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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혼의 블랙홀
무과초시(武科初試; 1차시험) <4>
제17화 부정행위
비늘 갑옷의 사내가 마상용 철퇴를 들고 있었다. 은으로 도금된 기다란 막대 끝에는 긴 쇠사슬로 연결된 쇠구슬이 달려 있었다. 갓난아기 머리 크기의 쇠구슬에, 한 번만 맞아도 머리가 날아갈 것만 같은 뾰족한 쇠못이 거꾸로 박혀 있었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심심할 때 꺼내 읽은 책 중 하나인 『무비요략(武備要略)』에 그려진 모습 그대로였다.
“하하하, 항복하면 몸 성히 건강하게 탈락시켜 주겠다!”
심지어 비늘 갑옷은 기세등등하게 외치기까지 했다. 철퇴를 붕붕 휘두르며 으스댔다.
“저, 저, 저!”
나를 태우고 있던 떡대 아저씨의 어깨가 분노로 떨렸다. 정작 시험 당사자인 성남이의 관옥 같은 얼굴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도리어 심판관이 불필요한 헛기침을 해 댔다.
“흐, 흠! 올해부터! 초시 규정이 바뀌어! 마상편곤(馬上鞭棍) 시합에서는! 자체 제작한 무기를 허한다! 두 개의 막대가 쇠사슬로 매달려 있기만 하면, 개량 편곤도 족하다(괜찮다는 말)!”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었는지, 시험관의 얼굴이 시뻘개지더니, 고개를 슬그머니 돌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둘 중 한 명이 말에서 떨어지거나, 다치거나, 항복을 선언하면 승패가 갈린다.”
주위에서 불평이 쏟아졌다.
“뭐냐금메? 이런 얘기는 첨 들어보더래이?”
“한 방만 맞으면 대뜨번에 쎄싸리가 빠질 것 같쟎소(죽을 것 같다는 강원도 방언).”
“참~말로 불공평하데이~ 이런 법이 어디에 있는가.”
“활 잘 쏘는 수석감이니께루, 아예 작정해부렀써.”
“점마, 저 철퇴 든 점마는 아까 애기살 쏠 때, 바보 같이 자기 자신을 쏴 갖고, 의원에 실려간 금마 아니고?”
은빛 비늘이 화려하게 수놓은 갑옷 사이에, 팔 보호대 밑으로 피 묻은 붕대가 보였다.
“아까 분명 애기살 시험 안 보고, 가산점 35점 준다 했지예? 그럼 그게......”
“누구는 집안 좋아 화살 하나도 안 쏴도 기본 점수로 어물~쩍 넘어가고, 누구는 십 년 넘게 한량 노릇하면서 무과 수련해도 과락이라 안 카나!”
“시상에, 겅행(근데) 화슬 3발 중에서, 저윽이 한 발이 과녁으루 감수광, 혀야 과락을 면하는 게 안 기냐. 쟈이 우터하다. 상감께 도리질 쳐 부러(화살 3발 중 1발이 과녁에 맞아야 면과락인데, 저 놈은 지나치다. 임금께 고자질하자는 제주도 사투리).”
대기 시간이 많이 남은 지원자들은 불평하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하였다. 대장간에 가서 새로운 무기를 사 온다며, 무과시험장 문지기와 실랑이를 벌였다. 문지기는 내보내주지 않으려 했다. 우격다짐이 벌어졌다.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과거시험에서 누가 특혜를 받았네, 누가 가산점을 부당하게 받았네, 하는 말은 진작부터 들려왔어도, 이토록 노골적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요! 애기살에서 저 놈이 다치니까, 저 놈 손해 안 보게 전부 다 기본 점수를 준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저 양반녀석을 위해 원래 시험과목이었던 '장전'은 아예 폐지했다굽쇼!”
떡대 아저씨가 성을 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거나 말거나, 비늘 갑옷은 현란하게 움직였다.
“히~야!”
다치지 않은 오른손으로, 철퇴를 머리 위로 붕붕 돌렸다. 쇠사슬이 길었다. 말을 출발시켰다.
반대편에서 성남이가 출발했다. 말을 몰고 상대방에게 달려들었다.
말 두 마리가 서로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었다.
“너만 없으면!”
비늘 갑옷이 소리를 지르며 철퇴를 휘둘렀다. 움직임이 컸다. 번개가 번쩍 했다. 성남이가 든 편곤 끝 자편이, 철퇴의 쇠사슬과 서로 엉켰다. 쇠구슬의 둥근 면이 햇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철퇴의 쇠구슬이 편곤을 중심축 삼아 빙빙 돌며 감겼다.
바로 그 순간, 성남이가 움직였다.
상대방이 쥐고 있는 은입사 철퇴봉을 지지대 삼아, 쇠사슬에 얽힌 편곤을 당기며 말 등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놀란 비늘 갑옷이 무기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젖 먹던 힘을 다 해 철퇴를 당겼다. 바로 그 순간, 성남이는 비늘 갑옷이 끌어당기는 힘을 역으로 이용해 상대편의 말에 착지했다. 곧바로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비늘 갑옷이 말 등에서 떨어졌다.
“으악!”
운수 사납게도, 떨어지는 바로 그 순간, 여전히 움직이고 있던 말이 비늘 갑옷의 발을 밟았다. 우두둑, 소리가 났다. 비늘 갑옷은 발을 움켜쥐었다. 일어나지 못했다.
모든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눈 한 번 깜빡일 순간에, 어느 순간 성남이는 자신의 말이 아닌, 백마에 타고 있었다.
“홍 가, 승(勝)!”
시험관이 외쳤다. 수치로 인해 불그죽죽하던 안색은 어느덧 다시 밝아져 있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다른 응시자들이 함성을 질렀다. 우레 같았다.
현장에서 급조된 새로운 무기 규정의 혜택을 받은 이는, 지금은 진흙이 묻어 더러워진 은색 갑옷을 입은 사내, 하나 뿐이었다. 그 사내가 말에 발을 밟혀 중간에 퇴장하는 바람에, 불만의 목소리는 사그라들었다.
☆ ★ ○ ☆ ★
초시 최종 시험은 조총을 쏘는 시합이었다.
먼저, 조총 몸체가 되는 총신 내부를 깨끗하게 닦았다. 다음으로, 총신 안에 화약을 넣었다. 나무 꽂을대를 총신 안에 넣어, 화약을 제대로 다졌다. 탄환을 넣은 다음, 길이 1장 8척 정도의 기다란 막대기(장비의 장팔사모 정도의 길이)로, 탄환을 꾸욱 밀어 넣었다. 종이를 총알 나오는 구멍에 삽입한 다음, 다시 앞서의 막대기로 종이를 밀어 넣었다. 화문을 연 뒤, 점화약(불이 붙게 하는 폭약의 일종)을 화문에 넣고 화문을 살짝 흔든 뒤, 화문을 닫았다. 심지에 불을 붙인 뒤, 화문에 붙은 공이에 불붙은 심지를 끼우고서, 시험관의 구령에 맞추어 점화약이 담긴 화문의 덮개를 열어 발사했다. 성남이가 방아쇠를 당기자, 화약에 불이 붙으면서 총알이 발사되었다. 총을 쏠 때마다, 반동으로 몸이 뒤로 젖혀졌다. 한 번 장전하는 데 오래 걸리기 때문에, 응시자들이 돌아가면서 한 발씩 총을 쏘았다. 한 번 쏜 응시자들은 뒤쪽으로 가서, 총을 장전하였다. 표적에 가까이 맞힐수록 높은 점수를 받았다.
“홍 가, 5점!”
“김 가, 2점!”
“이 가, 3점!”
“박 가, 1점!”
시험관이 소리쳤다. 서기는 옆에 서서, 응시생 목록에다 점수를 받아 적기에 바빴다.
이어지는 총 소리를 계속해서 듣고 있자니,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떡대 아저씨의 머리를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뒤로 쓰러졌다. 다행히 떡대 아저씨의 어깨에 다리를 걸치고 있었고, 그 뒤에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사람들의 땀 냄새가 후욱 끼쳐왔다. 내 머리가 다른 사람의 어깨에 부딪쳤다.
“아씨, 왜 그러십니까?”
목마를 태워주던 떡대 아저씨가 급히 나를 내려, 안색을 살폈다.
“갑자기 왜 이리 창백해지셨습니까?”
시험 내내 말없이 울타리 너머로 구경하던 떡대 아낙이 나를 살폈다.
“얼른 집으로 모시랑께요!”
떡대 아저씨에게 업혀 집으로 갔다.
꿈을 꾸었다.
검은 복면을 쓴 일군의 무리들이 조총을 들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꿈속에서 나는, 그들이 나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숨어야 해!’
머릿속에서 애타게 소리쳤지만,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게 가위눌린다는 것인가.’
꿈 속에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총이 불을 뿜었다. 지금까지 본 번잡스러운 장전 과정 하나 없이, 깔끔하게 재장전되었다.
사람들이 쓰러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성남이를 찾았다. 저쪽에 있었다.
“성남아!”
그리 부르려는 순간,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기겁하며 눈을 떴다.
-18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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