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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교초등학교 게시판. 2019. 7.13
<우리가 잘알지 못한 일본의 역사들>
질문1: 일본이 동아세아 경제 사회 문화에서 중국.한국과의 종속에서 벗어난 시점은 언제인가?
답: 일본의 눈부진 도시경제였을 것이다 .신유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신유한 일행이 방일했을 때 관백에 오른 8대 장군 원길종은 일본에서 서양학 곧 난학 발흥의 실마리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길종은 농업 생산력의 고양과상품경제의 발전에 대처하기 위한정책으로서 식산흥업정책을전개해 나갔는데, 그방법으로서 서양의 실용적인 과학기술을도입하고자하였다. 원길종이 종래의 장꾼들과 달리 발을 걷어내고 직접 네덜란드인들을 접견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먼저 첫 발을 디딘 대마도의 경제 상황
부터 보자. 일본은 장기(長岐),나가사기의 출도(出島) 데지마를 통해서 통상국인 중국 · 네덜란드와 무역을 행하였으며 , 대마도를 통해서 통신국인 조선 ,유구와 교류하였다. 특히 논이 부족한 대마도의 경우, 전적으로쌀의 수급을 조선에 의지해야 했기에 조선과의 교류를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대마도는 조선과 일본본토와의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부를 축적할수 있었기에, 통신사행이 성공적으로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여전히 농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지녔던 조선에서 나고 자란 조선의 지식인
입장에서 보면, 일본의 상거래와 무역 규모가놀라운것이기도하였지만, 한
편으로는 이익만을 추구하는 야만적인 문화로 비치기도 하였다. 다음은 신유
한이 대마도를 기술한 대목이다. (1)
9월 4일 통신사의 배는 대판 어귀에 정박한 뒤 일본의 배로 옮겨 탔다 대형
으로 흘수(吃水)가 깊은 조선의 배는 내륙의 하천을 항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국서를 실은 가마와 정사, 부사, 종사관은 천어좌선 (川倒座船), 가와고자부네이라 불리는 배를 탔다. 막부나 태수들이 하천에서 사용했던 대형의 호화로운 집 모양의 이 배는그규모가 어찌나 크고 또 금은과 주옥의 치장이 어찌나 화려했던지,신유한 일행은 이 배가 혹시 관백의 어용(細用) 선박인가 싶어 사양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배를 타고 낭화강을 올라 대판까지 갔다. 가는 동안 강변의 화려한 건축물들과 구경하는 남녀노소의 화려한 복색과 치장에 신유한은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당시 통신사들이 일본의 3대 도시로 꼽은 곳이 대판, 경도, 강호였다.1716년 경도의 인구는 35만 명 , 대판의 인구는 36만 5000명 , 강호의 인구는 50만 1000명이었다 한다. 마침내 첫번째 도시 대판에 입성하였다. 대판은 일본의 하천전용 배로옮겨 탄뒤 처음으로 정박한 곳이었다. 항구에서부터 시작하여 도시를 가로지른수많은 다리들, 시가지의 건물들 모두가 그의 눈을놀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애써 “애석하게도 번화와 부귀가 잘못되어 일개 흙으로빚은 인형에게 입혀져 있구나!" 하고 무시도해보지만, 대판의 번화함이야말로당시 일본의 현재였던 것이다. 대판은 본래 풍신수길의 고장이었다. 그가 천하를 차지하였을 때부터 대판은 풍부한 물산을 토대로 사치와 향락의 도시로성장하였다.그런 대판의 거리를 신유한은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관찰하고 기록하였다. 거리를 메운 다리와 부호들의 저택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눈길은온갖서적들이 쌓여 있는서점가를 거쳐 술집으로, 회원으로 약국으로, 마침내는 화류거리 노화정에 이르렀다. 그중에서도 신유한의 눈을가장 휘둥그레지게 한것이 바로출판문화였다.중국의 책은 물론이려니와 조선의 책까지 모두 구비해놓은 서점의 규모며, 통선사일행 도중에 쓴자신의 시문이 돌아오는길에 출판되어 있는 놀라운속도의 출판시장. 한마디로 이는경제적 · 문화적 충격이었다. 한밤해 입성한 경도도 놀라운곳이었다 신유한이 일본의 황제가살고있는 왜경의 밤거리를 활보하며 휘황찬란한 야경에 들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신유한 일행은 드디어 관백이 있는 곳 강호에 도착하였다. 통신사행은 각기 신분에 맞는 의관을 정제하고, 의장과 군악을 갖추고서 대열을 정비하여 입성하였다. 세 겹의 성으로 이루어진 성을 통과하는 동안, 구경히는 일본인들도 (2)
질문2: 일본은 한국 중국과 비숫한 시기에 서양에(미국의 페리제독 시대에) 개방한 것 아닌가요?
(답)그러나 이 주장이 나온 배경에는 일본의 국권 신장이 짙게 배어 있다는 분석이 오히려 설득력 있게 들린다. 탈아론이 발표된 1885년대 일본사회는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지 17년이나 흘러 미국의 페리함대가 우라가항(浦貴港)에 들어와 개국을 강요하던 1853년과 비교하면 몰라보게 발전되어 있었다. 신바시(新橋)에서 요코하마 사이의 철도 개통(1872년 일본 역사상 처음 개통)을 비롯, 곳곳에 철도가 놓이고 우체국이 생겨 소식을 더 빨리 전하는 등 생활이 편리해졌다. 뿐만 아니라 메이지정권의 부국강병정책에 따라 산업 은 발전되고 사회는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막부정권을 지탱해온 하급 무사들은 경찰 또는 군인으로 제복을 갈아입고 치안질서 유지 담당자가되었으며,외국에서 군함을 들여와 해군도증강되었다. 다시 맡하면 유신에 성공한 메이지 정부가 서양문명을 재빨리 받아들여 개혁을 성공시킨 것이다. 쇄국을 고집해 오던 일본이 낡은 껍질을 벗어던지고 이처럼 빠른 시일 안에 발전을 이룩할 수 있던 것은 물론 메이지 정부만의 공은아니다. 이에 앞서 미국 페리함대의 위용에 놀란 막부정권은 각계 인사들을 구미에 보내 선진문명을 배워 오도록 했다.<<일본 국사대사전>>에 따르면 도쿠가와(德川)막부는 전후 일곱 번에 걸쳐 구미에 사절을 파견했으며 파견 인원도 296명에 이른다. 또 1866년 여름부터 국민의 국내 및 해외 통행 금지제를 해제하고 그해 11월부터 여권발급 업무를 시작했다. 이 조치가 내려지기 전까지만 해도 각 번(藩)은 주민들이 번을 벗어날때는 반드시 당국의 여행 허가를받도록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민들의 외지출입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에도(江戶)막부의 외국 여행 허가는 1866년 한해 동안 70건, 다음해 에는 130건<<일본문화교섭사. 제5권>에 이르렀다. 이 밖에 나가사키와 하코다테 서도 발급업무를 취급했다. 또 해금(解禁) 이전의 탈번(脫灌)유학생, 사가번의 파리만국박람회 파견단, 쓰마번의 영국유학생 등을 합하면 메지유신 전, 선진문명을 견학하기 위해,해외에 파견된 사람은 600명을 넘는다는 계산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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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선선비의 일본 견문록(대마도에서 도코까지),신유한지음,강헤선 옮김,원저 1720년경, 번역 2008년 2월. 21쪽.(2)같은 책, 24-26쪽.
(3) 후쿠자와 유키치, 정일성, 지식산업사, 2001.3 ,27-28 쪽
사진 설명: 별로 경제학계는 과거 분석이 적습니다. 저의 경우 한번인가 15세기 부터 근대의 gnp 자료를 수년전에 본 것 같은데..... 저의 개인적 견해는 조선의 유교정권(과거 사상 집착) 이 세계 경제 호흡에 대응치 않는 것을 숨키려는지...... 물런 분석도 저자의 원하는 방향이 어디인가도 문제 입니다마는.....
트럼프 대통령은 과거 사업가시절 4-5차례 방한하여 여러사업을 한바가 있어서 (용산의 대우-트럼프빌딩외 여의도.부산등등) 지금의 아베처럼 무릎끊고 잘해달라고 빈다고, 일본이 재무장 ,일취월장할 문제가 해결된다고 저는 보지 않거든요? 많은 기도를 부탁합니다. 21세기 용의 목에 올라타는가 아니면 낙마하는가 문제 입니다.또 트럼프는 지금이 재선에 분깃점이기도 합니다. 현재로는 미국에서 前 바이든 부대통령 후보보다 지지율이 낮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