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혼의 블랙홀
제33화 제왕학 수업
“자영이 네 처분에 맡기마.”
흥선군이 말했다.
잠시 고민한 뒤 대답했다.
“감고당에 기거하고 있는 식솔들의 처분에 맡기겠습니다.”
흥선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허어, 어찌하여?”
이유를 설명했다.
“이 자는 여러 사람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맨 처음, 수령과의 관계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다 하여, 유랑하는 도적이 되어 다른 사람을 해치고서라도 재물을 강취하려고 하였습니다.”
“흐음, 그런데?”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을 한 무리로 거느리고 도적질을 하려고 시도했으나, 여기 있는 성남이가 강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 홀로 말을 타고 도망가 버리지 않았습니까.”
성남이가 다시금 이글거리는 눈으로 도적 두목을 쏘아 봤다. 나는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두고 혼자 가 버림은, 설사 소녀의 아버지가 인자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시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여전히 불의합니다.”
“그렇지.”
흥선군이 추임새를 넣었다. 덕분에 말을 계속 이을 수 있었다. 전직 도적 두목은 여전히 바닥에 엎드려 미동도 않고 있었다.
“소녀의 아버지가 아프신 중에 말과 수레를 훔쳐 달아난 것은 물론 중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녀 아버지와 저 자 사이에서 해결해야 할 은원관계입니다. 조만간 아버지가 의식을 찾으시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도적 두목이 희망에 찬 얼굴로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 때가 올 적까지는, 소녀 아버지 집에서 기거하며 일하고 있는, 이 자의 부하들의 손에 처분을 맡김이 합당할 것입니다.”
흥선군이 의문을 표했다.
“감옥에 보내는 것은 어떠하냐?”
내가 동의하지 않았다.
“이 자의 말에 따르면, 수령이 포학하여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고, 심지어 부녀자를 노비로 팔아서라도 탐욕을 채우려고 했다 하지 않습니까.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습니다. 이제 소녀가 형리를 시켜 이 자를 가두라 하면, 필시 죄를 경하게 하는 대가로 재물을 요구할 것입니다. 재물을 낼 가족들이 있다면, 죄가 있음에도 곧 풀려날테니 불의합니다. 재물을 대신 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돈이 없다는 이유로 가혹한 형벌을 받을테니 그 또한 불의합니다. 차라리 이 자의 부하였던 자들의 자력구제에 맡기는 것이 더 낫습니다.”
흥선군이 탄식하였다.
“어쩌다 우리 조선이 이 지경이 되었는고. 자력구제가 관청에 신고하는 것보다 나은 세상이라니. 내 비록 곁가지라 하나, 왕통을 이은 몸으로서 만시지탄할 수밖에 없구나.”
이어 나를 향해 말했다.
“이만 노락당으로 들어가 보거라. 부인이 기다리고 있단다. 네 뜻을 따르마. 이 놈은 내가 첨정 댁으로 보내 주겠다.”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 하겠사옵니다.”
시간이 제법 많이 지체되었다.
안채인 노락당에 들어가자, 다들 모여 있었다. 나이가 가장 많으면서도 장자 취급을 받지 못하는 재선, 시종일관 무례한 눈길로 나를 훑어보는 재면, 그리고 아직도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통통한 볼이 귀여운 명복이까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세 소년이 한 명의 훈장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왔구나~! 왜 이리 늦었니!”
현부인이 버선발로 달려와 나를 얼싸 안았다.
“소녀, 인사드립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현부인의 가슴에 푹 파묻힌 내가 웅얼거렸다.
“죄송은 무슨? 와 준 것만 해도 기쁘다! 마침 아이들에게 글공부를 시키던 중이었단다. 자영이도 아는 게 있으면 같이 외워 보렴!”
현부인이 미소를 지었다. 아들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 집에서 성남이는 투명인간 취급 받았다. 댓돌 아래 성남이가 섰고, 나는 안채 대청 마루 위로 올라갔다.
“어쩜! 몸가짐도 가지런하기도 하지!”
현부인은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칭찬하기로 결심한 듯 하였다.
대청 마루에서는 이미 한창 수업이 진행 중이었다. 내가 난입함으로써 잠시 흐름이 끊겼다.
“우리 맏사위 조구당(趙鷗堂)이라고 한단다. 종7품 직장인데, 일이 없는 날에 와서 아들들의 공부를 도와주지 않겠니. 사위, 여기 민 소저는 감고당에 거처하는 내 12촌 여동생 자영이라 하오. 비록 여아로 태어났으나, 일찍부터 아버지인 첨정 어른에게 학문을 배워 조예가 깊다고 하니, 오늘 하루만 우리 아들들과 함께 가르쳐 보는 게 어떻소?”
구당이라 불린 훈장은 뜻밖에 무척 젊었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 것 같았다. 수염도 채 나지 않을 정도였으니. 강직해 보이는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민 소저라 하였나. 아직 어리니 발을 치는 등 내외하지 않겠다. 거기 맨 뒤에 앉게.”
두 손을 모으고 앉았다.
구당이 읊었다.
"지지이후에 유정이니 정이후에 능정하며,
정이후에 능안하고 안이후에 능려하고, 려이후에 능득이니라."
재선이 해석했다.
"지지... 어... 머무를 곳을 안 뒤에 어디 머무를지 정하니, 능정.... 콜록, 정한 뒤에 고요해질 수 있고, ...정이후... 고요한 뒤에 편안해질 수 있고, 안이후... 편안한 뒤에 생각할 수 있고, 려이후... 생각한 뒤에, 능득, 즉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구당이 칭찬했다.
"잘 했다. 그럼 이번 구절은 재면이가 해석해보아라. 물유본말하고 사유종시하니 지소선후면 즉근도의리라."
재면이가 어물거렸다.
"음..."
내 쪽을 보더니 얼굴을 붉혔다.
“모르겠습니다.”
수염이 채 나지 않은 구당의 얼굴빛이 노기를 띠어 벌개졌다.
“재선이 이 놈! 미리 외워 오라고 이르지 않았더냐! 어찌하여 학문을 닦기를 게을리한단 말이냐!”
재면이가 웃음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항문을 닦는 걸 말씀하시는 거라면, 매일 아침 뒷간에서 열심히 닦습니다.”
구당은 전혀 웃지 않았다. 도리어 매를 들었다.
“종아리를 걷고 여기 서거라.”
슬쩍 현부인을 쳐다보았다.
집안의 장자라며 자랑스럽게 소개할 때와는 달리, 얼굴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하지만 사위가 아들을 매질하려 드는 걸 막지는 않았다.
짝!
회초리가 매섭게 무릎 뒤 여린 살을 내리쳤다.
“윽!”
“이 매는 재면이 네가 종묘사직을 받들 종친임에도 학문을 게을리해서 맞는 것이고!”
“아악!”
“이 매는 왕의 피가 섞인 종친인 널 우러러볼 백성을 대신해서 내가 치는 것이고!”
“이익!”
“이 매는 재면이 너 역시 흥선군 대감의 공식적인 맏아들로, 장차 다른 집에 양자로 갈 수 있음에도, 남의 집에 가서 아들 된 도리를 게을리할까봐 내가 치는 것이다.”
남이 보는 앞에서 맞았기 때문인지, 수치심과 분노로 재면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회초리가 파공음을 내며 날아드는데도,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구당은 한참 재면이의 종아리를 치더니, 덧붙였다.
“그럼 형 대신, 재황이가 해석해 보거라.”
재황이는 항렬에 맞추어 지은 명복이의 돌림자 이름이다. "재", "황"이란 이름을 접할 때마다, 누렇게 뜬 피부에 부항을 뜨는 장면이 생각나, 나는 결코 재황이라는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다.
명복이가 나를 보더니 발갛게 상기되었다.
“세상만물에는 본질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끝과 시작이 있으니, 이들의 먼저와 나중을 알면 도에 가깝다 할 수 있으리라.”
신이 나서 읊어 댔다. 명복이의 표정은 득의양양해진 반면, 손님으로 온 내 앞에서 맞은 데다, 동생보다 못하게 된 재면이의 표정은 점차 썩어 들어갔다.
명복이가 “나 잘 했지?”라는, 약간의 우월감이 섞인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눈꼴이 시려 왔다. 별것도 아닌 것 같고 지나치게 으스댄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당이 미처 내게 뭔가를 시키기도 전에, 속사포처럼 다다다 외웠다.
“고지욕명명덕어천하자는 선치기국하고
욕치기국자는 선제기가하고 욕제기가자는 선수기신하고
욕수기신자는 선정기심하고 욕정기심자는 선성기의하고
욕성기의자는 선치기지하니 치지는 재격물이니라.
옛날부터 온 세상에 명덕을 밝게 드높이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기 집안을 정리하고, 그 집안을 정리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기 몸을 수양하고, 그 몸을 닦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세우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의지를 분명하게 하고, 그 의지를 분명하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깨달음에 도달해야 하니,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은 온 세상의 이치를 궤뚫어 보는 것이니라.”
구당의 얼굴이 환해졌다.
반면, 명복이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오오, 정답이다! 훌륭한 풀이로군. 다음 장도 외울 수 있겠느냐?”
나는 나머지 구절도 막힘없이 외웠다. 그 유명한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부분이었다.
“물격이후지지하고 지지이후의성하고
의성이후심정하고 심정이후수신하고
수신이후가제하고 가제이후국치하고
국치이후천하평이니라.
만물의 이치를 궁구한 뒤에 깨달음에 이르게 되고, 깨달음에 이르게 된 뒤에 의지가 분명해지고, 의지가 분명해진 뒤에 마음이 바르게 잡히고, 마음이 바르게 잡힌 뒤에 몸이 닦이고, 몸을 수양한 뒤에 집안이 가지런해지고, 집안이 가지런해진 뒤에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 천하가 평안해 지는 것이니라.”
구당이 크게 칭찬했다.
“사내였으면 장원 급제를 했을 터인데, 여인이라 뜻을 펴지 못함이 심히 안타깝구나! 다 맞았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도를 알고 있구나. 민 첨정께서 따님 교육을 아주 멋지게 시키셨네그려!”
명복이의 우쭐한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칭찬을 빼앗긴 어린 아이의 눈으로 나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마지막으로, 구당이 스스로 직접 외웠다.
“자천자로 이지어서인이
일시개이수신위본이니라.
천자(天子)가 먼저 스스로 행함으로써 서인(庶人)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됨은 모두가 다 이 몸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니라.
너희는 대대로 귀중한 조선 왕실의 후손들이니, 스스로 먼저 행함으로써 백성들에게까지 모범을 보이도록 하라.”
그 때였다.
“낭군이시여.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 너무 길고 지루한 수업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입양 가서 왕통을 잇는 것이 확실하지도 않은데, 벌써부터 제왕학 수업이라니요?”
소반에 차와 과일을 받쳐들고, 명복이의 첫째 누나가 다가왔다. 남편인 구당 선생을 향해 눈웃음을 쳤다.
-34화에서 계속-
#민족혼의블랙홀 #명성황후 #세도정치 #수령갑질 #도적 #유민 #흥선군 #식객 #운현궁 #원수는외나무다리에서만난다 #역사판타지 #명성황후 #민비 #로판 #로썰 #출생의비밀 #시대물 #역사물 #정치물 #책사물 #비극 #이루지못한사랑 #좌절 #책임 #배신 #뒷통수 #무료소설 #무료연재
0 높임법: 흥선군이 종친으로서 주인공의 아버지보다 품계가 높기 때문에, ‘엄친께서’란 극존대 표현을 쓸 수 없다. 흥선군께서~란 표현을 쓰지 않는 이유는, 주인공의 최종 신분이 흥선군보다 높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인공이 극존칭으로 높임법을 쓰는 인물은 마음속에서 각별하게 생각하는 인물이다.
0 감고당(感古堂): 인현왕후의 친정집, 한양에 1개, 경기도 여주에 1개 있다.
0 미동도 않다: 움직임 제로.
0 은원관계: 은혜와 원한이 얽힌 복잡한 관계
0 자력구제: 빚을 진 사람에게 자기 자신의 힘으로 빚을 받아내는 것. 법적인 절차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구제한다고 해서 자력구제(自力救濟)이다.
0 만시지탄(晩時之歎): 보리가 익어 거둘 시기를 놓쳤음을 이르는 말
0 현재 운현궁 구조: 대원군이 즐겨 쓴 아재당(我在堂)은 없어지고, 한옥은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 부인이 쓰는 안채인 노락당(老樂堂)과 별당채인 이로당(二老堂)만이 남아 있다.
0 직장(直長): 조선시대 각 부서의 쌀, 보리 등 곡식·비품 등을 관리하던 종7품 관직-오늘날의 7급 공무원.
0 당구(X) 구당 선생 가르침 출처: 대학(大學)
0 작가의 말: 이틀이나 연속 아무 말 없이 빼 먹어 죄송합니다. 작가도 사람인지라 멘붕이 와서 잠시 자숙 기간을 가졌습니다. 힘닿는 대로 쉽고 재미있게 연재하겠습니다. 가끔 댓글 남겨 주시고,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하루도 빠짐없이 추천 눌러 주시는 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