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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맨의 하루#2 내가 본 최고의 사기꾼
게시물ID : humordata_182760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ahh
추천 : 17
조회수 : 6085회
댓글수 : 27개
등록시간 : 2019/08/09 13:12:28
영어로 사기꾼을 scam artist라던데 짧은 영어실력에 걍 scam이라고 해도 될 걸 왜 뒤에 artist란 단어를 불였을까? 그게 의문이었던 적이 있었지.
 
지금은 독립했지만 예전에 십수년간 철강회사를 다녔어. 대기업, 중견기업도 아닌 그렇다고 중소기업도 아닌 좀 어정쩡한 규모의 회사였지.
 
여건상, 담보를 100% 설정하고 거래를 할 순 없었어. 담보대비 200~300% 초과해 거래하는 건 다반사였고 오래된 업체는 심지어 1,000% 이상 물품 공급해준 업체도 많았어. 그러니 거래처 부도 한 방 터지면, 그냥 끝이야.
 
대기업이 아닌지라 법무팀이 있을 리 없었기에, 물품대금을 놓고 둘러 싼 크고 작은 소송 건이 생기면 단지 법정대학을 나왔다는 이유로 나에게 해결하라는 임무가 떨어졌었지.
 
그렇게 소송업무를 하다보니 노하우도 쌓이고 제법 실적도 쌓여갔어. 지금이야 법이 바뀌어 2천만원 이상 민사소송은 당사자가 직접 재판에 참여하거나 법률대리인(변호사)을 통해야지만 당시는 5천만원 이하까지는 걍 직원이 소송업무를 맡아도 되는 시절이었어.
 
하루는 부사장이 나를 부르는 거야. 나와는 정말 상극인 사람이었지. 왜 부르는지 알만했어. 이 사람,토지 사기를 당해 수억을 날렸다는 소문이 회사에 떠돌았었거던...
 
늘 날 갈구던 사람이 어쩐 일로 그날은 차도 한 잔 주면서 아주 살갑게 대하더라고. 들어보니 짐작한 대로 사기 건이 맞았어.
 
경남의 어느 곳에 공기업 본사가 이전한다는 소문이 돌자 해당 지역은 부동산 광풍이 불었지. 부사장이 수년간 알고 지냈던 사람 추천으로 근처 땅을 4억인가 주고 매입했는데, 아 글쎄 알고 보니 자기만 그 땅을 산 게 아니라 얼추 8~9명이 더 있다는 거야.
 
말하자면 한 필지의 땅을 이 사기꾼이 속여 10여명에게 판 거였어. 웃기는 건 사기당한 사람들의 직업이 의사, 변호사, 기업체 대표 등으로 그 지역에선 방귀 좀 뀌는 사람들이었어. 더 웃기는 건 부사장은 말을 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사람 그럴 사람이 아닌데...’를 연발하더라. 참고인으로 검찰조사까지 받았으면서 말이야.
 
아무튼, 사기꾼은 잠적했고 쌩돈 4억을 날린 부사장은 어디 말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았겠지. 그러던 중, 참고인 조사를 받은 지 한달 쯤이 지난 시점에 아 글쎄 사기꾼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거야. 한번 만나자고하면서 말이지.
 
나를 부른 이유는 그거였어. 마산의 고속터미널 앞 모 식당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어쩌면 좋겠냐는 거였어. ‘사기 치려 한 게 아니다.’ ‘형님 돈은 그날 만나서 갚겠다.’고 했다는 거야. 복음이었겠지, 쌩돈 4억을 날렸다 여겼는데 갚겠다고 하니 이건 뭐 그 기쁨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웠겠지.
 
설명을 해줬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경찰을 준비시키자. 마침 마산에 후배가 강력반 형사로 있으니 대기시켰다가 그넘이 돈을 갚으면 없던 일로 하고 만에 하나 약속대로 하지 않으면 일단 잡아넣자. 협상은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
 
사기꾼을 만나기로 한 날, 부사장 차를 내가 몰고 출발했어. 가는 차 안에서도 부사장은 그넘 칭찬을 계속하는 거야. 그 사람이 그럴 리 없다. 지역사회에 기부한 것도 수천만원은 된다.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다. 난 속으로 웃었지.
 
우린 약속시간 30분전 쯤 도착했어. 후배 형사도 미리 나와 있었고. 주위 동선을 살폈지. 마침 식당 앞에는 커피숍이 있었는데 들어가보니 맞은 편 식당 내부를 훤히 볼 수 있었어. 부사장에겐 우리가 동태를 쉬 살필 수 있게 식당 가장자리에 앉으라 하고는 후배 형사와 나는 커피숍 창가에 앉았어.
 
부사장은 사인을 주기로 했어. 그넘이 돈을 안 갚고 딴말하면 머리를 세 번 툭툭 치라고 말이야. 그럼 덮치겠다는 거였지.
그렇게 후배 형사와 난 기다렸어. 약간 흥분되더라. 모 대학의 영문과 4학년을 애인으로 뒀다는 그, 복지시설 자원봉사도 정기적으로 나갔으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기백만원의 돈을 척척 기부했다는 그, 해당 지역의 유지들을 상대로 수십억 사기를 칠 수 있었던 그 사람이 너무 궁금했던 거지. 물론 부사장은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지만 말이야.
 
저넘일까?하면, 그냥 지나고, 저넘 맞겠지?하면 또 아니고... 그렇게 시간은 흘렀지. 약속시간 20분쯤 지나자 머리가 벗겨진 영락없는 노가다 꾼 아니면 농사 짓고 막 집으로 향하는 촌부인 듯한 사람이 아 글쎄 식당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거야.
 
에이~ 저 사람은 아니겠지?라고 여기는 순간 식당 문을 탁 열고 들어가는데, 아 글쎄 부사장이 벌떡 일어나 입구 쪽을 보며 손을 흔드는 거 아니겠어.
 
... 대체로 사기꾼들은 말이야 겉모습이 번지르르해.... 곧 죽어도 외제차 끌고, 명품 옷을 걸치고 다니지. 아 근데 이 사기꾼은 걍 촌사람이야. 헐렁한 바지에 낡은 점퍼... 내가 이전에 경험해본 수많은 사기꾼의 행색과는 완전 반대였지. 내가 잘못생각한 걸까. 진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건가.
 
후배 형사와 난 커피를 리필해가며 식당 안을 주시했어. 무슨 심각한 얘기를 하는 듯 한데, 사기꾼이 도면인 듯 보이는 서류를 펼쳐 놓고 뭔가를 설명하는 듯 한데... 돈 만 주면 그만인데 아 글쎄 얘기가 계속 길어지는 거야.
 
30분쯤 흘렀을까? 사기꾼이 일어나더니 부사장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그냥 나오는 거야. 씨발~ 식당을 나온 그는 급하게 택시를 잡더니 그길로 쌩~~~. 후배 형사와 난 커피 값 계산도 않고 허급지급 나와 부사장에게로 달려갔지. 그때까지 부사장은 미동도 않고 무슨 도면인가를 골똘히 쳐다보고 있는 거야.
 
세 사람은 커피숍으로 다시 갔어. 이유를 물었지. 왜 돈을 갚지 않았는데 부르지 않았냐고?
부사장이 사기꾼이 준 도면이라며 서류 뭉치를 보여주며 그러더라. 그넘이 부사장에게 넘겨 주겠다고 한 땅이라며.
 
사기꾼의 명의가 아닌 타인 명의로 된 거제 시청 근처의 땅. 지금 시가로 4억 정도 하는데, 이걸 부사장에게 주겠다고 했다는 거야.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명의를 이전해야는데 이전 비용이 4천 정도 든다나? 명의를 빌린 사람에게 사례금 10% 정도는 줘야 한다면서 말이야. 자신은 지금 빈털털리니 형님이 4천만원을 주면 바로 명의이전을 해주겠다는...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띵~ 했어. 정말 그넘은 고수였던 거지. 돈을 떼이게 된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 확인 사살까지 하겠다는... 이미 4억 해먹은 넘이 4천만원 더 해먹겠다는 그 집요함.
 
4억 떼이게 된 사람의 심리는 그래, 이왕 떼이게 된 돈, 4천만원 더 들여 원금을 찾을 수만 있다면... 혹하는 거지.
 
그넘은 부사장만 만났을까? 졸지에 사기당한 나머지 사람에게도 분명 전화를 걸었겠지. 형님돈은, 아우님 돈은 꼭 갚겠다며 말이야. 그러면서 똑같은 방법으로 명의 이전 비용 수천만원을 요구했겠지.
 
사기도 경지가 있다는 걸 그때 알았어. 외제차 끌고 명품 시계 차고 좋은 옷 걸치고 다니는 넘들은 하수 중에 하수였던 거지. 진짜 사기꾼은 자신이 사기를 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다는 거지. 일상이 사기고 사기가 일상인 경지... 그리하여 검찰에 불려 가 참고인 조사를 받았음에도 사기꾼을 믿게 만들 정도가 되어야 진짜 사기꾼이라는 거지. 그제서야 사기꾼을 영어로 왜 scam artist라 하는지 이해가 좀 되었어. 사기를 예술의 경지까지 올려야 진짜 사기꾼이 아닐까 하는...
 
뒤에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 뭐해 뻔하지. 부사장은 처음으로 나에게 실컷 핀잔을 들었지. 이후로 회사에서 더이상 날 갈구지 않았어. 4천을 더 날리지 않은 거에 대한 보답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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