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혼의 블랙홀
제26화 판서 동생 판사 대감
바싹 마른 얼굴, 움푹 들어간 생기 없는 눈동자, 코와 턱 주변을 하얗게 덮은 수염. 남산골딸깍발이 샌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하(棲霞; 아버지의 호)의 딸이라. 잘 오셨소. 서하의 반 듯~한 인품을 그대로 빼어 닮은 듯 하이. 조금 더 자라면 신사임당(申師任堂; 5만원권 지폐 주인공 본인이자, 5천원권 지폐 주인공의 어머니, 아들을 9번이나 장원급제 시킨 훌륭한 어머니로 이름을 날림)과 같이 훌륭한 부녀자가 될 듯 하오. 그런데 이쪽은......”
딸깍발이 판사 대감은 아버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 아버지가 기르던 성남이의 존재도 알고 있었을까? 의문이 들 새도 없이, 판사 대감이 성남이와 민 선달을 가리켰다. 신분 순서대로 소개했다.
“여기 이 갓 쓴 선달(先達; 무과 시험 합격 후 대기발령자)은 제 재종(再從; 6촌) 오라비이자, 치(致)자 덕(德)자 존함(尊銜; ‘이름’의 높임말)을 쓰는(閔)의 당숙(堂叔; 5촌) 어른의 아들 민희호(閔羲鎬)라 합니다. 주상 전하께서 즉위하신지 3년 즈음 되셨을 무렵, 무과에 갑과(甲科) 장원급제(壯元及第; 전국수석) 하였습니다.”
아들을 소개할 때에는 아버지를 함께 소개하는 것이 마땅한 예의이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같은 항렬인 당숙의 이름을 곧바로 말할 수 없어 최대한 높이되, 더욱 연장자이자 벼슬이 높은 판사 대감에게는 낮추어 말했다. 머리가 아팠다.
민 선달이 넙죽 절했다.
“청명(淸名; 뇌물을 받지 않는다고 명성이 자자)으로 이름 높으신 판의금부사 대감(判義禁府事 大監; 종1품 의금부를 다스리는 직책, 오늘날의 경찰청장)을 뵈옵니다.”
내 재종오라비가, 계속 귀에 걸리적거리던 ~노라 체를 쓰지 않고 제대로 인사한 것만으로도 한 시름 놓였다.
“장원급제자라고? 나라의 홍복(洪福)이네. 그럼 이 초립(草笠; 풀갓) 쓴 청년은 누군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딸깍발이 판사(判事; 판의금부사를 줄인 말) 대감은 추레한 차림새를 지적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판사 대감의 관심은 일직선으로 성남이에게만 쏠려 있었다.
“홍재희(洪在羲)라고 합니다. 작고(作故; 죽음)하신 백응(伯應) 판서(判書; 정2품 장관급) 대감의 아드님입니다. 소녀(小女)의 아버지께서 어릴 때 거두어, 아들과 같이 아끼며 기르셨습니다. 이제 여기 있는 제 재종오라비가 말하기를, 백응(伯應) 판서 대감과 판의금부사 대감께서 형제 뻘이라 합니다. 그리하여 재희에게 숙부를 뵙고 인사를 드리게 하고자 합니다. 병마(病魔)에 싸여 있는 제 아버지를 대신하여, 찾아뵙는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최대한 공손함을 담아 대신 소개했다. 만일 아버지께서 건강하셨더라면, 직접 홍 판사 대감을 찾아가 재희와 피로 이어진 친족들을 연결해 주셨을 테니,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딸깍발이 판사 대감의 얼굴이 붉어졌다. 흰 수염에 덮인 붉은 얼굴은 마치 눈 속에 파묻힌 썩은 석류를 연상케 하였다. 다음 순간, 붉은 기가 깨끗하게 사라졌다. 일견 인자해 보이는 미소가 그 자리를 채웠다.
“그... 그래. 네가 형님의 서자(庶子; 첩의 자식)구나. 이렇게 훌륭한 청년으로 장성(長成; 자라다)하다니! 정말 반갑도다.”
딸깍발이 판사 대감은 성남이의 두 손을 덥석 잡고는, 나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허물없는 기색으로 외쳤다.
“물론 네 아버지와 나는 친형제는 아니지. 그렇지만 내 아들 일순(一純)이가 네 아버지의 사후(死後) 양자(養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족보상으로 들이는 양아들)로 들어가서, 네 아버지와 나는 형제 뻘이 되었단다. 네가 있는 줄 알았더라면 내 아들을 형님의 양자로 입적시키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허, 허, 허!”
말끝이 심하게 떨렸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혈육을 만난 데 대한 기쁨일까?
그 때였다.
“판사 대감, 손님이 오셨으니 상을 보아 두라 일렀습니다.”
아까 대문에서 우리를 맞았던 선비가 들어왔다.
“이보게, 귤산(橘山)! 여기 내 조카가 찾아왔네 그려! 잘 보세. 돌아가신 백응(伯應) 형님을 꼭 닮지 않았는가?”
딸깍발이 대감은 탄성을 지르다가, 멈칫하고 우리 일행에게 ‘귤산(橘山)’이라 불린 선비를 소개했다.
“참, 이쪽은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 대감의 9대손인 경춘(景春)이라 하네.”
나와 민 선달, 그리고 성남이에 대해 아까의 지난(持難; 오래 걸림)했던 소개 과정을 다시 거쳤다.
“사도시(司䆃寺) 첨정(僉正; 나라에서 운영하는 곡창 실무자 종4품) 댁 영애(令愛; 남의 딸을 높여 부르는 말)에다, 무과 장원급제자, 그리고 돌아가신 백응(伯應) 판서 대감의 숨겨져 있던 아드님까지! 오늘 점쟁이가 이 집으로 놀러가면 길할(吉; 행운이 깃들) 것이라고 해서, 속는 셈 치고 놀러 와 봤더니, 대박을 쳤습니다! 돌아가면 점쟁이에게 복채 좀 더 얹어 주어야겠습니다.”
조상도, 귤산이란 호(號; 별명)도, 경춘이란 자(字; 장가간 뒤에 부르는 이름)도, 셋 모두 범상치 않은 사내가 말했다.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 대감이라면,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 시작된 한일전쟁) 때 주상 전하를 모시고 의주에까지 다녀오신 우의정 어른이시자,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어르신과의 죽마고우(竹馬故友; 불알친구, 어릴 적 절친) 일화로 유명하신 분 아니십니까.”
내가 아버지께 들었던 오성과 한음 이야기를 꺼내자 분위기가 더욱 부드러워졌다. 머릿속에서는 귤산(橘山)의 조상님이라는 오성이, 똥으로 빚은 만두를 한음이라는 친구에게 먹였던 일화가 떠올랐지만, 그 이야기까지 차마 입 밖에 꺼내어 말할 수는 없었다.
“네, 맞습니다! 어린 영애(令愛)께서 참으로 박학다식(博學多識; 아는 게 많음)하시군요. 백사(白沙) 선생(오성의 또다른 별명)께 미치지 못하는 후손이라, 더욱 부끄러울 뿐입니다.”
귤산(橘山)이 겸손한 척 했다.
먼저 술상이 나왔다. 그 차림새가 우리 집보다 훨씬 화려했다. 겸상하지 않는다는 법도에 따라, 방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1인당 한 상씩 돌아갔다. 상은 모두 비싼 자개로 장식한 동그란 모양이었다. 상 하나만 팔면 우리 집 가솔들을 한 달 넘게 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상 중앙의 간장종지, 오른편의 고추장, 왼쪽의 새우젓이 나란히 놓였다. 안주로는 한양에서 도통 구하기 힘든 오징어를 넣은 부추전과, 명태살을 저며 만든 동태전, 그리고 돼지고기 편육이 나왔다. 나에게는 술과 잔이 돌아오지 않았다.
“반가(班家)의 여식(女息; 양반집 딸)에게 술 권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니 괘념치 마시게.”
딸깍발이 판사 대감이 추가로 덧붙였다.
“오늘은 내 잃었던 조카를 다시 찾은 날이니, 마음껏 들게! 모자란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껄, 껄, 껄!”
함께 왔던 일행 중 민 선달의 기쁨이 가장 컸다. 그러나 자리의 가장 연장자인 판사 대감에게 술을 따라 드릴 때까지 기다릴 줄은 알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고 뻣뻣한 자세로 긴장하던 성남이조차도, 판사 대감이 성남이 아버지 판서 대감의 어린 시절 일화를 이야기해주며 흥을 돋우자 진지한 자세로 경청(敬聽; 열심히 들음)하였다.
“자, 우리 조카를 만난 첫 날이니, 다 같이 축하하는 마음에서 시 한 수씩 지어 보세나!”
술기운에 얼굴이 다시 붉어진 딸깍발이 판사 대감이 말했다.
“예,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판사 대감께서는 잃어버리셨던 조카를 다시 찾으셨다지요? 저는 최근에 9대조 백사(白沙) 선생께서 사시던 고택(故宅; 옛집)을 다시 찾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수 뽑지요.”
에헴, 헛기침을 하더니, 귤산(橘山)이 시를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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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祖舊居後裔尋
아조구거후예심
蒼松石璧百雲深
창송석벽백운심
遺風不盡百년구
유풍부진백년구
父老衣冠古亦今
부로의관고역금
내 조부께서 과거에 사시던 집을 후손인 내가 다시 찾았노라.
이끼 푸르러 무성한 돌벽에는 하얀 구름이 깊이 잠겨 있노라.
조부께서 남기신 풍습이 다하지 아니하여 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오니,
나이 많은 어르신의 의관(衣冠; 옷차림)이 옛날과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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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자기 자랑과 9대조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나오는 시였다.
“임진왜란이 있었던 때가 어언 3백 년인데, 그 때와 지금의 풍속이 같다는 말씀입니까?”
내가 물었다.
“그렇소이다! 무릇 요순(堯舜) 시대(기원 전 3천년도 더 되기 전, 중국 황허문명이 시작될 때)를 본받음이 소중화(小中華; 중국 명나라 멸망 후, 조선이 스스로를 지칭하던 말)로서의 마땅한 길이지요.”
귤산이 말을 받았다.
“영애(令愛)는 어찌 그리 영특하오. 내 일순이에게서 얻은 손녀가 있으나, 영애만큼 똑똑하지는 않네. 그런 의미에서, 내 영애에 대한 시를 한 수 지어봄세.”
엣헴, 판사 대감이 헛기침을 한 뒤 시를 읊었다.
-27화에서 계속-
출처 | 자작소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