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즈빌의 새로운 세입자에게
안녕! 연무의 거리에 온 걸 환영해. 넌 오늘 막 이 연무의 거리에 도착했고, 시청에서 정식으로 시민권을 받고 헤이즈빌에 네 방을 배정받았을 거야, 그렇지?
이 편지는 일종의 회람판이야. 선배들이 각국의 언어로 번역해서 신입의 방에 슬쩍 두고 돌아가는 매뉴얼이지. 의미가 전달이 안 되거나 조잡한 면이 있을 지라도 이해해 줘.
좌우지간 연무의 거리는 완벽한 복지사회야. 조금 복잡하고 번거롭고 당황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이 몇 가지 규칙들만 잘 지키면 넌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이 평화로운 마을에서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1. 시민권에 관해서
시민권은 연무의 거리에서 살기 위해선 없을 수 없는 물건이야. 만 19세 이상의 시민은 매년 시민세만 착실하게 낸다면 대중교통과 급식소, 공영극장과 병원의 서비스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지. 그리 비싼 것도 아닌데다 무이자 할부도 돼.
다만 주의할 점은, 시민세를 못 내게 된다면 넌 이 도시에서 살 수 없게 돼. 명심해 둬. 제 1 법칙이야
2. 직업에 관해서
연무의 도시에는 일자리가 꽤 많아. 청년들이 얼마 없어서 가게며 회사들이 언제나 전전긍긍이지! 명심해둘 건, 네가 만약 만 19세 미만이고 그로 인해 자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돌아보지도 말고 도망가. 잠깐이라도 일을 도와달라는 가게가 있으면 앞으로 얼씬도 하지 말고. 도시에서 미성년자의 아르바이트는 불법이야. 관련된 얘길 꺼내서 유혹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손절하도록 해. 네가 미성년자라면 바로 4로 이동해도 괜찮아.
네가 성인이라 해도 자회사나 음식점의 배달 아르바이트는 추천하지 않아. 장사치들은 대게 속이 시커먼 놈들이거든. 건물 관리 아르바이트는 그 건물이 그 주소에 실존하는지 꼭 확인해. 월급으로 주는 게 아니라 밥값으로 주는 돈일 수도 있거든.
3. 직업에 관해서 - 2
네가 성인이라면 내가 가장 추천하는 직업은 시청 직원이야. 연무의 거리에선 일반적인 승용차와 버스 외의 교통수단은 사용금지고, 배달 오토바이와 트럭이 여기 포함되기 때문에 시청 직원들은 외부에서 오는 물건의 배달원도 겸하고 있거든. 내일 바로 시청으로 간다면 사람이 딱 하나 빌 거야. 그리고 시장은 너를 바로 채용하겠지. 주 4일제 근무에 거리 안의 배송지는 걸어가는 충분히 걸어 다니고도 남으니까 썩 어려운 일도 아니지. 택배를 하루에 10개 정도, 편지는 6통 정도만 배달하면 될 거야.
여기서도 주의사항이 있는데, 수령인의 이름이 미국과 영국에서 쓰이는 알파벳이 아닌 다른 문자로 쓰인 집에 가면 안 돼. 특히 ‘Ţepeş’ 같은 루마니아 계 이름은 네 생명줄을 단칼에 끊을 수 있는 위험한 이들이야. 그리고 키릴 문자와 아랍어로 쓰인 택배가 시청 배송 센터에 도착하면 하루 안에 버려. 이런 건 폐기 라인이나 반송 라인으로 가면 친절하게 처리해 줄 거야. 아까 2에서 말했듯이 주소 확인도 잘 하고!
배송하는 편지와 택배의 내용물은 절대로 수령인보다 먼저 열어보지 마. 우선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 마음대로 열었다가 큰일 난 적이 하도 많아서 말이지.
지나가는 누군가가 배송센터가 아닌 곳에서 사적으로 무언가를 배달해달라고 하면 딱 잘라서 거절해. 네가 아는 사람이거나 도시에서 유명한 사람이라 해도. 그들이 아닐 수도 있고, 일반적인 시민들은 법규만큼은 칼 같이 지켜. 이런 행위는 도시에서 엄연히 불법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하거나 “내용물이 확인되지 않은 택배는 배송이 되지 않는데, 확인 해 볼까요?”하고 겁을 주면 대체로 쉽게 포기해. 정 못해서 배송하게 됐다면 무엇보다 의뢰인의 시야에서 벗어나도록 해. 택배는 박스 테이프에 칼집을 낸 뒤 던져서 내용물을 쏟고, 편지는 그 내용을 꼭 확인해서 머리에 담아둔 뒤 찢어. 그리고 시청에 그 내용을 얘기 해. 딱 하나 예외라면 검은 봉인이 찍힌 편지는 봉투 째로 가능한 잘게 찢어서 하수구에 갖다 버려. 구정물에 녹아내려서 아무도 볼 수 없도록 말이야.
4. 교통수단에 관해서
시민세와 외식비를 내고도 돈이 남으면 헤이즈빌 로비 공용 컴퓨터 즐겨찾기에 있는 인터넷 옥션에서 뭐든지 주문할 수 있어. 차도 말이야. 하지만 경사가 험하고 도로 질이 안 좋은데다가 안개가 심해서 운전 실력을 뽐내긴 어려울 거야. 어차피, 시민증만 있다면 버스를 공짜로 탈 수 있는데 말이지!
만약 네가 택배 업무를 보다가 길을 잃으면 버스를 타는 게 가장 간단하고도 합리적인 선택이지. 노란색이 마을버스, 초록색이 시내버스야. 노란 버스는 이 도시 구석구석을 돌고, 시내버스는 다른 도시와 연결돼. 가서 돌아오는 건 어렵지 않지만 탑승 자체가 썩 좋은 경험은 아닐 거야. 다른 도시에서 온 다른 승객들은 차창 밖의 논두렁과 소나무를 바라보며 헛소리를 늘어놓고, 승하차가 악몽 같이 혼란스러운 버스야. 다른 도시도 사람 사는 곳이긴 하지만 역시 연무도시가 최고지.
승용차와 두 버스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차들 말고도 타면 안 되는 차가 몇 개 더 있어.
첫째는 택시인데, 연무의 거리에서 택시는 불법이야. 아는 친구가 택시기사를 하게 됐다고 해도 팔아주지 마. 녀석은 색깔만 감추지 못하지 천재적인 흉내쟁이거든. 어떤 차종으로도 변할 수 있어. 더 이상 녀석에 대해 얘기하는 건 위험하니 여기까지.
둘째는 빨간 버스야. 연무의 거리 밖을 다니는 광역 버스인데 하루 한 대밖에 안 다녀. 네가 여기 오기 전에 알고 있던 동네로 간다고 버스 창문에 글씨를 붙여놓고 유혹해도 타지 마. 거기 쓰인 곳은 더 이상 네가 아는 거기가 아닐 거야.
마지막 셋째는 이빨 달린 버스야. 연무가 유독 깊게 깔리지 않는 한 웬만해선 나오지 않아. 좌우지간 버스를 타기 전엔 언제나 그 버스 앞에 이빨이 안 달렸는지 확인해 보라구. 그리고 하차하는 문이 뒤쪽에 달렸는지 옆구리에 달렸는지도 주의 깊게 봐. 이빨과 뒷문을 확인하는 걸 실패했다면 교통카드 요금기가 있는지 확인해. 깨나 유서 깊은 버스라서 아직도 요금기를 설치하지 못 했거든. 그 자리에 동전 통만 있지. 만약 시민증을 두고 와서 동전만 있는 상태라 어쩔 수 없이 탔거나 가끔 사람 없는 거리에서 ‘벽’을 뚫고 나타나 너를 삼킬 수도 있으니 대처법은 가르쳐 줄게.
그 버스에 타게 됐다면 무엇보다도 진정해. 정신만 차리면 버스에서 안전하게 내릴 수 있어. 길에서 사고라도 나지 않는다면 얼추 30분만 있으면 버스는 널 태웠던 승강장으로 돌아가. 안내방송이 엉망진창이니까 풍경으로 확인해. 상행선인지 하행선인지도 확인해야 해. 실수로 잘못 내린다면 넌 영원히 거기서 연무 도시나 이 세계로 돌아올 수 없어.
요금에 대해서도 할 얘기가 있는데 한 바퀴 돌고 내릴 때엔 요금은 정상적인 수준으로 시민권에서 빠져 나가고 좀처럼 보기 힘든 맑은 하늘 아래에 정류장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두 바퀴째부턴 네 육체를 추가요금으로 받아. 단순히 몸을 자르는 건 아니고, 옷은 흘러내린 채 허공에 팔만 둥둥 떠다니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단 얘기지. 그래도 걱정하진 마. 그저 그 ‘누군가’에게도 들키지 않고 중앙 점집의 영매사 버클리 부인에게로 가면 돼. 무조건 ‘중앙의 점집’이야. 인기가 많은 사람이라 사칭도 많이 당하거든. 그녀를 구별하는 방법은 그녀는 절대 혼자서 거리를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이야.
버클리 부인은 너의 정체와 상태를 곧바로 한눈에 알아보고 네 남은 신체 일부를 붙잡고 남쪽의 병원으로 데려다 줄 거야. 닥터에게로 말이지. 네 몸을 본 닥터는 네 세포 샘플을 채취해간 다음 1시간도 안 돼서 새 몸을 배양해 만들어줄 거야. 하지만 명심해. 닥터는 자원해서 너를 돕는 게 아니야. 부인의 권위에 눌려 널 돕는 거지. 부인보다 먼저 닥터를 만나선 안 돼. 닥터는 네 그런 모습을 들켜선 안 되는 ‘누군가’들 중 하나야.
5. 학교에 관해서
오, 미성년자 친구군! 반가워. 학교에 관한 규칙은 딱 하나야. 학교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을 따라가지 않기. 정말 간단하지? 학교에 선생들은 부족해. 그렇기에 교장을 제외한 모두가 반의 담임이지. 그리고 만 7세부터 만 19세까지 한 반을 쭉 담당하고 별다른 이유가 없으면 반장과 부반장도 그 자리를 7세부터 유지하지. 처음 보는 선생님이 있다면 무조건 그 반의 반장과 부반장의 이름을 물어 봐. 선생이라면 이름을 댈 수 있을 거야. 교직원증에 자기 반 반장과 부반장 이름을 메모해 두거든. 그래도 대답을 못하거나 처음 듣는 이름을 대면 무조건 도망쳐. 다른 학교 선생일 테니까. 그래도 희소식이 있다면 선생은 쉽게 변장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야. 교직원증이 있어야 되니까.
이름표는 파랑-노랑-초록으로 연말엔 입학주기가 같은, 다시 말해 이름표 색깔이 같은 학년끼리 행사를 벌여. 빨간 이름표는 없으니까 학생부라고 사기 치는 다른 학교 녀석들 따라하지 말고 제대로 달라고!
연무도시의 단점 중 하나는 제대로 된 도서관이 없다는 점이야. 학교 2층의 도서관엔 불미스런 일이 좀 있어서 사서도 없는 상태야. 그러니까 함부로 들어가지 마. 학교 기밀이니 괜히 선배나 선생님한테 캐물었다가 욕보지 말고!
6. 쇼핑에 관해서
돈은 남아도는데 무언가 갖고 싶은 게 있으면 헤이즈빌 로비에 설치된 공용컴퓨터 인터넷 브라우저 즐겨찾기 폴더의 옥션에서 한 번 찾아봐. 여태껏 세상에 발매된 상품이라면 그것이 크게 인기가 없는 이상 재고가 다 있을 것이고 할인 행사는 안 하지만 100% 정가로만 판매하는 믿음직한 쇼핑몰이지. 대체로 하루 안에 배송된다는 게 큰 장점이야. 대신, 그 주소창을 네 다른 전자기기에 쳤다간 그 전자기기를 버리게 될 수 있어. 중고 옥션 카테고리는 컴퓨터 자체 시스템으로 차단 돼있는데 가끔 팔아선 안 되는 걸 파는 경우도 있고 사선 안 되는 게 올라오는 경우가 있고, 그걸 우리 도시에 들이는 걸 시에서 방관하면 안 되기 때문이야. 너무 많이 시키는 건 너나 다른 시청 직원들에게 폐가 되니까 자중해야한다는 거 알지? 그런 건 물류센터에서 직접 찾아오라 시킨다고!
배송을 기다리기 어렵거나 당장 뭔가를 사야만 하는 비상상황에는 가까운 마트를 이용해 봐. 중앙 광장 건너편 ‘중앙마트’는 1층은 식료품, 2층은 생필품, 3층은 의류, 5층은 작은 책방과 빨래방을 운영하고 있어. 4층은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는데 부동산 문제로 폐쇄 중이래. 폐쇄중인 곳에 들어가면 실례인 건 알지?
북동쪽 구 시가지에는 작은 빌라하고 갖가지 상점들이 밀집해 있는데 품질이랑 애프터서비스 면에서 최악이야.
시청의 무료급식소에서 먹는 밥이 질렸다면 외식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햄버거, 치킨, 떡볶이....... 없는 게 없지. 딱 하나 없는 건 피자야. 피자는 마트에서 레토르트를 구매하거나 옥션을 통해 다른 도시에서 다음날에 배송 받을 수 있어. 물론 너희 집으로는 시청 직원이 배달해 줄 거야. 피자가 식는 건 감수해야겠지?
가장 많은 업소는 역시 뭐니 뭐니 해도 국밥집이지. 도시에 국밥집만 6개인데 하나 같이 뜨겁고 얼큰한 맛의 고기와 육수가 아주 일품이야. 전부 6개니까 또 다른 국밥집을 찾지 말라고!
매달 13일에는 절대 국밥집에 가선 안 돼. 이 거리의 일종의 불문율이지. 물론 꼭 가야겠다면 주방을 확실히 살펴. 인심과 풍채가 좋던 욕쟁이 할머니와 펑퍼짐한 한국식 가마솥 대신 녹색 피부에 검은 옷을 입은 찢어지는 목소리의 매부리코 중늙은이가 항아리 같은 검은 솥에 녹색 육수를 끓이는 걸 보고 도망치지 않았을 때에는 네가 거기 들어가게 될 거야.
7. 지리에 관해서
연무의 도시는 총 8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어.
우선 서쪽은 시에서 지은 주택단지인 헤이즈빌이 존재하는 곳이야. 여기 자체의 치안은 괜찮지만 그 위랑 아래는 유명한 금지구역이지.
남서쪽은 공장단지야. 연무의 거리의 연무의 근원지지. 다행인 점은 주말엔 연무가 안 나온다는 점과 인체에는 무해하단 것 정도? 이름 모를 곳에서 온 노동자들이 특히나 많은데 나라면 굳이 그들과 어울리지 않을 거야. 할렘 가에, 외국인 이전에 토박이들이 가게를 차려서 바가지를 씌우는 동네지. 노동자들과 언어는 대충 통할지 몰라도 정서, 특히 식문화에서 위험할 거라고. 여기서 직장은 가급적 구하지 마.
중앙은 광장과 중앙마트, 작은 상가 건물 두어 채가 있는 평화로운 공간이야. 광장은 주말에 해가 좋은 날에 아이들과 그 가족들이 몰려와서 여가를 즐기는 공간이지. 다만 우중충한 날엔 나와선 안 돼. 맑은 날이랑은 달리 그림자가 없는 아이를 구분할 수 없거든.
동쪽은 신시가지야. 비교적 새 건물들이 들어서 있지. 그런데 그걸 언제 지었는지는 당최 기억나지가 않는단 말이야?
남쪽도 동쪽 못지않은 신도심이지. 학교, 학원, 병원, 게다가 놀이동산까지 쓸 만한 건물들은 다 거기에 있어. 하지만 대로를 건너야한다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해. 차들은 쌩쌩 달리는데 횡단보도는 신호 길이가 애매해 어딘가 위태위태하단 말이지. 육교는 자동 요금기에 요금을 지불해야 건널 수 있는데 밤에 혼자 건너갈 땐 가끔씩 출근하는 관리인 아줌마랑 게임에서 이기면 요금을 반 정도 할인해 줘. 행운의 찬스지.
동북쪽은 구시가지야. 치안이 개판이고 상점들이 바가지를 씌우는 건 서쪽과 진배없지.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원래 동북을 거점으로 삼는 조직폭력배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 동북에서 내쫓기고 만 패가 남서쪽의 노동자 세력과 결탁했다고 해. 하하. 이런 말은 단지 소문이니까 흘려들으라고. 입 밖에 내선 안 되는 말이야.
북쪽에는 시청과 물류센터가 있어. 이 도시에서 가장 안전한 땅이지. 금기도 따로 없고. 북동쪽 구역과의 경계에는 공영극장이 있는데 이 자리가 뭘 의미하는지는 대충 알 거라 믿어.
시청 서쪽, 다시 말해 북서쪽 산에는 절대 올라가선 안 돼. 그 위에 있는 자들이 서쪽의 네 집 창가를 향해 무슨 난리 부르스를 춰도 관심을 주면 안 돼. 모험심이 발동해서 언덕길 위로 올라가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네 시야에서 사라지는 위치에 도달하면 난 명복을 빌게.
왜냐하면 북서쪽 산의 북쪽은 공동묘지야. 묘지에 있을 건 죽은 자 밖에 없지. 네가 북서쪽 산의 남쪽에서 죽기 전에 거기에 가는 일은 없었으면 해.
그곳에선 맨날 장례식을 치러. 다시 말하지만 장례식은 무언가를 묻는 행위고 장의사는 무언가를 묻음으로써 유가족에게 돈을 청구하지. 유가족은 그걸 막고자 따로 너를 죽여서 장의사들을 네 유가족에게로 장례비를 청구하게 만들 거야. 둘 다 네 목숨을 노린다는 뜻이지.
8. 이웃에 관해서
이 도시에서 기억해둘만 한 이웃은 총 세 명이야.
하나는 버클리 부인. 버클리 부인은 미국 남부의 네덜란드계 이주민 사업가 집안의 큰 딸이지만 그 새까만 눈과 머리카락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혼혈임을 나타내.
로키 산맥의 한 원주민 부족에 ‘드센 턱과 엄니’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돌아다니며 아메리카의 모든 원주민 부족들의 주술사로부터 아메리카의 모든 주술을 배웠대. 말하자면 주술의 백과사전이지. 그런데 백인에게 시집간 그녀의 딸이 어마어마한 영력을 지닌 딸을, 다시 말해 손녀를 낳았는데 손녀의 영력이 너무나도 탐이 난 그녀는 손녀를 반 납치해서 자신의 모든 지식을 가르쳤대. 말년에 그녀가 치매가 들어서야 손녀는 다시 도심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 손녀가 바로 버클리 부인이야.
부인은 영혼을 볼 수 있고, 중앙에서 점집을 운영해. 뭐, 신빙성이 썩 높은 점은 아니지만 그녀와 상담하고 싶을 땐 망설이지 말고 찾아가서 속 시원히 털어놓는 게 좋아. 나라면 시청에 가기보다 먼저 부인에게 얼굴도장을 찍어놓을 거야.
어쩌다 부인과 관계가 소원해졌다면 먼저 굽히고 들어가 사과하는 게 좋아. 이 도시에서 네 편은 그분 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절대 부인과 척을 지지 마. 부인은 영적인 문제로 곤란해진 이웃들을 대가 없이 돕기로 유명해. 인기가 많다면 광신도도 어느 정도 있다는 뜻이니까.
그녀를 처음 찾아갈 때에는 거라면 복채로 맛있는 선물이라도 사 가라고. 시청에서 중앙으로 가는 언덕길 세 번째 카페의 티라미수를 좋아해. 홍차 수집을 취미로 하고 있으니까 옥션을 뒤져보는 것도 추천해.
두 번째는 시장이야. 조지프 마이어 시장은 인품이 높기로 유명하지. 하늘이 내린 시장 감이야. 성도 마이어(Mayer, 시장인 Mayor와 발음이 유사함)잖아. 4년에 한 번, 시장 선거가 일어날 때마다 그는 언제나 당선돼 왔어. 몇 대 시장인지는 비밀이래.
명심해둘 건 그는 ‘체어맨’이야. 언제나 시장 집무실에 틀어박혀서 나오질 않아. 그가 집무실의 문을 잠갔다는 건 매우 바쁘기 때문에 나오질 않는다는 뜻이야. 절대 시청 밖에 있다는 게 아니라. 북서쪽 고개 아래 성당에서 깡패들과 함께 있는 그를 보았다면 넌 분명 잘못 본 것이고 그 일에 대해 영원히 함구해야해. 시장과 북동쪽 술집에서 같은 여자하고 잤을 정도로 친하다고 해도 말이지.
마지막 하나는 닥터. 동양에서 온 도시의 유일한 의사지. 그래서 남쪽 공립 병원의 원장을 맡고 있어. 그는 천재야. 영국의 명문 의대를 어린 시절 조기 졸업했고, 외과 분야에선 그를 따라올 자가 없었대. 암만 늙게 잡아도 30대가 안 되는데 말이지. 줄기세포 배양기술을 의학에 최초로 접목시켜서 잘린 팔도 돋게 하는 명의야.
친하게 지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빽이지만 그는 사회성이 최악이야. 표정은 무뚝뚝해서 당최 읽을 수가 없고 싫어하는 게 엄청 많아. 겉보기와는 다르게 무지막지하게 민감하지. 귀찮은 것도 몹시 싫어해서 사경을 해맬 수준이 아니면 감기 따위로 그의 병원을 찾지 말았으면 해.
만약에 셋 중 하나와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졌다면 그 하나의 천적이 되는 다른 하나와 손을 잡아. 버클리 부인은 시장과 내연 비슷한 무슨 과거가 있어. 시장의 부탁이라면 싫어하면서도 결국엔 들어줄 거야. 시장은 누가 뭐래도 도시의 최고 권력자지만 닥터에겐 상관없는 얘기지. 그가 죽으면 연무의 거리에 의사는 없어. 그리고 닥터가 죽을 위기에 몰린다면 그 위기로 몰아넣은 닥터의 상대가 닥터의 도움 없이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시장이 권력을 쥔 왕이라면 닥터는 모두의 명줄을 쥔 사신이지. 제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신에게는 대적 못해. 그래도 신녀가 제사를 올리면 하는 수 없이 받아줘야 하는 게 신이야. 버클리 부인의 말이라면 이마를 찡그리는 한이 있어도 들어주지. 닥터는 부인에게 마음이 있는 게 틀림없어.
모든 주민들 공통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신문 얘기를 싫어해. 그도 그럴 것이 연무의 도시에서 발간되는 유일한 신문인 ‘연무일보’에는 뻑 하면 누가 어쩌다 살해당했네, 누가 누구를 어쩐 일로 죽였네 하는 얘기뿐이거든. 연무의 거리에는 경찰도 자경단도 없어. 아무도 자신의 비밀이 공개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법이야. 읽어두면 도움이 되지만 신문 얘기는 입에 안 올리는 게 좋아.
9. 헤이즈빌에 관해서
헤이즈빌은 4층과 13층이 없어. 건축가가 미신을 잘 믿던 모양이야. 만약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4층과 13층이 있다면 가까운 층에서 바로 내려. 물론 4층과 13층은 빼고. 동승자가 있다면 필사적으로 그 층들을 누르지 못하게 하고 탈출해. 쫓아오진 못 할 거야. 자신들의 영역이 아닌 층계론 나올 수 없으니까. 4층이나 13층에 오기 전까진 평범한 사람에 불과해. 그래도 결국 4층이나 13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면 명복을 빌게. 얌전히 그 층 주민들의 옷이 되는 결말이 남을 거야. 3층, 5층, 14층, 12층의 방값이 제일 싼 이유가 바로 그거야.
헤이즈빌 지하에 중앙회관이 있는 건 알고 있지? 사우나, 카페, 헬스장 같은 복합시설 말이야. 그 통로들 중에 동쪽과 이어진 통로는 철창으로 닫혀 있지. 그 통로의 끝은 시청 소재의, 극장 지하의 도서관 비밀 자료실과 연결돼 있어. 어차피 이용할 사람도 없는 곳에 그런 걸 만드는 이유는 하나뿐이지. ‘산’ 사람은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야. 어쩌다가 철문이 열려서 그 길을 통해 자료실로 이동할 수는 있어. 한 번 열리면 적어도 한 달은 열려 있고 말이야. 비밀자료실의 책들은 산 자를 대상으로 쓰인 게 아니라 몹시 흥미롭지. 대출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하지만 철창이 다시 닫히기 전까지 반납을 하지 않으면 도서관은 통로의 철창 사이로 너를 끌어와 연체료 대신 소유할 거야.
10. 남쪽의 놀이공원에 대해서
이 편지가 처음 쓰일 때에는 없었지만 내 차례에는 생겼군. 남쪽의 놀이공원 ‘연무랜드’가.
연무의 거리가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 곳이라면 연무랜드는 범죄가 아예 목격되지 않는 곳이야. 그래도 놀이기구 사고가 가끔 나나 봐. 따라서 도시 내에서 시청 다음으로 안전한 곳이지. 거기다가 시민권이 있으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 오전 8시에서 오후 9시까지 여는데 개장시간이 아닐 때에 들어오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어. 그리고 도시에서 연무랜드에 들어갈 때 쓰이는 문은 북문인데, 퇴장할 때 남문으로 나와선 안 돼. 연무랜드와 이 도시 밖은 겉보기엔 평범한 밭이지만 아무것도 없고 무엇이든 있는 황무지야. 낙오되면 그 무엇도 찾을 수 없지.
난 연무랜드 아르바이트생들의 지침서를 찾았어. 그리고 여기에 일자리를 얻긴 했는데 어쩐지 낌새가 안 좋아.
- 연기자 지침서
1. 개장시간동안 입을 열지 말 것.
2. 정직원이 아닌 아르바이트생 앞에서 입을 열지 말 것.
3. 침을 흘리는 버릇이 있다면 고칠 것.
4. 부상을 입거나 질병, 특히 코감기에 걸리면 닥터에게 치료를 받을 것.
5. 번식은 동족이 맞는 지 확인한 뒤에 할 것.
과연 이 닥터는 병원의 그 닥터인 걸까? 번식이란 부분이 너무 신경 쓰여.
11. 이 편지에 관해서
이 편지는 일종의 회람판이야. 작성자는 전부 익명이야. 신입이 올 때마다 선배인 너와 우리가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서 한 장 한 장 덧붙여서 남몰래 보내주는 편지지. 앞장 두 번째 문단의 첫 문구가 없었거나 11번 문단의 첫 문구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편지는 가짜 편지야. 내용을 싹 잊고 태워버려. 이 첫 문구만큼은 복사기가 아닌 수정테이프 위에 자필로 작성하거든. 헤이즈빌 내의 비밀을 은폐하려는 누군가가 교묘하게 거짓을 섞어 넣어 너를 혼란케 만들어 암살하기 위함이야. 오늘 네게 3번째로 말을 건 이에게 찾아가 회람판에 대해 물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