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왜 반성하지 않을까? <할복하려는 일본, 목을 쳐서 할복을 도와주어야 하는 대한민국.>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칼 마르크스)’라고 말한다. 하지만 역사는 단순하게 반복되지 않으며 또한 ‘리듬을 타고’ 희극과 비극을 번갈아가며 반복되지도 않는다. 참혹한 역사를 자행한 주동세력이 통렬한 반성과 철저한 개전을 해낼 때에만이 비로소 역사는 힘겹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하물며 개인사에서 조차 ‘저 인간은 안 변해’라며 갱생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추악한 한 인간이 과거의 악습과 절연하기가 새로 태어나는 것만큼 힘들다는 말일 것이다.
전쟁책임만이 아닌 반인륜적인 범죄행위를 저지른 일본은 정부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다수 시민사회에서 조차 지속적이고 진정한 반성 따위는 아직까지 없다. 앞으로도 기대되지 않는다. ‘통석의 염’ ‘ 불행했던 과거사’ 따위의 외교적 수사를 들은 적은 있다만 늘 그렇듯 놈들은 ‘망각과 회피’ 또는 뻔뻔스러운 ‘견강부회와 적반하장’으로 버틸 것이다.
1945년 8월15일 쇼와천황의 항복(종전)선언을 그의 육성으로 들어보자.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만세를 위해 태평한 시대를 열고자 한다”
이런 젠장! 공식적인 항복선언문임에 불구하고 그 어느 구석에도 천인공노할 침략전쟁에 대한 참회와 사죄가 없다. 일본의 침략전쟁의 결정을 최종적으로 재가한 것은 천황이였다. 메이지-다이쇼-쇼와로 이어져 오면서 변함없이 특급 전범은 천황이였다. 1941년 11월15일 쇼와 천황은 대일본제국헌법의 ‘국체’로서 진주만기습작전을 직접 재가한다. 심지어 진주만기습공격안이 ‘오케하자마 전투와도 비교할만한 기습작전’이라고 설명하는 군부전쟁광들의 성화에 못이기는 척, 고뇌하는 양 처신하며 허락하였다. (오케하자마전투는 1560년 6월12일 2,000명의 오다 노부나가가 이마카와 요시모토의 25,000대군을 기습하여 승리한 전투. 세상에나! 400여년전 내전 전투에서 세계 대전의 영감을 얻다니. 이런 상등신들! )
패전후 쇼와는 ‘쇼와천황 독백록’에서 구질구질한 요설을 늘어놓으며 책임회피로 일관한다. 하~아 이런 새끼가 반성을 안 한다. 했다고? 염병하네. 참회와 사죄는 피해자가 ‘지긋지긋하니 이제 제발 그만’하라고 애원할지라도 ‘또 해야 한다’. 철학적으로도 가해자인 너와 ‘신민’를 위해서 더욱 더 그렇다. 굳이 덧붙인다면 천황을 전범에서 제외하고 천황제를 유지시킨 미군정 사령관 맥아더도 아시아 민중에게 특히 한국 민중에게 부관참시를 당해도 할 말 없는 놈이기는 하다.
일본의 침략사를 간단하게나마 돌아보자.
1894년 청일 전쟁의 승전으로 타이완과 펑후 제도을 강점하고, 중국 각지 개항 등의 이권을 강취하였다. 청나라가 지불한 전쟁 배상금은 3억6천만엔 (일본 연간 예산의 3.6배, 3국 간섭으로 랴오뚱 반도 반환보상 포함)이었으며 이 돈은 러시아를 겨냥한 군비확충비로 지출하고 야하타 제철소를 설립하는데 사용하였다. ‘전쟁으로 돈 벌어서 또 전쟁을 치르고’ ‘전리품으로 신산업을 일으켰다’. 또한 조선에 대한 지배력은 증대되었고 영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개선 (영일 통상항해조약 체결)하는 성과도 얻었다. 이로써 중화질서에서 벗어나서 아시아가 대일본제국으로 중심이 옮겨온다는 맹신은 시작되었다.
1904년. 러일 전쟁의 승리후 포츠머스조약으로 조선에서의 ‘탁월한 이익’을 보장받고 결국은 1910년 대한제국을 병탈 하였고 ‘20만명의 희생과 20억엔의 전비’로 랴오둥반도 조차권, 남만주철도 및 사할린 할양을 강탈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한 공으로 서구열강들과 대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한편으로는 청일전쟁과 달리 러시아로부터 전쟁배상금이 거부당하자 일본 내에서는 난리가 났다. ‘얻은 게 뭐냐?’고. 온 신민이 날강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동안 약 3,0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영*일 동맹을 핑계로 전면 참전한 일본은 고작 1,250명의 사상자를 내고도 독일령 남양군도 획득, 대중국 21개조요구를 강압하여 독일 조차지 자우조우만 점령, 산둥성내 독일이권 몰수, 남만과 내몽고에서의 이익, 철도, 탄광등을 강탈하였다. 또 1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경제불황과 재정위기를 벗어나는데 결정적이었다. 유럽을 대신하여 면직물등의 일본상품이 아시아에 진출하였고 압도적인 수출초과를 이루었다. 전쟁이 몰고 온 공전의 호황은 세계3위의 해운국이 되게 했으며 중화학공업의 입지를 다져 공업생산액이 농업을 앞질렀다.
보다시피 이놈들의 발전사는 침략전쟁을 수행하여 돈 벌어서 다음 전쟁을 준비한 역사이다. 2차 대전 패전이후에도 타국의 전쟁을 ‘천우신조’라 여기며 적극 환영하고 놈들의 내부적 문제를 해결하는 호기로 삼았던 것이다. (일본 전 역사에 걸쳐 입증가능하다고 본다. 언젠가는 바쿠후의 탄생과 전개과정이 근현대 일본에게 미친 침략의 사회 정치철학에 대하여 정리해보고 싶다.)
-일본의 식민지는 모두, 그 획득이 일본의 전략적 이익에 합치된다는 최고 수준의 결정을 근거로 했고 그에 기초하여 식민지를 영유했다. -근대 식민지 제국 중에서 이 정도로 확고한 전략적 사고를 가지고 또 이토록 당국자간의 신중한 고찰과 광범위한 의견일치를 보인 나라는 없다.
마크 피티 (스탠포드대 연구원 - One of 미친 새끼)
그러하다. 놈들은 중화질서를 붕괴시키고 서구 열강의 불평등한 관계를 해소하여, 자립적으로 성장하는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의 안전보장을 위하여 필요불가결한 투쟁을 했다고 믿었던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보자.
지리적 자연적인 면에서 궁핍한 새끼들이었다. 청일, 러일전쟁에서 보여지듯 단기 속전속결의 침략전쟁을 통해서 식민지와 이권을 쟁취하여 다음 전쟁을 준비하였다. 해양세력으로 막부의 쇄국정책이 지리적으로 200년간 유리하였지만 유럽의 산업혁명의 압도적인 결과물인 흑선(증기선)을 몰고 페리 제독이 나타나자 언제든지 침략될 수밖에 없고 도망갈 곳 없는 섬나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했다. 서구열강에게 굴욕적이고 불평등한 개방을 당하면서 변화의 중심이 서구에 있음을 일찍 깨달은 놈들이었다. 서구를 모방하여 부국강병의 꿈을 꾸었고 산업화 걸음을 내 딛자마자 메이지 유신지사들은 정한론으로 노선투쟁에 들어갔다. 서구 열강의 발전의 또 하나의 축이 식민지 경략이였음을 간파한 것이다. 못된 것만 배워서 악독하게 써먹은 셈이다.
일본이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려할 때마다 놈들은 공략대상으로 늘 한반도를 첫 번째 희생자로 삼았다.
타이완, 조선병탈 만주 이권 등을 강탈한 놈들은 끝내는 장기전에 빠져든다. 류타오후에서 자작극으로 철도를 파괴하고 책임을 중국에게 몰아가 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은 괴뢰 만주국을 세웠다. 계속되는 대중국 침략행위로 국제연맹의 조사와 철수 권고로 궁색해진 일본은 연맹 발기 이사국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탈퇴한다.
1937년 만주사변 때와 유사하게 루거우차오(노구교)에서의 사소한 충돌을 빌미로 중일전쟁이라는 장기전에 돌입한다. 중화질서의 해체를 넘어서 ‘범아시아 대일본제국 건설’의 본격적인 도발이었다. 쟝제스의 외교관 후스는 ‘할복하려는 일본, 할복을 도와주는 중국’이라 하며 중일전쟁은 일본을 자멸의 길로 이끄는 장기전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또한 중국에서의 점령지 확대는 중국에서의 이권을 쟁탈당한다고 생각한 서구 열강의 제재를 불러일으키며 영*미와 대립한다. 중국과 일본 양쪽에 무기와 물자를 팔아먹던 미국이 일본에 위협을 느끼고 마침내 석유 및 군수 물자등을 금수 조치하자 일본은 마지막 도박을 하게 된다. 미*일 세계 최종전쟁론이라는 망상에 빠진 것이다. 일본시각으로 1941년 12월8일 오전2시 일본 육군은 영국령 말레이반도 코타바루에 상륙을 개시하는 동시에 오전3시19분 해군이 진주만을 기습한다. 태평양전쟁의 전개와 결과는 모두들 아는 바대로 일본의 패전으로 끝난다.
처음으로 돌아가자. 왜! 이놈들은 반성하지 않을까?
패전 직후 이미 예고되어졌다.
침략전쟁과 반인륜적인 대량학살과 식민지 민중의 강제노동, 강제징병, 성노예, 자원 착취등 수탈 전체를 일본의 안전보장을 위한 필요불가결한 과정에서 빚어진 문제로 치부해버린다. 조약형식을 이용(조선병탄, 괴뢰 만주국 건국등)하거나 모함( 류타오후 사건등)을 내세워 합법적인 지배이거나 그럴만한 일이였다고 변명한다. 강제징용을 합법적인 정당한 취업 근로였다고 주장하고 성노예 위안부를 매춘 개인사업자라고 우기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고 일관된 주장이었음을 재확인한다.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으나 다만 미국에 졌을 뿐이었다. 일본인 다수는 원자폭탄을 2개나 때려 박은 미국의 과잉 전략에 받지 않아도 될 민간인 원폭 피해까지 당했다고 주장한다. 미국과 전쟁을 하였으나 역부족으로 패전했을 뿐이기에 전범들을 신사에 모셔놓고 안타까워하며 넋을 기린다.
도쿄 전범재판에 회부된 25명의 전직수상, 장군, 제독 등은 전쟁중 정책 결정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당당하게 펼친 인간이 한명도 없었다. (‘일본 파시즘의 허약상’ 전범 재판에서 독일의 괴벨스는 ‘오스트리아 병합에 대하여 100% 책임지겠다. 총통의 반대도 무릅쓰고 결정을 이끌어 냈다’와 비교되기도 한다)
패전 뒤 황족출신 히가시쿠니노미야 총리는 패전의 원인을 분석하며 전력의 급속한 괴멸, 원자폭탄, 소련의 진출등과 함께 “국민도덕의 저하와 국민들의 은밀한 암거래도 전쟁의 한 원인”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펼쳤다. 천황을 비롯한 전쟁 수괴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온 국민이 철저히 참회 반성해야한다는 ‘1억총참회론’을 주창했다. ‘천황과 그 일당들도 나라를 위하여 노력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그리 되었다’라고 두둔하였다. 연쇄 살인마를 앞에 두고 ‘우리 모두가 죄인이요. 누가 누구를 탓하리오?’ 식으로.
결국 패전국이기는 하나 전범국은 아니라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은 ‘앞으로도 참회도 사죄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이유이다. 항복의 유일한 조건이 천황제 유지였는지 아니면 맥아더 미군정의 정치적 판단이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천황제 폐지와 전쟁범죄,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명백한 인정, 참회로부터 출발하지 않았기에 현대에 와서는 온갖 변명과 회피의 궤변이 신념처럼 쌓인 것이다. 나아가서는 ‘왜구’의 노략질 역사가 다시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전쟁 피해자로 자처하는 ‘적반하장’이 그것이다. 일본 다수 대중들은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늘 부정한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중 중국인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만도 1,000만명이 훌쩍 넘는다. 타이완, 한국, 남양군도등 식민지와 아시아 각국 점령지에서의 학살은 셀 수도 없다. 1939년 국민징용령에 의해 한국인 노동자는 일본과 일본점령지로 끌려가 탄광, 비행장 건설등에 짐승처럼 내몰렸다. 1944년까지 한국 인구의 16%가 한반도 밖으로 강제 동원되었다.
그들은 부정한다. ‘그런 일까지는 없었다고’ 인간생체 실험의 731부대의 존재도 부정하며 난징대학살도 인정하지 않는다. 강제노역도, 성노예로 조선인 처녀들을 짓밟은 것도 오늘 날은 외면하고 또 회피한다. 회피로 끝나지 않고 이제는 적극적으로 역사를 날조한다.
오로지 전쟁터에 나가 전사하거나 아사, 실종되고 패전후 악전고투하며 일부만 귀환한 367만 일본 장병의 혼령에 애달파 하고 식민지 지배를 위해 또 이권을 위해 해외에 거주했던 321만의 일본이주민들의 패전 후 ‘지옥과 같았던 귀국길’을 이야기하고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희생자들을 공공연하게 전쟁 피해자로 등장시킨다. 이런 피해자 심리는 일본인 거의 전체에게 나타난다고 보여진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전쟁책임은 모호하게’ ‘전쟁범죄는 망각과 회피’ ‘오직 자신들의 피해에만 몰두하는 자폐적 정치의식’이 현대 일본인들의 집단심리라 느껴진다.
일본인들도 ‘일본 전범들의 전쟁책임 인정과 확실한 배상’에 대해 확고한 지지를 보내야 사회철학적으로 쇼와파시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이전투구의 일본의 역사에서 온 강탈과 침략의 사회철학과 단절하고 평화와 공존의 세계로 가는 첫걸음이라고 확신한다.
요약해보자.
1.일본은 자신의 문제를 대내적으로는 경쟁자를 강탈하고 대외적으로는 침략을 통해서 해결하는 방식의 역사에서 오는 사회 정치철학을 가지고 있으며 그 첫 번째 대상은 항상 한반도였다. 따라서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 위기는 한반도에 대한 도발의 전조로 파악해야한다. 한반도의 평화번영, 단결통일이 그들에게는 패배 일 것이다.
2.현재의 일본사회의 인권, 평화에 대한 철학적 허약성은 전쟁범죄와 반인륜적인 전쟁범죄에 대한 ‘망각과 회피’로 나타나며 군국주의 망령에 휩쓸려 침략국가(전쟁가능국가)로 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3. 아베 자민당 일당이 일본의 시민혁명을 거쳐 괴멸되는 ‘그 날’이 오지 않는 한 일본을 역사적 또 상존하는 위험한 숙적으로 보고 대비해야한다.
‘적을 증오하지마라. 그러면 판단력이 흐려져’ Never hate your enemies, It affects your judgement. (영화 대부의 대사에서)
“적을 가슴속 깊이 증오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이길 방법을 찾지 못한다”(내 생각에서)
2019년 아주 더운날 <글 쓰면서 뒤적거린 책들>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조용한 혁명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건국) 일본사의 변혁기를 보다: 사회인식과 사상 이야기 일본사.(김희영) 일본사의 여행: 역사 기행으로 읽는 일본사 처음 읽는 일본사: 덴노,무사,상인의 상중주, 일본 중국 근현대사 1,2,3 (삼천리 출판사) 기타 몇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