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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구와 사림
게시물ID : history_1481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막켕이
추천 : 6
조회수 : 1467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4/03/17 21:31:30
사림을 정의하자면 조선 성종 이후 주로 언론기간을 통해 정계에 등장하였으며, 중소지주 출신의 재야 학자들로 길재 김종직의 학풍을 이어받은 자들을 말한다.

조선의 건국과정에 참여한 여말의 신흥사대부1)들이 누대에 걸쳐 왕조의 관인가문으로 세습적 지위를 누리면서 훈신, 척신으로 발돋음하고 경제적으로는 권력에 의지한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반면 역성혁명을 반대한 일부는 관직참여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지방의 중소지주로 머물면서, 향약, 향사례, 향음주례의 보급, 사창제의 실시, 유향소의 복립운동을 통해서 향촌에서의 세력을 구축하고있었다. -중략- 이들은 훈,척신의 특권적 비리행위를 비판하는 가운데 정치세력으로 성장해 갔으니 이들이 곧 사림파이다.2)
주로 이러한 내용이 학계의 통설이라 할 수 있다. 

헌데 성종조의 대간을 구체적으로 분석한 한 연구에 따르면3)는 지방에 근거를 둔 중소지주적인 인물들이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 진출하였다는 기왕의 견해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예시로써 사림으로 지칭된 인물들중에 김종직의 제자 남효온은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남재의 후손이며, 김굉필의 할아버지는 개국공신인 조반의 사위였고, 정여창은 정종의 손주사위였다. 사실 중소지주가 얼만큼의 토지를 소유한자를 지칭하는지도 불분명하다. 

훈구는 태조 때부터 용례가 나타나는데, 지칭하는 대상이 늘 달랐다. 공훈이 있는 고위관리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훈구로 지칭된 인물들 역시 사림과 가문적으로 차이가 적었다. 예를 들자면, 무오사화를 일으킨 장본인 가운데 훈구파의 대표적인 존재로 지목된 이극돈 인데, 그의 종손(從孫)4) 이수공은 김종직의 제자로 무오사화때 유배 되었다.  그리고 기묘사화 당시 심정과 함께 조광조를 죽음으로 몰아넣음으로써 훈구세력의 대표적 존재로 인식돼온 남곤은 남효온과 함께 남재의 후손으로 역시 김종직의 문인이었다.

 결국 훈구와 사림은 사회경제적인 차이가 실질적으로 없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1) 본문의 훈구와 사림이 구별이 어렵다 내용에는 포함이 안되어 제외했으나 신흥사대부 또한 중앙의 관료귀족과 별 구별이 안된다는 흥미로운 연구도있다.
John B. Duncan, <<조선왕조의 기원>>, 너머북스,2013.
2) 변태섭, <<한국사통론>>, 삼영사, 2003. p304~305. 
3) 정두희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성종대 대간 역임자 373명 분석한 결과, 본관을 알 수 있는 350명이 147개 가문에 분포되있으며 147명 가문가운데 27개 가문에서 절반이 넘는 178명이 배출되었다. 즉 성종대 대간에 진출한 대다수는 이미 중앙의 요직에 진출하였던 가문출신이 대부분 이라는 것이다
정두희, <성종대 대간의 사회적 배경>, <<조선시대 대간연구>>, 일조각, 1994.
4) 형이나 동생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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