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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부터, 아버지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고 아버지는 가르치셨다.
平民肯種德施惠 便是無位的公相
평민근종덕시혜 편시무위적공상
士夫徙貪權市寵 景成有爵的乞人
사부사탐권시총 경성유작적걸인
평민이라 하여도 기꺼이 덕을 심고 은혜를 베푼다면 언젠가 무위의 왕공(자기 위 서열에 아무것도 없는 왕이나 공작)이나 재상이 되고,
선비라도 허영심을 지닌 채 권세를 탐내고 총애를 팔면 마침내 작위를 지닌 거지가 된다.
어린 나는 그 말씀을 철썩 같이 믿었었다.
내가 남에게 베풀면, 그만큼 남도 나와 내 자식에게 베푼다는 호혜주의(互惠主義; win-win).
군자가 덕을 베풀면, 그 도가 사해(四海; 온 세상)에 미치고, 결국 자기 자신과 온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정명론(定命論).
책에서 배우는 것과, 현실은 달랐다.
감고당(感古堂)을 찾아오는 손님은 점점 드물어졌다.
“어멈, 요즘은 빈객(賓客; 손님)이 드물지 아니하오.”
“죄다 제 잇속을 차리는 손님들이라, 나으리께서 자리를 보전하고 누우셨으니, 얻을 것이 없어 안 오는 것이지요.”
한편으로는 환자 병구완하기 좋다는 이점이 있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차가운 세상의 잇속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이럴 때 유일한 도움은 피로 이어진 혈족(血族)에게서 왔다. 아버지께서 다시 쓰러지신지라, 등청(登廳; 출근)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거늘, 어쩐 일인지 녹봉이 꼬박꼬박 지급되었다. 어머니께서 아버지께 쉬라고 강력히 권하며 하셨던 말을 참고해 보면, 외할아버지께서 힘을 써 주셨나 보다. 덕분에 아버지가 데려온 떡대 부두목, 수염난 낫 아저씨, 갈퀴 할아범, 꺽다리 아저씨 등 일가붙이들에게 적은 양이나마 품삯을 줄 수 있었다. 병자가 있는 집안에 손이 보태지니 한결 편했다.
아버지가 생사기로에 선 것과는 상관없이, 무정하게도, 세월은 잘 흘렀다. 어느새 성남이가 무과 초시(1차 시험)를 보는 날이 되었다.
전국에서 무과응시생인 한량(閑良)들이 하늘의 별무리 같이 몰렸다. 종로를 기준으로 제1시험장과 제2시험장이 갈렸다. 성남이는 감고당에 적(籍; 주민등록)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제1시험장을 배정받았다. 새벽부터 찬합(도시락)을 싸 온 어멈과 일가붙이들이 시험장 울타리 안쪽을 보려고 까치발을 세웠다. 주위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다른 응시생 가족들이 노숙하며 진을 치고 있었다.
“나두 한창 때, 씨름하면 족족 이겨서 상품으로 황소를 타 오곤 했네 그려. 허허허.”
떡대 아저씨가 자평하며 나를 목마 태워 높이 올려주었다. 덕분에 시험장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부두목씩이나 해 먹던, 천하장사를 한 번에 꺾어버렸으니, 응당 장원급제는 따 놓은 당상 아니겠습니까, 아씨?”
은근 슬쩍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이는, 도적질한 게 어디 자랑이라고!”
함께 따라온 떡대 아낙이 얼른 입단속을 시켰다. 다른 아낙네들은 아버지를 간호하는 어머니를 도와드리기 위해 집에 남았다.
부부가 애정 어린 말다툼을 벌이는 동안, 나는 시험 장면을 보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병조판서(兵曹判書; 국방부장관급, 정2품)가 어모장군(禦侮將軍; 정3품)을 우측에 거느리고 단상에 올랐다. 뒤에는 다른 시험관으로 보이는 문관 1명, 무관 1명이 서 있었다.
“우리 조선이 위기에 처할 때에, 누가 나라를 위해 싸울 것인가.”
병조판서가 선명한 한 마디를 뱉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만 명 넘는 청년들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이렇게 든든한 인재들이 무과에 지원하니 몹시 감개무량(感慨無量)함을 금할 수 없네(기쁘다는 뜻). 작금 조선의 상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안으로는 사색당파(남인, 서인, 노론, 소론으로 나뉘어 싸우는 붕당정치)가 횡행(橫行; 가득)하고, 밖으로는 양이(洋夷; 서양오랑캐)가 호시탐탐 침공할 기회를 노리는 풍전등화(風前燈火; 바람 앞의 등불)의 위기에 놓여 있네. 모쪼록 합격하여, 위로는 주상 전하와 왕실의 안위를 살피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외적으로부터 지키는 용장(勇壯; 용감한 장수)이 되도록 하게. 무운(武運)을 빌겠네.”
병조판서가 모두(冒頭; 처음) 발언을 하고 물러났다.
“사색당파는 무슨, 노론 혼자 다 헤쳐 먹다 못해, 이젠 온 천지가 안동 김 씨 세상인걸.”
안동 김 씨의 손에 홍 씨 일가가 풍비박산(風飛雹散; 패하여 사라짐)났던 고로, 지아비로 모실 이를 잃었던 어멈이 중얼거렸다.
첫 번째 시험이 시작되었다.
나무로 만든 화살을, 240걸음 바깥에서 과녁에 쏘아 점수를 매기는 시험이었다. 응시자는 많았으나, 대부분 실력이 형편없었다. 대부분 과녁에 맞히지도 못하고 저 멀리 떨어졌다. 아예 활을 제대로 당기지도 못하는 사내도 있었다.
성남이 차례가 되었다.
한쪽 눈을 질끈 감고 다른 쪽 눈으로 멀고 가까움을 쟀다.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이 날아갔다.
출처 | 자작소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