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끼, 이 사람!”
민 선달이 소리를 질렀다.
“아직 초시 밖에 치르지 아니한 한량(閑良; 아직 무과에 합격하지 못한 응시생)이 벌써부터 과락(科落; 불합격)을 논해? 자네 왜 이리 비관적인가?”
좌중(座中;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웃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과락(果落)’은, 열매가 떨어지는 모양을 말하는 것일세. 시험에 떨어진다는 과락(科落)이 아닐세.”
귤산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일순(一瞬; 1초 만에), 민 선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곧 평정을 되찾고 큰 소리를 쳤다.
“과거 시험을 앞두고서는, 모든 종류의 부정 타는 것을 회피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과거 시험날 미역국을 마시면 미끌미끌한 미역 때문에 시험에 미끄러진다고 해서, 그 날이 설령 생일이라 하더라도 미역국을 절대 안 먹지 않습니까. ‘과락(科落)’이란 단어와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 소리는 같고 뜻이 다른 말)인 모든 단어도 역시 쓰지 말아야 합니다. 하물며 우리 재희(성남이의 본명)가 단군 이래 최대의 무과 입시(入試) 부정 사건에 휘말려,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두고도 홍패(紅牌; 과거급제자에게 주던 합격증)를 따내는 것이 불확실한 지금,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재희라고, 이제 겨우 두 번 볼 뿐인 성남이와의 인맥을 은근 슬쩍 과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귤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입시 부정이라니?”
이에, 민 선달이 신나서 자신이 들은 소문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제가 장원급제할 때만 해도, 기사(騎射; 말 타고 활 쏘기)에 부정(不正)이 개입할 일은 없었습니다. 아닌 말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화살을 쏘는 데, 빗맞은 화살을 맞았다고 우길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재희가 모든 화살을 백발백중(百發百中; 명사수)으로 과녁 정중앙에 맞추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얘를 견제(牽制;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억누름)하려고, 말도 안 되는 일을 허용했답니다. 애기살 하나 쏠 줄 몰라서 자기 화살에 자기가 맞은 웬 멍청한 안동 김 가 놈을 과락으로 실격시키기는커녕, 기본 점수를 부여한데다, 마상편곤(馬上鞭棍) 시험에서는 편법(便法; 꼼수)으로 무기까지 편곤이 아닌 철퇴를 쓸 수 있게 했다지 뭡니까.”
“허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귤산은 자기 일처럼 분개했다.
“무과 시험을 주관하는 이는 병조판서(兵曹判書; 정2품으로 오늘날의 국방부장관) 대감이 아닌가? 내, 판서 대감께 이 일을 말씀드려 보겠네.”
그 때까지 묵묵부답이던 성남이가 입을 열었다.
“부디 그렇게 하지 말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병조판서 대감께서 주상 전하의 국구(國舅; 왕의 장인) 되시는 노부(魯夫; 철종비 아버지 이름)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왕비의 아버지 칭호)의 부탁을 받아 그리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허허, 이 나라가 어찌 되려고, 가장 공평해야 할 무과 시험에서 이런 일이... 쯧쯧.”
귤산이 한숨을 쉬며 혀를 찼다.
밥상이 나왔다.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았다.
남산골, 딸깍발이, 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몰락한 양반, 청빈(淸貧; 깨끗한 가난) 같은 환상을 깨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가장 큰 제사를 지낼 때에도, 9첩반상은 차린 적도, 받아본 적도 없었다.
"내 잃었던 조카를 다시 찾아, 오늘 상차림에 정성을 다하라 애썼으니,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들게."
홍 판사가 성남이를 보며 짐짓 다정하게 일렀다.
맨 앞 중앙에 밥과 국이 놓여 있었다.
밥은 보리를 단 한 톨도 섞지 않은 쌀밥이었고, 국에는 쇠고기가 둥둥 떠 있었다. 우리 집에서 쇠고기는 특히 귀해서, 민유중 6대조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1년에 단 한 번 먹을 수 있는 귀한 것이었다. 놀랍게도 고깃국에는 고기가 무, 파보다 많이 들어 있었다. 이는 생전 처음 보는 조리 방식이었다. 오른쪽으로 숟가락과 젓가락이 상 모서리와 평행하도록 얌전히 배치되어 있었다.
밥 뒤에는 간장, 고추장, 초고추장 종지 셋이 나란히 놓였다. 그 뒤로는 무려 아홉 가지나 되는 반찬이 화려하게 상을 장식했다.
오른쪽에는 더운 반찬이 고기와 함께 자리잡았다. 불고기, 너비아니 구이, 장조림, (조기로 보이는) 생선구이가 동그마니 모여 있었고, 맨 우측 가장자리에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위용을 뽐내었다.
왼쪽에는 차가운 반찬이 채소와 함께 있었다.
간장 종지 바로 뒤 가운데에는 민어회가, 그 왼쪽에는 파전이, 맨 좌측 가장자리에는 아구찜이 존재했다.
그 뒤쪽 줄에는 순서대로 황태채볶음, 고사리무침, 숙주나물이 대기하고 있었다.
맨 뒤에는 배추김치, 무김치, 그리고 동치미가 자리잡았다.
반찬 아홉가지, 찌개 한 가지, 찜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상차림이 겸상이 아닌, 외상으로서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한 상씩 돌아갔다는 점이다.
'대체 판사 대감의 부귀함의 끝은 어디인가.' 내가 생각했다. 정승이셨던 외할아버지 댁에 가서도 이토록 잘 차린 상을 받은 적은 없었다.
지극히 부담스러웠다.
잘 차린 상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건 아닌지.
심호흡을 했다.
다행인 것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 내가 최연소라 수저를 가장 늦게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숨을 내쉬고는 최대한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소녀 혼자 아무런 시도 짓지 않았지요. 이제 밥상이 나왔으니, 어르신들이 수저를 드시는 동안 한 수 읊겠습니다. 판의금부사 (종1품, 오늘날의 경찰청장) 대감 및 귤산 선생님(현재 직급이 없으므로 호에다 선생이란 경칭 붙임)께서 지어주신 7언 율시에다, 재종 (6촌) 오라비와 재희가 외운 5언 절구에 춘하추동 운을 받아 지어도 될는지요?"
"그리하게."
호기심 어린 시선이 집중되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시를 읊었다.
春來發芽苤喈睆
춘래발아비개환
吾等儜可聽再會
오등녕가청재회
夏灼熱太陽血灒
하작열태양혈찬
你側偕諸難克復
니측해제난극복
秋樂勞動代價得
추락로동대가득
禾䄪致賀年勞苦
화초치하년노고
冬雪梅香天地滿
동설매향천지만
再臨春偫我迺耲
재림춘치아내회
봄이 와서 싹이 트고 꽃이 피어 새 소리 온 세상에 가득하니
서로를 부르는 소리 들을 수 있어 우리 다시 만났네
여름의 강렬한 태양 아래 피와 땀을 뿌려도,
그대가 곁에 함께 있다면 모든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네.
가을이 기쁨을 안겨주는 것은, 그 동안 땀 흘린 것에 대한 값을 얻음이라.
고개 숙인 벼 이삭이 1년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네.
겨울을 맞아, 눈 내리고 매화 향기 천지에 가득하니,
다시 올 봄을 기다리며,
내 여기 씨를 뿌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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