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납치.포로>에 대한 일본과 한국역사속 사용언어 고찰(2)
게시물ID : history_2983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다윗김
추천 : 0
조회수 : 101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07/31 07:49:19
옵션
  • 창작글

<납치.포로>에 대한 일본과 한국역사속 사용언어 고찰(2)

경주김씨 백촌공파 김동암 할아버지 daum cafe.

목포 북교 초등학교 동문회 게시판.

2019. 7.30

 

 

 

제가 오래간만에 저의 대학 성적표를 보았습니다.2학점으로,92년도 가을학기에 <동양사>를 수강하였고 학점은 c학점.... 저희 학교는 신학교이지만 일반학부 10개 학과와 같이 주간에 강의듣는 경우이기에(선교 측면에도 필요함) 교양필수과목으로 학점을 이수한것인데 강사 선생님에게 일본은 왜 세계적인 강국인데 東洋史에는 중국과 인도 역사만 있나요? 물어보니 (그래도 한국 보다는 장르가 크지만) 율례가 () 행정...과학 기술등이 역사적 관점에서 있고, 기록이 있어야하지만 없기에 학자들이 일본을 기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충남대학교 석사과정을 마치고 시간강사로 학교에 처음 강의 오실때도 강의실을 못찾아서 제가 안내를.... 그 공부가 이렇게 써먹습니다. 전여옥 저서 <일본은 없다>는 동양사에서 없다는것이고 ,500년전 나가사키에서 포루투칼. 스페일에게 문을 open한 일본을 더욱 많이 연구 서술해야 할 것이다. 청나라 말기에 영국 사절단이 중국에 와서 국왕 문서를 주는데 중국왕이 영국왕이 와서 직접 조공하라고(얼마후 아편전쟁으로 홍콩을 양도 )로 하는일이 반복이 되지 않을려면 말입니다.

 

(본론)

삼국사기:검색 <왜군 약탈>

卷第二 新羅本紀 第二 > 벌휴(伐休) 이사금(尼師今) > 十年夏六月 왜인이 먹을 것을 구하러 오다(019306())/왜인이 먹을 것을 구하러 오다 ( 19306() )/6월에 왜인(倭人)070이 크게 굶주려 먹을 것을 구하러 온 사람이 1천여 명이나 되었다.

070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인(倭人) 및 왜군(倭軍)의 실체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왜인의 침략은 주로 식량과 사람의 약탈을 위해 게릴라식의 전술을 구사한 해적 행위였다(旗田巍, 三國史記 新羅本紀にあらわれた, 日本文化朝鮮2, 朝鮮文化社 編, 1975 김기섭 역,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 고대 한일관계사의 이해--, 이론과 실천, 1994, 109~118이종욱,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병의 정체, 한국사 시민강좌11, 일조각, 1992, 44~66). ()의 실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연민수, 5세기 이전의 신라의 대외관계,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1998, 340~370쪽 참조.

 

卷第二 新羅本紀 第二 > 유례(儒禮) 이사금(尼師今) > 四年夏四月 왜인이 일례부를 습격하다(028704())/왜인이 일례부를 습격하다 ( 28704() )/4(287) 여름 4월에 왜인(倭人)239일례부(一禮部)240를 습격하여 불을 놓아 태우고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고려사절요:검색 <왜구 침략>.

고려사절요 > 高麗史節要 卷29 > 恭愍王四 > 恭愍王 十九年 > 2> 왜적이 내포를 침략해 약탈하다/13702월 미상()

고려사절요 > 高麗史節要 卷31 > 辛禑二 > 禑王 五年 > 10> 목인길 등이 전라도에서 왜구와 싸우다/137910월 미상()/遣贊成事睦仁吉密直副使睦子安梁濟擊倭于全羅道. 先是, 仁吉在廟堂颺言曰, “倭賊侵掠州郡, 吾等在此飽食, 略不愧恥, 可謂有人乎.” 仁任怒其言逼己, 出之.(원문).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권31 > 신우2(辛禑二) > 우왕(禑王) 5> 2> 정지가 순천 등지를 노략질하던 왜구와 싸워 패하다/ 13792월 미상()/왜구가 순천(順天조양(兆陽) 등지를 노략질하니, 정지(鄭地)가 맞서 싸우다가 패배하였다. 경복흥(慶復興황상(黃裳우인열(禹仁烈)이 모두 최영(崔瑩)의 집으로 가니, 최영이 말하기를, “왜구의 침략이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여러 재상께서는 어찌 우려하지 않으시는 것이오. 정지 한 사람이 비록 용맹하더라도 그 많은 왜구를 어찌하겠소.”라고 하였다. 여러 재상들에게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최영은 또한 일찍이 이인임(李仁任)에게 말하기를, “국가에 어려움이 많은데 공은 수상(首相)이 되어 어찌 이에 대하여 근심하지 않고 다만 가산만을 생각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이인임은 말이 없었다.

 

승정원일기: <왜구침략> 검색.

승정원일기 459(탈초본 24) 숙종 37221일 경진 15/15 기사 1711康熙(/聖祖) 50金井山城을 축성하여 왜적을 방어하는 방안, 宋象賢別廟를 세워 人和를 수립할 것 등을 청하는 權以鎭의 상소

 

조선왕조실록:<왜구침략> 검색.

태조실록 1, 총서 76번째기사 명 사신이 태조와 이색의 안부를 묻다. 왜구의 침략을 태조가 격퇴하다/9, ()나라 사신 장부(張溥주탁(周倬) 등이 국경에 이르러서 태조와 이색(李穡)의 안부를 물었다. 이때 태조와 최영은 위명(威名)이 천하에 널리 알려졌으므로, 장부 등에게 이들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모두 밖에 나가 있었는데, 최영은 교외(郊外)에 나가 둔치고 있었다. 이때 왜적의 배 150척이 함주(咸州홍원(洪原북청(北靑합란북(哈闌北) 등처에 침구(侵寇)하여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아 거의 다 없어졌다. -중략-

하고는, 드디어 말에 올라 두란(豆蘭고여(高呂영규(英珪) 등을 시켜 그들을 유인해 오게 하니, 선봉(先鋒) 수백 명이 쫓아오는지라, 태조는 거짓으로 쫓기는 체하면서 스스로 맨 뒤에 서서 물러가 복병(伏兵) 속으로 들어갔다가, 드디어 군사를 돌이켜서 친히 적군 20여 명을 쏘니 시윗소리에 따라 모두 죽었다. 두란·종검(宗儉) 등과 함께 달려서 이를 공격하고, 복병(伏兵)이 또한 일어났다. 이에 태조는 몸소 사졸들의 선두에 서서 단기(單騎)로 적군의 후면을 충돌하니, 가는 곳마다 쓰러져 흔들리었다.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 것이 서너너덧 번 되는데, 손수 죽인 적군이 계산할 수 없으며, 쏜 화살이 중갑(重甲)을 꿰뚫어 혹은 화살 한 개에 사람과 말이 함께 꿰뚫린 것도 있었다. 적의 무리가 무너지므로 관군(官軍)이 이 기세를 이용하여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니, 넘어진 시체가 들판을 덮고 내를 막아, 한 사람도 빠져 도망한 자가 없었다. 이 싸움에 여진군(女眞軍)이 이긴 기세를 이용하여 함부로 죽이니, 태조가 영을 내리기를,"적군이 궁지에 몰려 불쌍하니 죽이지 말고 생포하도록 하라."하였다. 남은 적군은 천불산(千佛山)으로 들어가므로 또한 다 사로잡았다. 우왕이 태조에게 백금(白金) 50, 옷의 겉감과 안찝 5, 안장 갖춘 말[鞍馬]을 내리고, 또 정원 십자 공신(定遠十字功臣)의 칭호를 더 내렸다.

 

태종실록 11, 태종 648일 무진 3번째기사 1406년 명 영락(永樂) 4년 왜적이 안행량에서 전라도 조운선과 호송 병선을 약탈해 가다/ 왜적이 전라도 조선(漕船) 14척과 호송 병선(護送兵船) 1척을 안행량(安行梁)에서 약탈하여 갔다. 왜선 18척이 밤을 타서 침략하여, 490석을 탈취해 간 것이다.

 

세종실록 28, 세종 7614일 임자 6번째기사 1425년 명 홍희(洪熙) 1년 왜구와 싸우다 전사한 박원보의 아들 박덕중에게 관직을 제수하다/학생 박덕중(朴德中)이 아뢰기를,"아비 박원보(朴元寶)가 지나간 무자년에 창포 만호(槍浦萬戶)가 되었을 때, 왜구가 침략해 들어왔으므로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은택을 미루시어 후손을 등용하게 하소서."하니, 명하여 이조로 내려보내니, 이조에서 계하기를,"이제 자세히 조사하온즉 원보의 전사함이 적실하오니, 규정된 법에 의거하여 덕중에게 관직을 제수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중종실록 21, 중종 10112일 경오 3번째기사 1515년 명 정덕(正德) 10년 유순 등이 대마도와 화친하는 일을 논의하다/유순·정광필·김응기·노공필·권균·신용개·장순손 등이 의논드리기를,"대마도(對馬島)는 우리 나라에 죄를 졌으므로 화친을 허락할 수는 없으나, 일본 국왕을 인하여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교통(交通)을 청했으므로 마침내 그 화친을 허락하고 또 세견선(歲遣船)012) 의 절반을 허락했으니, 우리 나라의 은혜가 지극히 중한데도 대마도는 오히려 교만하게 즉시 와서 사례(謝禮)하지 않고, 또 약조(約條)에 의거하여 배를 보내지도 않으며, 사로잡아간 사람도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수년을 지나서야 비로소 국왕에게 의탁하여 세견선을 청하는 사신을 보내와서 예전의 예를 복구(復舊)하고자 하니 그 간교함이 심합니다. 관례를 지금 갑자기 그들의 청에 따라 예전의 예로 회복할 수는 없습니다."하니, ‘그리하라전교하였다.

 

(결론)

아버지의 고향,작은아버지.고모의 청소년시절,모교가 있는 일본에 대하여 글을 쓰기란 몇일간이나 부담이되고 고통이었습니다. 퇴근길에 사오신 복제 레코드판을 틀어놓고 일본 노래를 따라 부르시는 아버지.... 40세의 나이에 세상을 뜨신 우리 아버지.... 고모의 일본 초등학교 공부시절의 일본 이야기....아빠 다른 고모(세상뜨시고 당시 대판 거주)의 동생 가족 사랑에 보낸 전기밥솥.... 처의 근무지 대학교의 강oo 이사장 집안의 대판이야기들 .참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웠지만 진주만 기습과같다는 일본의 도라! 도라! 도라!에 무언가를 전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얼떨결에 쓴 글들 .... 사실 두나라가 싸운다고 해서 해결될 것은 아무것도 없는 시대이다. 세계는 이미 하나의 지구촌이기 되었기 때문이다.두 나라 국민과 정상들에게 하나님께서 솔로몬 같은 지혜가 넘치를 기도해본다.

 

 

스캔0004.jpg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