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혼의 블랙홀
제32화 파종과 증오
현부인이 초대해 주셔서 운현궁에 놀러갔더니, 도적 두목이 식객으로 떡 하니 앉아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흥선군이 추궁하자, 도적 두목이 되기까지의 경위를 실토하였다.
성남이가 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네 이놈! 바로 너 때문에! 네가 말을 타고 가 버리는 바람에, 첨정 나으리의 병환이 도져, 지금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 계시지 않느냐!”
도적 두목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긍께 내 잘못했어야. 내 죽을 죄를 지었어래.”
흥선군이 짐짓 노를 발하였다.
“네, 이놈! 한양에 벼슬하러 올라오는 관리가 타고 있던 말을 갈취(喝取)하고서도, 감히 내게 주인 잃은 말을 돌려주려 한다고 거짓을 고하느냐! 나, 흥선군을 능멸하고서도 네가 감히 살아있기를 바라느냐!”
“일부러 뺏으려던 건 아니었당께루, 말은 세게 혔지만, 우리 동네 사또 대신 사과하는 걸 뵈니께 맘이 약해졌소. 그저 여기 있는 초립동이 갑재기 칼을 꺼내 휘두르는디, 일당백이지라. 너무 세서 그만 당황혀부렀소.”
“내 지방 백성의 어려움을 친히 견문하고자 너를 우리 집에 들였거늘, 그럼 지금까지 내게 다 거짓을 고하였단 말이냐!”
도적 두목이 더욱 벌벌 떨며 깊이 엎드렸다.
“그건 아니지랑께요. 참말루 민초들은 고통 받고 있어야. 아닌 말로, 도적질이라두 해 대지 않으문 일반 농민들은 도저히 그 많은 세금을 낼 수가 읎소. 애초에 내가 의적이 된 것두, 곤장 맞다 도망쳐 나랏님을 뵈러 갈 여비가 없어라.”
흥선군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납작 엎드린 도적 두목을 발로 밟고, 갑자기 나타난 담뱃대로 마구 때렸다. 일 각 전에는 술병을 들고 있던 손으로.
퍽! 퍽! 퍽!
“아악! 악, 아이구 나 죽네! 죽을 죄를 졌다구 혀서 참말로 죽인답니까. 대가리가 깨져불 것 같소! 글쿠, 악! 한번 백성 눈에 수령이 밉보이니, 윽! 그라요! 나라서 벼슬하는 모든 인간들이 다 미워보여서 그랐소. 억! 그런 인간들의, 히극! 재물은, 아야야! 뺏어두 아무 가책이 없을거라구, 익! 생각했음유. 아이고 나 죽네! 마침 나랏님을, 허억, 뵈러 가던 길이니, 큭, 나랏님 말을 돌려준다는, 흑, 구실도 되았응께요. 아따, 거 찰지게도 때리시네잉.”
뻐억!
뼈를 정통으로 맞았는지 울리는 소리가 남달랐다.
도적 두목이, 계속 두들겨 맞으면서도 마침내 마음 속 진심을 토설했다. 언뜻, 죽을 때까지 곤장을 치라던 수령에게 향한 것인지, 증오의 눈빛이 살짝 어렸다가 사라졌다.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그래서, 만날 여비를 모으기 위해 도적질까지 했다는 나랏님은 만나 뵈었느냐. 다스리는 고을의 부녀자들을 기생집에 팔아 넘겨 돈을 긁어모으려 든다는 그 수령을 고발하였느냐.”
내가 물었다.
“아니쥬. 아직 만나지 못했더랑께요.”
매질이 잠깐 멈춘 새, 도적 두목이 대답했다. 한결 풀 죽은 목소리였다.
“거시기, 서울에 와 보니, 어지간한 청탁은 안동 김 씨 세도가에게 뇌물을 허벌나게 먹여야 쓰겄당께요. 그란데, 애초에 우리 고을이 개차반이 된 기, 안동 김 씨에게 줄 뇌물을 모으느라 그란 거이 아니겄소. 청탁할 뇌물도 없을뿐더러, 안동 김 씨에게 말해봤자 이참엔 소인이 참말루 욕보지 않겄습니까잉. 보나마나 한통속일테니께, 곤장을 죽을 때까지 겁나게 맞아 부러 뒤지든가요. 저승이 가차운 건 싫응게요. 그랑께 집에도 못 돌아갈 신세가 됐고요. 벌써 파종, 거시기 씨 뿌리는 시기가 가차워서 지집이랑 자석 걱정에, 주막에 들러 신세 한탄이나 하고 있는디, 무시 흥선군 대감께서 바루 옆에서 타령을 듣고 있질 않겄소? 우짜쓰까잉. 말을 돌려준다 카고, 일단 식객으로 대감 댁에 눌러 앙거라잉, 나랏님께 고할 기회를 준다고 하시니, 기다려야 하는 기 아니겄소. 내 애우르고 있당께요.”
흥선군이 부연하였다.
“흠흠, 이 자가 말한 대로이니라. 내 백성의 생활이 어떠한지 자주 암행을 나가는 터. 이 자가 하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생각하여, 일단 이 자를 식객으로 거두었다. 또 이 자가 나랏님께 돌려줄 말도 주웠다고 하고 말이다. 설마 민 첨정의 말을 빼앗았을 줄, 어찌 알았겠느냐.”
그러더니 뒷짐을 지고 나를 돌아보았다.
“어떠냐, 자영아. 이 자를 곧장 의금부로 압송해야겠느냐? 네 아비의 병을 더욱 위중하게 한 놈이 아니냐. 주리를 틀어도 시원치 않을테니, 원한다면 말하라.”
그리고 성남이를 보고 말했다.
“거기, 민 첨정에 대한 효성 지극한 도령은 홍 판서 댁 서자 아닌가. 판의금부사가 자네 삼촌뻘 된다고?”
성남이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나 역시 기함했다.
아까 인사를 드릴 때, 아버지의 딸로서 나 자신을 소개하였다. 그런데 서슴없이 이름을 부르다니. 내 이름은 현부인으로부터 들어 안다 쳐도, 성남이가 홍 판사 대감과 나눈 대화는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가. 흥선군의 정보력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흥선군이 태연히 말했다.
“아아, 놀랄 것 없네. 내 안동 김 씨 상갓집에 갔다가, 뒷문으로 쫓겨나면서 부엌을 지났네. 거기에서 여종끼리 하는 얘기를 들었거든. 유력자의 노비들끼리도 일종의 혼맥과 혈연지연으로 다아 얽혀 있다네.”
그러더니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자영이, 네가 밥을 적게 먹는다면서, 어찌 그리 미모와 시 짓는 솜씨를 칭송하던지! 무슨 노래의 씨를 뿌린다고 읊었다고들 하더구나. 게다가 어려운 한문 시를 딱 한 번 듣고 무슨 뜻인지 척척 해석해냈다고? 소문 대상을 꼭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심히 수다를 떨더군.
해서, 내, 부인을 시켜 우리 집에 한 번 들르라 일렀네. 알고 보니 부인이 며느릿감으로 점찍어 놓았다던 바로 그 처자더군. 세상 참 좁네 그려. 허, 허, 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우리 집에 있는 엿보기 구멍이 판의금부사 댁에도 있었던 걸까. 상을 내어 가면서 오면서 보고 들은 걸까. 만약 음식을 남기지 않고 밥그릇을 모두 비웠다면, 나에 대한 험담을 했을까. 상 차리고 나서 부엌데기에게 떨어지는 나머지 음식이 줄어드니까.
가까스로 당황한 마음을 추스렸다. 공손히 대답했다.
“부족한 소녀를 어여삐 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나, 대감께서 들으신 것은 부엌에서 아녀자들이 부풀려 떠드는 소문에 불과합니다. 매상심공구적이라 하였으니, 대감께서는 부디 하찮은 소문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흥선군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매상심공구적이라, 허허. 항상 마음이 입과 적이 된다는 말을 어렵게도 하는군. 어린 나이의 여식이 배움이 깊기도 해라. 과연 허튼 소문이 아니었네. 자, 여기 민 첨정의 말과 수레를 빼앗아 달아난 도적이 있네. 자영이 네가 딸로서 가장 큰 원한을 지니고 있을 터이니, 네 처분에 맡기마. 의금부로 데려가든, 멍석에 말아 때려죽이든, 뜻대로 하여라. 지방 향리가 도적이 된 것도, 자신이 뿌린 씨이니, 마땅히 자기 자신이 거두어야 하겠지.”
-33화에서 계속-
-작가의 한 마디-
조선시대 한자어↔현대 구어체
0 파종(播種): 씨를 뿌리다
0 첨정(僉正): 종4품 관리직 공무원
0 갈취(喝取): 억지로 빼앗다.
0 능멸(凌蔑): 호구로 여겨 만만히 보다.
0 노(怒)를 발(發)하다: 분노의 3단계인 소노, 중노, 대노 중에서 대노 단계로 화냄
0 일당백(一當百): 먼치킨이 뛰어난 능력으로 엑스트라들을 다 발라버릴 때 쓰는 말
0 일 각(刻): 시간의 단위. 웹소설 한 편 읽을 정도의 시간
0 토설(吐說): 팩트를 까다.
0 애우르다: 기다리며 때를 엿보다.
0 지집: 계집의 사투리, 여기서는 와이프.
0 부연(敷衍): 대댓 설명
0 의금부(義禁府): 중죄인을 심문하는 왕실 소속 검찰청, 오늘날의 국가정보원 기능도 일부 담당.
0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약칭 판사(判事), 의금부를 다스리는 종1품 공무원, 오늘날의 경찰청장.
0 기함(氣陷): 깜놀 멘붕
0 혼맥: 결혼으로 이어진 인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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