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제주도여행이다.
창혁선배가 소개시켜 준 벤처기업 사장이라는 오사장이 이번엔 친구들과 같이 가자고 난리다.
40대 중반인 오사장 친구들이 여대생 사귄다는 말에 부러워서 같이 좀 즐기자고 성화라고 한다.
누가 지 여친이라고...참....어이가 없다.
그래도 빽도 사야하고, 월세도 내야하니 참는 수밖에...
이번 달엔 팔자주름필러도 맞아야 한다.
그나저나 누굴 데려가나...
우리 과 애들에겐 이미 소문이 나서 가려는 사람이 없을 테고...흠.....
아! 김주아랑 유강이가 있었지!
김주아 고거 똑똑한 척은 혼자 다하더니 몇 달 전 우리까지 다단계로 꾀어내려 하고...
혹시 나도 찾아갈까봐 유강이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끝까지 몰랐을 거다.
물론 나 혼자 주아에게 갈일은 없었겠지만...
주아도 그 때 입은 손해가 만만치 않다던데 이번에 한 몫 잡으라고 말하면 싫다고는 못하겠지.
유강이는 워낙 맹해서 주아랑 내가 가자고 하면 그냥 끌려갈 것이다.
유강이는 중학교 때부터 그랬으니까.
주아가 다단계에 팔아넘기려 했을 때도 신고도 못하고 그냥 나한테 귀뜸한게 전부였을 정도니 존경스러울 정도다.
그럼 주아한테 전화나 걸어볼까?
“그래, 요즘엔 어떻게 지내? 아픈 덴 없지?”
“연락 줘서 고마워. 정말 너 밖에 없다. 나 휴학하고 등록금 마련하려고 알바중이야. 모아놓은 돈도 다 날리고...빚까지 져서....정말 내가 바보 같다. 강이한텐 전화도 못하겠어.”
“괜찮아. 사람은 누구나 실수란 걸 하잖냐. 물론 강이는 아직 화가 났을 테지만....내가 잘 말해볼게. 근데 알바해서 빚은 갚을 수 있는 거야?”
“힘들지....그래도 힘든 엄마한테 손 벌릴 수는 없으니까.....”
“그럼 주아야, 힘들지 않고 큰 돈버는 알바 소개시켜 줄까?”
“정말? 그런 게 있어?”
주아에게 대충 설명해주니 고민을 하는지 잠시 말이 없다.
“깊게 생각할 거 없어. 그냥 아는 오빠들이랑 여행가서 노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면 돼. 놀다가 싫으면 그냥 비행기타고 돌아와도 괜찮아.”
“그런 거지? 이상한거 시키고 그런거 아니지?”
“무슨 말이야. 그런 걸 내가 소중한 친구한테 소개하겠어? 우리 과에 가겠다는 여자애들 줄을 섰는데 너한테 도움 될 것 같아서 첫 번째로 물어보는 거야. 그리고 네가 좀 예쁘니. 나도 우리 오빠한테 욕먹을 친구를 소개시킬 순 없으니까.”
주아의 속물근성까지 건드려주면 게임은 끝이다.
“아이, 예쁘긴~ 그럼 같이 갈게. 언제 가는 거야?”
역시나 난 주아를 너무 잘 알고 있다.
“이번엔 강이빼고 우리 둘만 가자. 강이는 내가 계속 설득해 볼게. 일단 너랑 강이가 사이가 좋아져야 같이 가든가 하지.”
“그래, 그럼 부탁해 시연아. 그리고 너무 고마워.”
오사장에게 제일 통큰 친구로 데려오라고 해야겠다. 그래야 주아가 단박에 넘어갈 테니까.
어쨌든 내 선택이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날 위해 날 믿고 데려간 시연이에게도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눈 밑 주름이 자글자글한 배나온 오빠를 공항에서 마주했을 땐 그대로 돌아서서 가고 싶었지만, 첫 선물이라며 내손에 명품 백을 들려주는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걸 중고사이트에 올리면 내 빚의 4분의 1은 갚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시연이의 말이 맞았다. 이건 알바지 소개팅이 아니니까.
억지웃음으로 하루를 마치고 숙소에 들어가니 미역처럼 축 쳐졌다.
시연이가 피곤한데 먼저 씻으라고 해준 배려가 너무 고마워 옷을 챙겨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나쁜 생각은 버리고 충실하게 일하는 맘으로 내일도 잘 보내보자고 스스로 맘을 다지며 거품을 씻어내고 머리를 털고 나와 보니 남자 둘이 우리 방에 와 있었다.
“주아씨 어서 와요. 맥주 시원한 걸로 새로 꺼내 줄게요.”
배나온 오빠가 손짓을 하며 반기는 데 하나도 반갑지가 않았다.
“주아야 얼른 와 앉아. 글쎄 아쉽다면서 맥주 딱 한잔만 더하고 자자고 쳐들어왔지 뭐냐. 괜찮지?”
“미안해요, 주아씨. 물어보지도 않고 쳐들어와서. 딱 한잔만 먹고 건너갈게요.”
시연이 남친까지 사과하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괜찮아요. 맥주 좋죠.”
딱 한잔만 한다던 술자리는 시연이 가방에서 40년산 위스키가 나오자 흥이 올랐다.
독주를 처음 마셔본 나는 주량을 넘겼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언제부터 기억이 끊긴 건지조차 알수가 없었다.
눈을 뜨니 목이 불타는 듯한 갈증과 두개골이 두 조각 난 듯한 두통이 동시에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옆에서 벌거벗고 누워있는 배불뚝이를 보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노란 물까지 토해버렸다.
모든 것이 내 선택이었고, 실수였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샤워를 하고 나와 보니 배불뚝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주아씨, 머리 많이 아프죠? 씻고 아래로 내려와요. 해장하러 가요.“
배불뚝이가 남긴 메모위엔 5만원권 다발이 놓여있었다.
불쾌하던 속과 머리가 일순간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새로운 세상이었다.
“정말? 꺄악! 너무 좋아!!”
친구들과 여행을 간다.
어린 시절 당일치기 여행 말고는 우리끼리 한 번도 다녀 본 적 없는 여행이었다.
“어디로 가는데? 해외? 꺄악~!!”
괌으로 가자고 한다. 뭘 준비해야하지? 뭐부터 사야하나?
머릿속에 오선지가 놓이고 현란한 음표들이 춤을 추고 있는 기분이었다.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래. 우리 여행 처음이잖아. 그냥 무조건 재밌게 놀다오자.”
시연이가 원래 여행을 좋아했었나 보다. 난 참 시연이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
어릴 적엔 뭐든 다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강아, 지난번엔 미안했어. 이번 여행에서 우리 더 친해져서 오자. 정말 미안해.”
주아가 내 눈치를 보자 내가 더 미안해 졌다.
“괜찮아. 난 다 잊었어. 비온 뒤 땅 굳고 뭐 그런거 있잖아. 우리 어릴 때 생각나고 너무 행복하다.”
마치 꿈만 같은 계획이었다.
여행은 준비하는 것 까지가 여행이라고 했다.
괌에 대한 공부부터 하루하루의 일정과 개인 준비물까지 친구들과 공유하며 준비해 나갔다.
이제 내일이면 인천공항에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