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 |
|
제24화 사랑의 반대는 평등
“모두가 죽지는 않았네. 살아서 멀쩡히 벼슬 잘 하고 있는 사람도 있노라. 바로 자네의 뒷배가 되어줄 수 있는 그 사람이.”
나와 6촌뻘인 재종형제 민 선달이, 성남이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약간 떨어져 앉은 내게도 입냄새가 훅 끼쳐왔다. 역겨워진 나는, 입냄새를 술 냄새로 조금이나마 바꾸어 볼 요량으로, 추동이를 불러 술상을 마련해 오게 하였다. 취해서 주정을 부리지 않을 정도의 양만큼.
순식간에 막걸리를 사발에 따라 성남이에게 한 잔 권한 민 선달이, 성남이가 따라 주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입에 묻은 허연 막걸리 자국을 닦았다.
“누군지 알고 싶지 않은가?”
“알고 싶지 않습니다.”
성남이가 단호하게 쳐 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어머니께서 저를 데리고 첨정(僉正; 종4품 쌀 관리직) 나으리 댁에 의탁(依託; 남의 집 살이)하신 후, 저희 모자는 지금까지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살았습니다. 심지어 첨정 나으리(정3품 아래 당하관을 부르는 호칭)께서 제게 개인 스승을 붙여 주신 덕분에, 분이 넘치게도 무과에 응시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마음속에서 계속 걸렸던 부분은 이것입니다.
‘피가 섞이지 아니한 나으리께서도 이토록 살뜰히 대해 주시건만, 어찌하여 나와 핏줄로 연결된 친척들은 코빼기 하나 볼 수 없는가? 정녕 역모죄로 연좌제에 걸려 모두 목숨을 잃었단 말인가.’
그런데 지금, 선달께서 제게 몸 성히 잘 살아 있으며, 벼슬길을 걷고 있는 친척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어머니와 단 둘이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할 적에, 누군지 모를 그 친척은 저와 어머니를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제 와 제가 무과 초시를 치름에 있어, 제가 혈연임을 밝히고 도움을 기대한들, 십 수 년 동안이나 전혀 왕래가 없던 친척이 그 얼마나 살뜰히 챙겨주겠습니까. 처음부터 그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성 싶습니다.”
“알고 싶지 않다니, 그 무슨 말인가! 자네 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가? 설령 자네가 나만큼이나 탁월한 실력으로 무과에 장원 급제를 한다고 해도! 비빌 언덕이 단 하나도 없으면, 나처럼 된다! 백수 건달! 장원 급제했는데도 여전히 한량 신세! 이미 충분히 경고한 것 같노라!”
술기운 때문인지, 민 선달이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에 울분이 가득했다.
“이렇게 몸소 찾아와 제 장래를 걱정해 주신 선달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성남이가 진중하게 말했다. 여름 햇볕을 하루 종일 온 몸에 받으며 무예를 단련한 피부가 구릿빛으로 빛났다.
“그런데, 대관절 저도 모르는 제 아버지의 친척에 대해 어찌 아십니까?”
민 선달이 다듬지 않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에헴, 요즘 내가 한양 안에서 내로라하는 한량(閑良; 현재의 고시생)들과 자주 어울려 술을 마시는 주막이 있는데 말이지. 거기에서 들었노라. 남양 홍(洪) 씨 성을 지닌 사협(士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의금부 종1품, 줄여서 판사라고 한다. 오늘날의 경찰청장] 대감이, 그 이름처럼 ‘선비[사(士)]’와 ‘협(協)’력하길 좋아한다고.”
민 선달이 스스로 속해 있는 주취(酒臭; 술 취한) 문화를 쌈박하게 인정하면서, 성남이의 ‘친척’에 대한 설명도 자연스레 곁들였다.
“또한 홍 가 성을 지닌 재희(在羲)라는 소년이, 우리 당숙 댁에 얹혀산다는 이야기는 이미 예전에 제사지낼 때 전해 들었노라.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했는데도, 여태껏 아무 벼슬자리도 얻지 못해서 몹시 몸이 달아 있었네. 누구라도 연줄이 있다면 찾아가 읍소해 볼 생각이었어. 그런데 이번에 재희(在羲) 그대는 초시에서 장원으로 뛰어난 실력을 보이지 않았나. 그 뿐인가. 한양 저잣거리에 있는 모든 주막은, 애기살을 맞고도 과락(科落; 부분점수 감점으로 떨어짐)으로 탈락하지 않고 다시 시험장에 나온, 재수 없는 안동 김 씨 일족을 얼마나 멋지게 쓰러뜨려 병신(病身; 당시 장애인을 지칭하던 단어)으로 만들었는지, 그 이야기로 밤낮 안 가리고 들끓고 있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지. 만약 나라면, 무과 시험 중에 중전 마마의 아들을 다치게 했을 때, 어디로 가서 하소연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같은 성씨, 같은 본을 지닌 홍 판사(判事) 대감이 생각나지 뭔가. 그렇게 해서 나는, 그대에 대한 정보와 홍 판사(판의금부사의 약자)에 대한 정보, 이 두 가지 정보를 하나로 이었네. 그리고 남양 홍 씨 족보를 조금 찾아 보았지. 그대와 판사 대감은 본래 삼촌뻘 되는 가까운 친족 관계이네. 원래 역모죄에 얽히면, 당사자와 같은 항렬(行列; 족보의 서열이 같으면 이름 한 글자를 공유함) 전체가, 대역죄인과 얽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바꾸거든. 그걸 감안해서 찾아보았네.”
성남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조용히 듣고 있다가 반론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이해했습니다만, 가당(可當; 옳고 당당함)치 않습니다. 그리고, 설사 선달 어른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제게 비빌 언덕이 생긴다 한들, 그것이 대체 선달 어른께 무슨 이득이 되겠습니까?”
민 선달이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바로 나~! 나! 나일세! 내게 이득이 되노라. 나도 그대 자신과 함께 추천해 다오! 작금의 과거 시험 부정행위를 판의금부사께 고하면서, 슬쩍 내 이야기도 해 주게. 무과 시험 장원 급제자가 있는데, 266위로 합격한 안동 김 씨 자제가 꿀보직으로 도는 동안, 강산이 한 번 변할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는, 발령 한 번 못 받았다고! 꼭 말해주게! 판의금부사께서는 주상 전하의 어명을 받아, 각종 비리나 죄를 추탈(追奪; 쫓아서 벌주다.)하는 업무를 맡고 계시니, 일단 그대가 판의금부사, 더 나아가 상감마마께 읍소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함께 상소를 올리든, 청탁을 하든, 효과가 있는 것들을 이용한 행위를 하게. 바로 그 순간 내가 그대와 함께라면 더욱 효과가 크지 않겠는가.”
군사에 관한 일을 총괄하는 병조판서(兵曹判書; 오늘날의 국방부장관)가 부당하게 처리한 일을, 의금부(義禁府; 왕명으로 죄인을 심문하는 곳)를 총괄하는 판사(判事; 오늘날의 경찰청장)에게 항의하라니. 어린 내 귀에는 꽤 솔깃하게 들렸다. 그러나 성남이는 허투루 인생을 산 낙관주의자가 아니었다.
“어찌하여 선달께서 직접 이 일을 판사(判事) 대감에게 이르지 않으시고, 번거롭게 저에게 찾아와 부탁하시는 것입니까?”
민 선달의 표정이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쪼르륵. 술을 한 잔 더 따라 들이켰다.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술이나 마시며 허송세월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네. 나 자신의 입신양명이 꺾이지 않기 위해 참 많이도 돌아다녔지. 연판장(連判狀; 다같이 서명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제출)에, 상소문에...... 그렇지만 홍 판사 정도 되는 고관대작(高官大爵; 지위가 높고 훌륭한 벼슬사는 사람)은 나 같은 건 만나주지도 않아. 심지어 과거 장원 급제자인데도 말이다. 역시 재희(在羲) 같이 가까운 친척이 직접 가서, 전직 형조판서(刑曹判書; 형벌을 관할하는 정2품 정승, 현대의 검찰총장)의 자제라고 말하는 게 접수가 빠를 것이노라.”
밥을 폭풍 흡입하던 바로 그 기상으로, 민 선달은 안주를 깡그리 먹어치웠다. 성남이가 술도, 안주에도, 손 하나 대지 않은 채, 이맛살을 무섭도록 찌푸리고 있는 것은 신경 쓰지도 않고, 마치 경쟁하듯 재빠른 속도로 상에 있는 모든 음식을 입 속에 털어 넣었다.
“자영아, 안주 더 없느냐.”
심지어 내게 안주를 추가로 더 달라고까지 했다. 아무래도 우리 일가붙이 전체가, 며칠 동안 먹는 것을 줄여야겠다. 그러나 손님 대접은 마땅한 예절이자 도리. 나는 추동이를 불러 현재 집안에 있는 먹거리라면, 비록 아껴 두었던 것이라도 내어 오도록 일렀다.
수박이 나왔다.
한석봉 어머니가 떡 썰 듯이 고르게 썰어, 채반에 층층이 담아 놓은 자태가 고왔다.
민 선달이 달려들어 한 입 깨물었다.
“아이고! 왜 이리 싱거운가? 온전히 물로 가득한 맛이노라.”
★ ☆ ★ ☆ ★ ☆
바야흐로 사납던 여름의 예봉(銳鋒; 날카로운 끄트머리)이 꺾이고, 입추(立秋; 24절기의 하나. 가을의 초입) 직후 초시를 치른 후의 일이었다. 매미 소리가 언젠가부터 서서히 사그라들더니 뚝 그쳤다. 대신 날개 네 개 달린 잠자리들이 매미가 없어진 빈 공간을 채우며 날아다녔다. 밤에는 귀뚜라미가 울었다. 공기 중에 서늘한 기운이 흘러, 더워서 잠 못 이루는 밤이 점차 줄어들었다. 가을의 향기가 점점 진해졌다.
나는 싫다는 성남이를 설득해서, 홍 판사(判事) 댁에 데리고 가는 중이었다.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군자는 어려움을 지켜내야 한다. 내 뜻을 굽혀 세속의 편한 길을 따르느니, 떳떳한 역경을 선택한다. 다만 가까운 친척 민 선달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 못 본 척 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논어 구절을 섞어 쓰며 급히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렇지만 속 알맹이의 진정한 뜻은 달랐다. 무과 시험에서 대놓고 특권과 반칙을 허용한 얄미운 병조판서에게 성남이를 잃고 싶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병조판서가 보여 주었던 두루마리 속 처자가 그림 속에서 튀어나와, 성남이의 손을 잡고 나와 떼어 놓는 망상으로 가득했다.
홍 판사 댁은 남산골 초입에 있었다. 종루가 있는 감고당(感古堂)에서 걸어가기에 거리가 꽤 되었다. 나를 업어주겠다는 성남이의 제안을 거절하고, 쓰개치마를 두른 채 성남이를 뒤따라 걸었다. 어머니의 것이라 제법 컸다. 치마 뭉치를 끌어안은 자세를 하고 열심히 걸으며, 나는 어떻게 하면 어린 소녀가 일면식 없는 남의 집에 방문하는 일을 그럴 듯하게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물론 내가 성남이를 따라가는 진짜 뜻은, 다시 병조판서의 경우와 같은 일이 생기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남에게 끌려 니지 않고, 내가 직접 상황을 만들어 운용하고 싶었다. 성남이에게는 “남의 집에 가서 엿볼 수도 없고, 또 상대방이 성남이에게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필요하면 옆에서 변호해 줄 사람이 불가결(不可缺; 없으면 안됨)하다. 그것이 아무리 어린 소녀일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해두었다.
의외로, 성남이는 나와 같이 걷는 것이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아씨, 평등(平等)을 아십니까.”
뒤에서 따라 오고 있는 내게 나직히 속삭였다.
“응. 어릴 적 어머니가 서학(西學; 천주교) 모임에 가서 배워 오셨고, 또 떡대 아저씨가 ‘제선(濟宣)’이라는 떠돌이 의원에게서 동학(東學)이라는 가르침을 배웠다면서 알려주더라.”
내가 대답했다. 초시 이후, 내 머릿속에서는 성남이가 이미 장원 급제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말을 편하게 했다. 다른 어느 누구에게보다도 편하게.
“우리 모두가 태어난 신분에 관계없이, 다 같은 사람이라며. 그러니 이를테면 과거시험 같은 것에서도, 차별이 없이 고르고 한결 같게 심사해야겠지. 바로 그 문제 때문에 우리가 홍 판사(判事; 판의금부사의 약칭) 댁에 가는 거고 말이다.”
“예. 그렇다면 아씨, 평등의 반대말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평등의 반대말? 불평등인가? 막, 병조판서 사촌은 쏘지도 않은 화살 가산점 받고, 이런 거?”
“아닙니다.”
성남이가 대답했다.
“평등의 반대는 사랑(思郞)입니다.”
내가 물었다.
“사랑(思郞)이 평등의 반대라고? 대체 어떻게?”
“평등이란 말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에게 똑같이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씨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과거 시험을 공정하게 치르는 문제 같은 경우에는 그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사랑(思郞)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마음을 다해 사랑(思郞)한다면, 그와 필적(匹敵;엇비슷)한 마음으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사랑(思郞)에 있어서만큼은, 평등이 불가(不可)합니다.”
성남이가 말했다. 목소리에 열기 비슷한 것이 담겨 있었다. 뒤따라 걷고 있는 나에게는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동안 우리는 묵묵히 걸었다.
-제25화에서 계속-
출처 | 자작소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