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려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39.
그 시각 정형사는 월곡 저수지로 바로 가지 않고 초입에 있는 작은 마을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검은 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가 여기를 먼저 찾은 것은 두 갈래 길에 위치해 있어 마치 검문소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왼쪽 길은 월곡 저수지 쪽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 길은 수고산 북쪽에 위치한 슈퍼레인저 기도원으로 일단 이 마을 거처야 한다. 게다가 이곳은 넓은 경기평야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에 위치해 있어 대지주의 저택이 남아 있다. 지금은 거의가 시내로 빠져 나가 몇 가구 안 남았지만 그때 당시는 부촌(富村) 중에 한곳이었다. 그보다도 정형사가 이곳을 먼저 찾은 것은 이곳에 나평자의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 소유권이 남에게 넘어갔지만 과거를 캐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아 찾은 것이다.
정형사는 먼저 평야가 한눈에 보이는 정자를 찾았다. 그곳은 늘 노인들이 모이는 사랑방 같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쪽에는 소나무 숲이 서쪽에는 고속도로가 남쪽에는 탁 트인 평야가 북쪽에는 수고산이 솟아있어 명당으로 손색이 없었다.
정형사의 예상대로 정자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 서너 명이 어우러져 있었다. 70대 중반으로 보이는 노인과 70대 후반으로 노인이 장기대결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쪽에는 80대 중반으로 보이는 노인이 댓돌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장기대국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래선지 구경하는 노인들마저 두 패로 갈려 훈수가 대단했다.
“졸(卒)을 올려!”
“아냐! 마(馬)를 올려야 돼!”
“거참 시끄러워! 장기는 내가 두고 있어!”
쏟아지는 훈수에 정신이 없는 지 70대 후반의 노인이 버럭 소리쳤다. 그러자 훈수꾼들이 잠시 조용하나 싶더니 다시 훈수가 이어졌다.
이때였다. 70대 중반의 노인이 소리쳤다.
“장이요!”
외통수였다. 궁(宮)은 꼼짝없이 차(車)에 몰린 상태였다. 70대 후반의 노인은 안절부절못하며 벗어나려 했지만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러자 그는 궁색한 표정을 지으며 사정했다.
“한번만 물러줘!”
그러자 70대 중반의 노인이 소리쳤다.
“왜 이러십니까? 아재께서 일수불퇴(一手不退)라 하셨습니다.”
“그럼, 에라 모르겠다!”
하며 장기판을 뒤집었다. 그러자 70대 중반이 발끈하고 나섰다.
“왜 이러십니까? 치사하게!”
“뭐야! 치사!”
하며 멱살을 잡았다. 그러자 누군가 외쳤다.
“관두지 못해!”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니 정자 남쪽에 위치한 댓돌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던 80대 중반의 노인이었다. 그러자 70대 후반의 노인이 슬그머니 멱살을 놓고 자리 앉았다. 70대 중반의 노인도 더 이상 따지 않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정형사는 때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안녕하십니까?”
“뭔데?”
70대 후반의 노인이 시비조로 다그쳤다. 분풀이라도 하겠다는 투였다. 그러자 정형사가 더욱 정중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네. 저는 안성서 강력계 정상호 형삽니다.”
“뭐여! 그러면 월고저수지에 또 누가 빠져 뒤졌다는 것이여?!”
노인들이 일제히 정형사를 보며 소리쳤다. 그러나 80대 중반으로 보이는 노인은 아랑곳없이 신발에서 깔창을 꺼내 툇돌 옆에 세웠다. 정형사는 노인들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아니라 몇 가지 여쭤보려고요.”
그러자 일어섰던 70대 후반의 노인이 자리에 앉으며 다그쳤다.
“뭘?!”
다른 노인들도 궁금한지 다가와 앉았다. 정형사는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가져온 검정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우선. 출출하실 텐데. 이거로 목 좀 축이십시오. 청량감과 감칠맛이 좋은 안설 쌀 막걸리 몇 병 사왔습니다.”
“뭘 이런 것씩이나. 그냥 물어봐도 되는데.”
70대 후반의 노인은 그렇지 않아도 목이 칼칼했는데 잘됐다는 듯이 봉투에서 막걸리를 꺼내 바닥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한 노인이 한쪽에 신문지로 덮어 있는 쟁반을 끌었다. 신문지를 걷어내자 묵은 김치와 손 두부. 그리고 양은 술잔이 드러났다.
70대 노인이 80대 노인을 보며 말했다.
“당숙. 막걸리 한잔 하세요.”
그러자 그들은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되었어. 자네들이나 묵어.”
“아네.”
나머지 노인들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로 술잔을 나눠 가진 다음 막걸리 병을 탔다. 서로 막걸리를 나눠 잔을 채운 노인들은 잔을 부딪치고 꿀꺽꿀꺽 마셨다. 정형사에게도 잔을 권했지만 정형사는 근무 중에다 차를 끌고 왔다며 사양했다.
그렇게 몇 순배 술잔이 돈 뒤 그들은 일제히 정형사를 쳐다봤다. 이제 목은 축였으니 질문이 있으면 하라는 투였다. 정형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수지에서 발견 시신이 고순옥이와 나평자라는 걸 아시죠.”
“그럼, 고것들 모녀지간 아녀. 근데?”
“이런 말 묻기 뭐하지만 동네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그러자 70대 후반의 노인이 입을 훔치며 거침없이 말했다.
“뭐라 긴 뭐라고 해! 죄로 갔다고들 하지! 안 그래?”
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노인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분들 평판이 어쨌는데요?”
“고건 말도 못 하재. 조상대대로 악행만 일삼던 집구석이었으니까? 고것 할아버지는 일본 놈 앞잡이로 재산을 모아 아들 놈 한티 물려주고, 아들놈은 한 술 더 떠 빨갱이 짓으로 또 땅을 빼앗아. 이 땅이 전부 그 집구석 땅이 되었어.”
“그렇다면 원성이 이만 저만 아니었겠네요?”
“그렇고말고, 그 집구석 지나칠 때마다 남모르게 침을 뱉으며 저주를 퍼부었으니까.”
노인들은 그때 한이 사무치는지 두서없이 서로 나서며 성토를 했다.
“그래선지 하늘은 결코 무심치 않더라고.......”
정형사는 한 노인의 결정적인 한마디에 다가 앉으며 물었다.
“어떻게요?”
“그 인간 집구석에는 불행이 그치지 않았어. 할아버지는 암으로 죽고 아들놈도 같은 병으로 시름시름하다가 죽었지.”
“그 뿐이 아니어. 그놈에게는 딸만 셋이었는데 한 년은 저기 수고산 귀신 바위에서 투신해 죽었고, 한 년은 지 언니가 떨어진 곳에 서있는 소나무에 목을 매달고 죽었지.”
“네에?! 그러면 나평자가 외동딸이 아니었단 말이에요.”
“그래. 셋째야. 하지만 고것도 보통이 아니었어. 다 뒤지고 지 혼자 남자 갑질하며 지랄 염병을 했지. 아이고, 입이 더러워질까봐 다시는 그 더러운 집구석 입에 안올리려고 맹세했는데 나도 모르게 퍼질렀구먼...... 에이 퉤! 퉤!”
하며 침을 뱉더니 자작으로 막걸리를 따라 단숨에 마셨다. 다른 노인들도 마찬가진지 자작을 했다. 그러자 막걸리 네 병이 순식간에 바닥났다. 일부 노인은 정자에서 내려와 방뇨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악행으로 쌓은 재산은 신기루처럼 사라지더구먼.”
한 노인이 담배를 피워 물며 평야를 쳐다봤다.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정형사는 두 눈을 반짝이며 다가섰다. 그러자 취기가 오른 한 노인이 트림을 꺼억 하고 말을 이었다.
“원래 땅주인의 후손들이 나타나 소송을 걸어, 져서 몽땅 뺏기고 기어나갔지.”
그러자 한 노인이 동조했다.
“우리도 그 덕에 논밭 뙈기 몇 평 찾았지.”
“그럼 어르신네들도 소송을 하셨나요?”
“아냐. 없는 집구석에서 하긴 뭐를 해. 집구석 다 말아 먹게!?”
“그러면요?”
“승소한 양반이 나눠 줬어. 아니 원래 주인한테 준거지.”
“그 분이 어떤 분인데요?”
정형사 더욱 바짝 다가앉자 노인은 역시 트림을 하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바로 이름을 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뭔가 앙금이 있는 듯 싶었다. 정형사는 고삐를 늦추지 않고 물었다.
“그 고마운 분이 누구신데요?”
“글쎄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 양반 조상한테 빼앗긴 걸 다시 찾은 건데.”
“그래도 소작은 면하게 해 줬잖아!”
묵묵히 해바라기를 하던 80대 중반의 노인이 더 이상 듣기 민망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러자 70대 후반 노인이 반박을 했다.
“사실 그렇지 않아요. 친일파 놈한테 빼앗긴 걸 되찾은 거니까.......”
그리고 그는 취기가 오르는지 바닥에 누웠다. 다른 노인들도 전작이 있었는지 약한 모습을 보이며 덩달아 누웠다. 80대 노인은 이런 그들이 한심하다는 듯이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 양반 때문에 우리 마을이 이 정도 된 줄 알아....... ”
그리고 그는 깔창을 들어 신발에 넣더니 신고 일어났다. 순간 정형사는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뭔가 단서가 나오나 싶은데 노인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바닥에 누워 버렸고, 키를 쥔 듯한 노인은 나몰라하며 일어섰기 때문이다. 정형사는 80대 노인에게 다가서며 사정했다.
“어르신 좀 더 말씀을 나누시면 안 될까요?”
그러나 노인은 한마디도 없이 앞장 서 걸었다. 그는 더 이상 더러운 역사를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듯 싶었다. 정형사는 무작정 따라가며 사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어르신......”
여전히 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정형사도 무작정 따라 걸었다. 삼거리가 나왔다. 그러자 노인이 갑자기 멈춰 서서 뭔가 생각하더니 손짓을 했다. 정형사는 부리나케 달려갔다. 노인은 정형사가 다다르자 또다시 말없이 앞장섰다. 그리고 허름한 고택(古宅) 앞에 멈춰서더니 대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정형사도 따라 들어갔다.
대문을 들어서자 넓은 마당이 나타났다. 맞바로 툇마루가 보였다. 그 위로 자물쇠가 채워진 큰방이 보였다. 집은 전형적인 ㄱ자로 집이 끝나는 왼쪽에는 장독대가 있고 오른 쪽은 ㄱ자가 끝나는 부분에 작은 방이 보였다. 대문과 가까운 곳으로 보아 사랑방이 틀림없었다.
노인은 성큼 성큼 올라서더니 뒤돌아보며 거기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정형사는 고개를 조아리고 툇마루에 앉았다. 노인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빼들더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낡고 두툼한 공책을 가지고 나왔다. 그는 정형사를 다시 한 번 훑어보더니 뭔가 결심하듯 내밀며 말했다.
“모든 건 여기 다 있으니까. 더 이상 들쑤시고 다니지 마. 그러면 그럴수록 상처만 덧나니까.”
정형사는 정중히 받아들고 물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르신 존함이라도.......”
그러자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대대로 이 집구석 집사였어.”
그리고 그는 곧바로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형사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더 물고 늘어졌다가는 공책마저 빼앗길 있다는 판단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리고 공터에 주차해 놓은 자신의 차로 향했다. 생각 같아서는 월곡 저수지도 둘러보고, 오동호의 부모도 만나고 싶었지만, 들쑤시고 다니지 말라는 노인의 엄포에 포기한 것이다. 슈퍼레인저(Super Ranger) 기도원도 마찬가지였다.
차에 돌아 온 그는 참을 수 없는 궁금증에 운전석을 눕힌 뒤 공책을 펼쳤다. 공책은 여러 권의 공책을 한데 묶은 것이었다. 특유의 곰팡이 냄새가 스며있는 노트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 차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