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안에 대하여 전문가들도 의견이 분분한데, 일개인으로서 섣불리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알지 못해도 떠들어 여론에 참여하는 게 민주주의 아니던가. 그래서 일단 떠들기로 한다. 물론, 시끄러운 상황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은 거로 알고 있다. 자기 생각만 옳다고 말하며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 모두 닥치길 바란다. 보통 그런 식이다. 신기하다. 왜냐하면 그런 바람은 전체주의적 속성이니까. 그러니까, 전체주의적 속성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이 나는 놀랍다.
돈만 되면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게 자본주의다. 과거엔 탐욕과 착취는 자본주의적 가치였다. 그러나 그런 속성은 엔진에 무리를 준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깨달았다. 그 누구도 탐욕과 착취의 대상이 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따라서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저항에 부딪힌 자본주의는 변한다. 때론 진화하고 때론 퇴보한다. 무엇이 진화고 무엇이 퇴보냐를 두고 왈가불가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렇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념의 자유를 지향한다. 이상적인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와 공산주의도 포용한다. 그럴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을 나는 가지고 있다. 다만, 이념 경쟁의 장을 무너뜨리려는 모든 시도, 예컨대 물리적 폭력은 배제해야 한다. 그것이 거의 유일한 규칙. 그 규칙만으로도 발전할 수 있는 게 민주주의다. 물론, 거기에는 공동체적 가치가 승리한다는 기본적인 믿음이 깔려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경쟁적인 민주주의 역시 저항에 부딪힌다. 선악의 잣대가 제 각기다. 주도권을 쟁취한 세력은 많은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큰 권력이다. 따라서 주도권 다툼은 개싸움을 방불케 한다. 개싸움의 당사자나 지켜보는 관객 모두 지친다. 나는 민주주의 역사가 짧은 대한민국이 바로 이 지점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보다 발전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헬조선의 그림자가 보이는 게 전혀 놀랍지 않다.
따라서 민주주의도 변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성숙한 시민을 요구한다. 나는 감정을 숭배한다. 감정 없는 논리는 껍데기일 뿐이다. 감정 없는 논리는 사이코패스적 결말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감정에 못 이겨 상대를 설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토론의 장 자체가 성립하질 않는다. 우리는 조금 점잖아질 필요가 있다. 좋은 토론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 그 교육이 절실하다.
이 글의 결말은 이렇다. 나로서는 주옥순을 이해하기 매우 힘들다. 그의 논리도 형편없다. 그의 폭력적인 모습을 보노라면, 일베의 폭식 투쟁보다는 덜 하지만,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그러나 그녀 역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모든 면에서 전문가가 아니다. 내가 모르는 사실을 그녀가 알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적어도 그 가능성은 열어두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연아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