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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판타지]민족혼의 블랙홀 제18화 남녀칠세부동석
게시물ID : readers_3401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HK.sy.HE
추천 : 1
조회수 : 43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08/02 01: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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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혼의 블랙홀

18화 남녀칠세부동석

가위에 눌려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짚었다.

눈을 떴다. 얼굴이 축축했다.

성남이가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흔들어 깨웠다.

“악몽이라도 꾸셨습니까? 열도 없는데 식은땀을 흘리셔서......”

광목천으로 만든 수건을 꺼내어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옆에는 떡대 아저씨 아낙이 근심스런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느 새 집안으로 옮겨져,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무과 초시는?”

내가 물었다.

“모두 끝났습니다.”

성남이가 공손히 말했다. 우울한 눈빛. 갑자기 그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좀 더 편하게 말하도록 하렴. 누가 봐도 넌 무과 장원 급제할 것 같은데!”

성남이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것이...... 정황상 힘들 것도 같습니다. 문과 시험에서 선접꾼(자리 맡는 사람), 거벽(답안 작성자), 사수(글씨체가 예뻐서 대필해주는 자)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왕왕 들었습니다. 그러나 무과만큼은 만과(萬科; 한 해에 만 명을 뽑던 무과제도)라고 불릴 만큼, 합격 인원이 많기도 하고, 또 실력을 만인 앞에서 무예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별일 없을 줄 알았습니다.”

“순진한 생각이십니다.”

떡대 아저씨가 쯧쯧, 혀를 찼다.

“이 나라의 백성에게서 공납(公納; 세금)을 거두어 무신(武臣)들에게 녹봉을 지급하지 않굽쇼. 공납을 낼 백성은 한정되어 있고, 그마저도 우리처럼 살 곳을 잃고 도적이 되어 유랑하는 데, 설령 만 명을 과거에 합격시킨다 한들, 어찌 만 명에게 전부 다아 녹봉을 지급할 수 있을깝쇼. 결국 벼슬길에 나가는 무신(武臣)은 원래 벼슬을 살고 계시는 나으리들의 자식들뿐이지 않겠소이까. 누구나 제 자식은 소중하니깝죠.”

“무과에서 장원급제를 하면, 자동적으로 종6품으로 제수(除授; 임용)받는다는 말을 들어서......”

“그 임용하는 놈 역시 벼슬 한 자리 시켜주고 싶은 아들이 있게 마련이죠.”

떡대 아저씨는 이 문제로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입 밖으로 모두 꺼내질 못하였다.

“초시가 끝나고, 시험에 불만이 있는 것 같은 자들과 모여서 이야기를 해 보았습니다.”

성남이가 말했다.

“모두들 불만이 아주 많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연통(공동명의로 단결)하여 상소를 올리고자 제안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직 복시(覆試; 2차시험)와 전시(殿試; 3차시험)가 끝나지 않았다면서, 또 항의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 관직에 나아갈 길이 막히지 않을까, 다들 몸을 사리더군요. 결국 아무도 상소문을 작성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성남이의 낯빛에 절망이 어렸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성남아, 너라도 상소문을 올리거라. 내, 현부인께 가서 말해보마. 종친 일가이시니, 상감마마와도 어떻게든 연(緣)이 닿지 않겠느냐.”

내가 말했다.

“......그렇게 했다가, 저 역시 임용되지 못하면, 평생 한량(閑良; 벼슬에 임용되지 못한 무과응시자)으로 살면서, 아씨께서 남의 가문에 시집가시는 꼴을 두 눈 뜨고 멍청히 쳐다봐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그 때, 방문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창호지 사이로 사람 그림자가 비쳤다.

“영애(令愛), 소관(小官; 관리) 면암(勉庵)입니다. 남녀가 유별(有別; 서로 달라 구별)하여, 이렇게 문 바깥에서 말씀드림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 중국, 일본과 교류하는 부서) 찬겸(贊謙)이었다.

“말씀해 보시게.”

악몽을 꾼 이후로

여전히 이불 속이었지만,

일어나 앉았다.

“퇴청(退廳; 관청에서 퇴근)하자마자, 초시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세도가의 자제가 과락(科落; 시험탈락)임에도 불구하고, 부정한 수단으로 편전(片箭; 애기살) 시험을 면피하였고, 또 마상편곤 시합에서 편곤이 아닌 철퇴를 들고 나왔다지요.”

“그렇습니다.”

“잠시나마 병법서(兵法書; 무과2차시험과목)를 가르쳐본 스승으로서 감히 말씀드리건대, 재희(성남이의 본명, 성남이는 아명이다.)는 복시(2차시험)에서도 장원(壯元; 1등)할 재목입니다.”

“그렇지요.”

“저 역시, 직(職)을 걸고, 상소를 올리겠나이다. 이렇게 우수한 인재가 부당한 이유로 초야에 묻혀 있다면, 조선은 발전할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들게 됩니다.”

“스승님, 아니 됩니다!”

성남이가 외쳤다.

“......이제 직(벼슬길)에 나아간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내던진다는 말입니까. 2년씩이나 기다렸다가 겨우 얻은 직분 아니겠습니까.”

정신을 차리고, 겨우 내뱉었다.

“무릇 사대부라 함은, 벼슬을 초개 같이 여기고, 뜻을 펴는 데 도움이 되지 아니한다면, 응당 언제든지 벼슬을 박차고 나올 준비를 해야 하는 법입니다. 더구나 순수하게 제 힘으로만 얻은 것도 아니고, 춘부장(春府丈; 남의 아버지를 높이는 말) 첨정 나으리의 추천으로 얻은 자리입니다. 춘부장께옵서 아들처럼 아끼시는 재희 문제라면, 저는 얼마든지 벼슬을 버릴 수 있습니다.”

“이제야 살 길이 피었다고 좋아하는, 고향에서 부정자를 기다리는 가족들은 어찌합니까.”

“옳지 않은 일이라면 마땅히 미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군자(君子; 인성이 바른 유교 이상적 인간상)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구차하게 옳지 않은 일을 외면하면서 나라의 녹(祿; 월급)을 받느니, 굶더라도 바른 길을 걸어 가장(家長; 한 가정을 이끌어가는 사람)으로서의 모범이 되고자 합니다.”

문득 노기(怒氣; 화난 감정)가 일었다.

“수오지심(羞惡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 군자의 바른 도리, 모두 다 좋습니다. 언제나 남정네들은 그리 말합니다. 엄친(남에게 일컫는 자기 아버지)께서도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 군자는 공명정대한 큰 길로만 다닌다.)이라 하시며, 언제나 바른 길로만 행하려고 온 힘을 다하셨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논밭은 관직에 나아가 백성을 섬기는 과정에서 모두 없어졌습니다. 노비조차 먹여 살릴 재정이 없어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제 엄친(嚴親)께서 위중하시니, 장차 고아가 될 저와 청상(靑孀; 젊은 나이에 소복을 입은 과부)으로 평생 수절하실 자모(慈母; 남에게 일컫는 자기 어머니)의 미래가 요원(遙遠; 앞날이 까마득)합니다. 이것은 눈앞의 불의(不義)를 바로잡는다는 작은 의만 따르고, 남겨질 가족을 생각하는 큰 의를 따르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제 엄친(嚴親)께서 생명을 다하여 천거(薦擧; 인재추천)하여 주신 벼슬자리를 그토록 쉽게 박차고 나오려 하다니요. 큰 뜻을 펼치라는 엄친(嚴親)의 뜻을 너무 업수히(얕잡아보다) 여기신 것 아닙니까.”

성남이가 중재에 나섰다.

“아씨, 아직 상소문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저 때문에 이런 무익한 말다툼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스승님, 말씀은 황송하지만, 제자를 생각하는 마음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제가 직을 건다는 말을 너무 쉽게 내뱉었습니다. 장부일언중천금(丈夫一言重千金; 남자의 한 마디는 천금과 같다.)일진데, 경솔한 저의 언사(言詞; 말버릇)를 영애(남의 딸을 높임)께서는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소 기세가 수그러든 찬겸(贊謙)부정자가 공손히 대답했다. 창호지를 통해 목소리가 울려 전달되었다. 어느 새 사위에 어둠이 내렸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재희가 상소를 올린다면, 저 또한 아래에 이름을 적을 것입니다. 상소문 또한, 문과급제자가 작성하는 것이 보기에도 좋고, 읽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소관이 이래뵈도, 글솜씨 하나로 서원지기가 된 몸입니다. 다만, 식솔(食率; 한 집안에 딸린 식구)을 생각해서 경거망동(輕擧妄動; 아무 생각 없이 나댐)하지 말라는 말씀만은 지극히 새겨 듣겠나이다.”

그러더니 한참을 우물거리다가 추가로 덧붙였다.

“영애께서는 도저히 그 생각이나 태도가 어린 아이로 보이지 않으십니다. 오늘 이 면암(찬겸의 호), 영애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창호지에 어른대는 그림자가 말했다.

“재희.”

“예, 스승님.”

“영애께서는 사리에 밝고 주관이 뚜렷하신 것이, 장성한 처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시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 하고, 영애께서도 처음 뵈올 적보다 그 고운 자태(姿態; 외모)나 사상(思想; 내면)이 자라셨으니, 너 역시 나처럼 내외(內外; 남녀가 서로 마주보지 않음)를 하도록 하여라. 이리 나와서 나와 함께 상소문을 작성토록 하자.”

뜬금없이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그러한 법도는 사대부의 자제들에게만 적용되고, 천인(賤人)에게는 적용되지 않습죠! 시방이 으떤 시상인디, 새똥빠지게 남녀가 칠세에 부동석이냔 말여, 내 말은! 부정자 나으리? 아니 그렇습죠?”

눈치가 아예 없는 것인지, 혹은 눈치가 귀신 같이 빠른 것일지 모를 아낙이 끼어들어 첨언(添言; 말을 덧붙임)하였다.

“양천(良賤)의 법도가 지엄함에 있어, 신분이 가장 높은 영애에게 내가 이미 말씀을 올렸으니, 내 이제 자네에게 말할 것을 허하겠네.”

찬겸(贊謙) 부정자가 뒤늦게 발언을 허락하였다. 천민은 양반이 먼저 말을 걸기 전에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그 지역 반상의 법도 때문이었다.

“자네 말대로, 현재 노비 문서에 올라 있는 자네들에게 내외를 하라고 말하지는 않았지 않은가.”

찬겸(贊謙) 부정자의 말투에 가시가 서렸다.

“더구나 재희는 천인(賤人)이 아니네. 홍 판서의 자제가 아닌가. 마땅히 내외를 해야지!”

떡대 아저씨가 반박했다.

“우리 대장께옵서 비록 홍 판서의 자제이기는 하나, 연지 곤지 찍고! 족두리 쓰고! 정식 맞절한 혼인에서 나온 정처의 자식이 아닌고로, 현재 사대부(士大夫; 양반)의 적자(嫡子; 정실 아들)로 대우받고 있지 않습죠. 그러니 내외를 안 해도 됩니다!”

성남이가 첩의 자식이라고 깎아내리는 것인지, 더 이상 얼굴을 못 보는 일을 필사적으로 막는 것인지 모를 말이었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 규정에 따라서, 성남이와 내가 내외(內外)를 해야 하는 것인지 여부에 대한 것으로 삽시간에 화제가 전환되었다. 내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말다툼에 참여하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그런 논쟁은 하찮은 것이었다. 과거시험에서 부정행위가 있었고, 그 부정행위가 계속되면 성남이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이 점을 지적하려고 입을 막 열었을 때였다.

“이리오너라~!”

감고당(感古堂) 바깥에서, 객(客; 손님)이 하인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19화에서 계속
출처 자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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