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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판타지연재소설]민족혼의 블랙홀 제27화 고리 노리개[環珮]
게시물ID : readers_3404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HK.sy.HE
추천 : 1
조회수 : 458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9/08/11 02: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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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혼의 블랙홀


 

27화 고리 노리개[環珮]

 
 
남산골 딸깍발이처럼 생긴 판사 대감이 시를 읊었다.
 
☆ ★ ☆ ★ ☆ ★
 
浿江兒女哭如歌
패강아녀곡여가
 
寒食年年佩酒過
한식년년패주과
 
環珮無聲明月在
환패무성명월재
 
樓臺如夢落花多
누대여몽낙화다
 
令人悽愴空山色
영인처창공산색
 
當日芬華逝水波
당일분화서수파
 
乙密城頭春草路
을밀성두춘초로
 
香銷紅歇柰愁何
향소홍헐내수하
 
대동강 어린 소녀들은 울음소리가 노래와 같아,
 
한식(寒食; 음력 45일 제사 지내는 날) 매해마다 술을 갖고 지나간다.
 
고리 모양 둥근 노리개는 밝은 달 아래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아무 소리 없구나.
 
높은 건물에서 점점이 떨어지는 꽃이 꿈결과 같네.
 
영애께서 지금 나를 슬프게 하니, 이는 산 빛깔이 텅 비었음이라.
 
그 시절 향기롭던 꽃은 파도에 흘러가 버렸노라.
 
을밀대(乙密臺; 고구려 시대 누각) 부근에서 봄을 맞아 풀이 무성한 길에,
 
향기가 사라지고,
붉은 빛[]이 다한
그 근심을 어찌하면 좋을꼬.
 
☆ ★ ☆ ★ ☆ ★
 
잠시 적막이 흘렀다.
 
 
 
오오, 참으로 멋진 칠언절구(七言絶句; 7글자를 한 행으로 맞추어 지은 한문시)입니다!”
 
귤산(橘山)이 뒤늦게 외쳤다.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소용없었다.
 
내가 차분히 반격의 포문을 열었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대감, 어리석은 소녀(小女; 자신을 낮추는 말) 무지하나, 시 속에 담긴 뜻을 모를 만큼은 아닙니다. 부디 하실 말씀이 있거든 밝히어 확실하게 명언(明言; 돌직구 날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민 선달이 놀라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재종(再從; 6) 누이? 내 귀에는 그저 운율을 잘 맞춘 빼어난 7언율시로 들렸는데?”
 
내가 설명했다.
 
첫 행에 나오는 패강(浿江)은 대동강을 일컫는 말이고, 대동강은 평양에 있습니다. 평양에 있는 어린 소녀라 함은, 평양 기생을 뜻하는 은어(隱語; 자기들끼리만 쓰는 말)입니다. 소녀에 대한 시를 지으신다고 하면서, 첫 줄부터 대뜸 평양 기생을 언급하심은, 비단 소녀뿐만 아니라, 소녀의 아버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묵묵히 듣고 있던 성남이가 판사 대감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화를 내었다. 나는 손을 들어 성남이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이어서 시를 분석해 나갔다.
 
“‘해마다 한식이면 술을 갖고 지나간다.’는 말씀은, 곧 제사를 지낸다는 뜻입니다. 제 아버님 슬하에 기생과 같은 딸 저 홀로 있어, 나중에 제사 지낼 남자 후손이 아무도 없게 될 것이라는 비웃음 섞인 어조로 들립니다.”
 
그런 것이 아닐세.”
 
처음으로, 판사 대감의 흰 수염에 가려진 얼굴에 당황의 빛이 스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했다.
 
환패(環佩; 고리 모양 둥근 노리개)를 차고 있던 분은 바로 여기 있는 재희(在羲; 성남이의 정식 이름, 성남이는 아명이다.)의 모친입니다. 지난 십 수 년 동안 아무 소리 없이 조용히 살더니, 뭐하다가 지금 나타나서 존재감을 과시하냐는 질문입니다. 더 이상 시끄럽게 굴면, 높은 건물에서 점점이 떨어지는 꽃 같은 운명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경고로 들립니다.”
 
성남이의 손이 반사적으로 품속으로 들어갔다. 영주에서 한양으로 올라올 때 도적떼를 만난 이후로,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단도를 꺼내려는 손길을 꽉 잡아 저지했다.
 
제가 재희를 판사(判事; 판의금부사의 준말) 대감 앞에 데려옴으로써, 판사 대감을 슬프게 만들었고, 그 이유는 재희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재희 부친 되시는 판서 대감이 살아 계실 적에, 향기롭던 부귀영화는 모두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아니,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니까!”
판사 대감이 강하게 부정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각 행의 뜻을 계속해서 풀어 나갔다.
 
을밀대는 고구려 시대에 세워진 누각이고, 고구려는 상무(尙武; 무예 덕후)적 기풍(氣風; 특정 집단의 공통적인 성격)이 충만한 곳이었습니다. , 재희가 청춘을 맞아 무과에 입성하고자 하나, 풀이 무성하니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것이라고 암시하시지 않았습니까?”
 
마지막 일침을 가했다.
 
거기다 마지막 행에서 붉은 빛이 다한다는 뜻은, (; 붉다는 뜻) 씨 성을 지닌 재희 부친 판서 대감이 돌아가시고, 그 짐이 여기 계신 판사 대감께 돌아왔으니 그 근심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반문 아니십니까.”
 
판사 대감의 눈에 흥미롭다는 빛이 반짝였다가 곧 사라졌다. 다음 순간, 판사 대감의 딸깍발이 같던 꼬장꼬장한 기색이 확 지워지고, 외롭고 피곤하며 힘들어 보이는 노인네의 인상이 살아났다.
 
민 소저(小姐; 아가씨), 아니 영애(令愛; 소저보다 한 단계 높인 말)의 총명함은 듣던 대로 경천동지(驚天動地; 세상을 놀래키다)할 지경일세. 내 오랜만에 여기 있는 귤산과, 또 손님으로 온 민 선달과 더불어 근 십 년 만에 처음 만나는 조카가 너무 반가워서, 그만 주책 맞게 자랑질을 하고 말았네. 처음 보는 조카 앞에서, 내가 시 짓는 재능이 있다고 뽐내고 싶었음이야. 사실을 고백하자면, 실은 이 시는 방금 술김에 지은 것이 아닐세.
 
내 저~기 저,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안 한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평안감사(平安監司; 2, 현재의 평안도지사)를 하지 않았었나? 그 때 유명하다는 평양 기생 무덤 근처에 가서, 친한 지기(知己; 절친)들과 술잔을 기울이다가 시 짓기 내기를 했네. 당시 우석(友石)이란 막역지우(莫逆之友; )가 낸 운율(韻律; 한시 짓는 규칙)에 맞춘 것뿐이네. 그 시를 외워 두었다가, 조카 앞에서 내 뛰어남을 자랑하기 위해 지금 써 먹은 것뿐이네. 영애가 생각하는 것만큼 이 늙은이는 그리 똑똑치 못하네.”
 
그러더니 정말로 치매에 걸린 노인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말을 믿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오늘날의 경찰청장) 정도 되는 인물이 종4품 사도시(司䆃寺) 첨정(僉正) 딸에게 굳이 거짓말까지 해 가며 아쉬운 변명을 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침묵하고 있는데, 잽싸게 민 선달이 끼어들어 다시금 분위기를 바꾸려는 시도를 했다.
 
허허허~ 우리 재종누이는 너어~어무 똑똑해서 탈이노라! 요 조그만 머리에 한시(漢詩; 한문 시)만 잔뜩 들어가지고! 아 글쎄, 귤산 어르신! 여기 있는 제 재종누이가 글쎄 돌 무렵에 말을 하고, 서너 살에는 글을 읽지 않았겠습니까? 당숙(唐叔; 5)께서 외동딸을 지나치게 아끼시어, 날마다 끼고 친히 교육하시기를 그 어느 아들한테 하는 것보다 더 하셨사옵니다. 덕분인지 계집 머리에 이상한 생각만 꽉 들어차 가지고, , , , !! 어린아이가 똑똑해 보이려는 치기로 보아 너그러이 넘어가 주시지요.”
 
라며, 민 선달은 필사적으로 귤산에게 구원 요청을 보냈다. 다행히도 귤산은 구원 요청에 응했다.
 
아니, 아니, 거 첨정 댁 영애! 사내라도 방금 영애가 했던 것처럼 기막힌 해석은 못 해낼 거요! 덕분에 시()의 흥취(興趣; 멋있음)가 한결 살아나는구려! 하나의 완성된 시를 전혀 반대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음을, 내 이제 알았소. 내가 지은 시도 한 번 그런 식으로 엮어 주지 않으려오? ‘이끼 푸르다는 구절을 ()’ 씨에 관한 구절로 해석하면 되겠소? 껄껄껄~”
 
민 선달과 귤산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하자, 칼이라도 꺼낼 듯이 살벌했던 분위기가 차츰 누그러들었다.
나 역시 내가 너무 과대해석을 했노라 여기고 넘어갔다.
 
 
다과(茶菓; ) 상이 나왔다.
우리집에서 쓰는 평범한 백자보다 훨씬 값진 백자에, 푸른 염료로 무늬가 상감(象嵌; 파서 새김)되어 있었다. 나도 차를 한 잔 따라서 마셨다. 매실차 특유의 달콤한 향이 입 안에서 점점 진해졌다. 뒷맛이 썼다.
 
차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분명한 민 선달이 화제(話題; 이야깃거리)를 전환했다.
 
돌아가면서 시를 짓고 있었지요? 소관(小官; 무과급제자이기에 본인을 작은 리라 칭한다.)은 엄친(嚴親; 자기 아버지를 남에게 높여 부름)께서 집 팔고 땅 팔아 무과에 급제할 수 있도록 스승을 붙여 주셨지만, 막상 문과가 아니라 그런지 시문(詩文)에는 도통 능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평소 외우고 있던 시 한 수 여쭙겠습니다!”
 
아무도 요청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순발력과 타고난 추임새를 넣어 시를 외웠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 ★ ☆ ★ ☆ ★
 
春水滿四澤
춘수만사택
 
夏雲多奇峰
하운다기봉
 
秋月揚明輝
추월양명휘
 
冬嶺秀孤松
동령수고송
 
봄에 눈 녹아 흘러든 물이 사방 연못에 가득하고,
 
여름에 봉우리를 덮은 구름이 여러 모양을 띄우네.
 
가을 하늘 영활한 달은 반짝반짝 밝은 빛을 비추고,
 
차가운 바람 부는 겨울 언덕 위에는 외로운 소나무만 빼어난 자태를 홀로 지키고 있구나.
 
☆ ★ ☆ ★ ☆ ★
 
그러더니 성남이를 쿡, 하고 찔렀다.
 
뜻을 알아차린 성남이가 말했다.
 
판사 대감과 관찰사(觀察使; 오늘날의 도지사) 영감(令監; 2품을 높여 부르는 호칭), 그리고 선달(先達; 무과급제자)께서 시를 한 수씩 지어 주셨으니, 부족하나마 저 역시 7언까지는 아니더라도, 5언절구 하나라도 지어 보답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합니다. 선달 형님이 지어 주신 춘하추동(春夏秋冬; 사 계절)에 운(; 한시 짓는 규칙)을 맞추겠습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성남이가 운을 떼었다.
 
☆ ★ ☆ ★ ☆ ★
 
春芽綠陰勃
춘아녹음발
夏一時茂盛
하일시무성
 
秋熟實果落
추숙실과락
 
冬逝必再回
동서필재회
 
 
봄에 새싹이 나고 녹음이 우거지니
 
여름 한 철 무성하여라
 
가을에 무르익어 열매 떨어지니
 
겨울이 지나 다시 만나리
 
☆ ★ ☆ ★ ☆ ★
 
마지막 연을 읊으며, 성남이는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이 시를, 일시적으로 권력을 잡은 세도가의 권세가 언젠가는 무르익어 떨어지고, 나름의 응징을 받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민 선달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예끼, 이 사람!”
 
별안간, 민 선달이 성남이의 머리를 콩, 하고 쥐어 박으려 하며 화를 냈다. 성남이는 기민한(機敏; 빠른) 운동신경으로 냅다 피하며 외쳤다.
 
왜 이러십니까?”
 
민 선달이 소리를 질렀다.
 
아직 초시 밖에 치르지 아니한 한량(閑良; 과거 응시생)이 벌써부터 과락(科落; 시험에 떨어짐)을 논해? 자네 왜 이리 비관적인가?”
 
 
-28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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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이 소설 구문마다 사진을 첨부해서 총 38장입니다. 그런데 오유는 글을 한 번 작성완료 누르면 수정시 사진첨부를 못 하게 되어 있네요? 임시적으로 아래 링크로 들어가 사진 감상해 주시고, https://m.blog.naver.com/dankebitte/221612491742 혹시 컴퓨터로 오유에서 책게 글 작성시, 사진 에디터 모드에서 제대로 첨부하는 법 아시는 분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시면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제가 2016년에 가입한 이래, 로그인도 안 하고 날마다 눈팅만 하다가 요즘들어 글 쓰려니 에디터 사용 및 사진 첨부가 어렵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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