절의 공법으로 지어져있었다. 쌍둥이동생은 여러 가지 의미로 감탄했다. 문화제 시설 내부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문마다 달려있는 뭔가 가벼워 보이는 금속 문틀들은 스탠인지 양철인지도 모르겠고 천장에 달린 백열전등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시대착오적이었다.
그리고 좀 신기했다. 원래 같았으면 언제 좀비나 총알이 벽을 뚫고 들어올지 모르는 나무판자 속 느낌이었을 텐데, 여기가 블루존이고 청소부들의 근거지라고 생각하니 번듯한 요새내부처럼 여겨졌다.
이리저리 한눈을 팔며 두 사람은 세미롱들이 기다리고 있는 사무실에 도착했다. 도련님은 문틈을 자동으로 넘는 휠체어의 성능으로 쌍둥이동생을 놀래켜주며 만족스럽게 입장했다.
세미롱이 들어온 두 사람을 발견하고 둘러보란 듯한 시늉을 해왔다.
"청소부들은 부재중인 모양이에요."
도련님은 어제 들었던 청소부라는 민간 군사기업에 대해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히 다행이군요라는 의미였다. 한마디 건넸을 뿐으로 계속해서 뭔가 자료를 뒤지고 있는 세미롱 주변으로 여기저기 모르는 얼굴이 눈에 띈다.
쌍둥이동생은 낯선 얼굴들에 딱히 신경 쓰는 기색 없이 말했다.
"어제 짠 협상안이 쓸모없어져서 다행이네요~"
"없어졌다고 단정은 못해요.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세미롱이 프린트 자료에서 눈도 때지 않은 채 대답했다.
"으~ 안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쌍둥이동생은 짧게 눈치를 본 다음 말을 흘리며 도련님의 휠체어를 낯선 사람들이 있는 곳 옆에 세워주고, 자신은 세미롱에게 가서 바싹 달라붙었다.
별안간에 어색하게 모여 앉은 고등학생, 여자, 스포츠웨어, 그리고 도련님. 묘한 조합의 네 번째 구성원으로 섞여 들어가게 된 도련님은 어색한 첫 만남이 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생각한 끝에 쭈뼛쭈뼛 손을 내밀었다. 상대방이 악수를 해주면 자연스럽게 인삿말을 건넬 속셈이었다.
그 손을 의아하게 내려다보던 진하는 방긋 미소 짓고는 손을 잡고 세 번 흔들었다. 도련님이 그 세 번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먼저 인사했다.
"바, 반가, 워요..!"
"저도요."
도련님의 얼빵해 보이는 미소와 진하의 선해 보이는 웃음. 둘은 서로가 마음에 들었다.
그 인간미 넘치는 배경에 관심 없이 세미롱에게 붙어 앉아 그녀가 뒤지던 자료들을 뒤따라 훑던 쌍둥이동생은 벽의 지도를 발견하고 말했다.
"이거 지도~? 구시대적이네요~"
"네 나강 소총 만큼이나요."
"모신나강 이거든~요~"
쌍둥이동생이 입은 미소 지은 채 눈썹만 찡그려 화난 체를 했다.
여기저기 툭하면 시대착오적이니 구시대적이니 하는 감상을 다는 게 취미인 그녀는, 사실은 그 본인이 구시대의 최첨단을 달리는 매니아층이었다. 물론 1891년대 소총에서 따온 것은 모신나강이라는 이름과 외형의 이미테이션뿐이고, 그녀가 가지고 다니는 소총의 내용물은 전혀 다른 현대의 것이었다.
하지만 쌍둥이동생은 원래 그 내용물마저도 진짜의 것을 구해서 사격게임을 하던 일종의 사격 스포츠 선수였다. 그런 만큼 그녀는 일부 유명한 아마추어 사격수들을 잘 아는 편이었는데, 도련님과 어울려 앉아있는 세 사람을 발견하고도 손목에 상처가 있는 여자에게 시선이 잠시 머물렀을 뿐 그리 관심을 가지는 기색은 없었다.
세미롱은 그런 쌍둥이동생의 태도에서 이 사무실에 위협적인 경력을 가진 민간인은 없다고 판단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세미롱은 지도로 다가갔다.
"이 종이 지도는 아마 디지털로는 안 되는 작업을 했을 거에요."
"어떤 작업인데요?"
"전혀 모르겠어요."
세미롱은 정말로 감을 못 잡겠단 표정을 지어보였다.
쌍둥이동생은 언젠가 군사 기업들이 고장 난 진압드론 따위를 무력화할 때 전자 장비를 통한 브리핑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한번쯤 보게 되리라곤 생각했지만 실제로 여러 가지 작전명령이 표시된 거대한 종이 지도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대로라면, 청소부들은 이곳에서 진압 드론과 싸운 것일지도 몰랐다.
청소부들이 좀비도 인간도 다 쓸어버리고 진압 드론이랑까지 한판 떴다는 소문이 퍼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다소 궁금은 했지만 확실하지도 않은 정보이니 쌍둥이동생은 일단 추측을 함구하기로 했다.
세미롱은 영리하고 두뇌회전이 빠른데다 믿음직하다. 하지만 다소 얼굴에 쉽게 감정이 드러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이상 청소부의 악명을 들려줬다간 청소부들이 이곳에 돌아왔을 때 어떤 상황이 돼버릴지 장담할 수 없었다. 바퀴벌레를 발견한 일반시민처럼 과민반응이 나와 버린다면 큰 일이 된다.
쌍둥이동생은 가벼운 마음으로 비밀을 만들며 세미롱을 느끼하게 쳐다봤다. 세미롱은 그녀를 평소처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질색한 표정을 돌려 준 다음 예정했던 절차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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