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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식장애 제 2부 3화 아이야 사랑해
게시물ID : medical_2077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아임파인오켘
추천 : 0
조회수 : 60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07/07 18:50:54

2부 3화  아이야 사랑해 Feat. 자존감

섭식장애 및 각종 정신질환과 동행하는  인간의 삶

by날지않는새Jul 01. 2019


 머리로는 이해하기 쉽지만 마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 진부하고도 교과서적인 이야기. 규칙을 준수하 듯 실행할 순 있어도 모든 상황에서 자연스레 그러하기 어려운 일. 바로, 나를 사랑하는 일.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나를 이해하고 아끼고 존중하는 일.


 태어나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자존감을 습득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간극은 은하계와 은하계의 차이만큼 넓다. 자존감이 높은 A라는 사람이 손을 씻고 핸드로션을 바를 때 나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다.  A는 진심으로 자신의 손이 매끄럽길 바라는 마음이 행동으로 발현된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흉내 낸 것일 뿐이다. 겉으로는 같은 행동으로 보이지만 정작 그 속마음은 완전히 다르다. 나는 핸드로션을 바르는 것이 나를 아끼는 일이라고 머리로 배워서 (혹은 주위 사람들과 위화감이 없기 위한 이유로) 행동하는 것이지 내 손의 매끄러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살아오는 내내 마음의 공허함과 싸워왔다. 사람이 좋았고 혼자 있으면 내 존재감마저 느끼기 어려웠다. 어려서부터 내가 있어서 타인이 있는 것인지 타인이 있어서 내가 있는 것인지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내가 있기에 타인이 있을 수 있다. 내가 없으면 세계 조차가 존재할 수 없다. 

 이 질문의 답을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을 공감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애초에 이런 질문을 품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건강한 사람의 생각이니까.

 내가 있어서 타인이 있는 것인지 그 반대인 것인지 모른다는 것은 그만큼 타인의 피드백 으로 나를 느껴온 것이다


 이것은 타인이 나를 조종하도록 나의 리모컨을 남에게 넘겨주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과거의 나는, 자기 이미지는 물론 나의 권리마저 타인에게 맡겨왔다. 알거나 혹은 알지도 못하는 타인들의 잣대에 내 젊고 예쁜 시절을 전부 갖다 바쳤다. 미디어가 보여주는 비현실적인 미의 기준들에 나를 비교하고 수시로 변하는 주변인들의 가치에 꾸역꾸역 맞추며 살았다.


 연예인 치타와 제아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방 언니 -방송국에 사는 언니들> '센 마이웨이 17편'에서 제아는 6kg을 단기간에 빼기 위해 2~3천만 원을 썼다고 말했다. 일반인들에게 이런 것이 가능한 일일까? 치타 역시 평범한 직장인이 시간을 쪼개 운동하는 것 조차가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말했다. 그들은 이어서 연예인들은 화보나 광고 등 보상이 따르기 때문에 그런 다이어트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며 직업이 연예인인 사람들의 몸에 현혹되지 말고 본인을 찾으라고 조언했다.


사진출처 :  유튜브 채널 <방언니 -방송국에 사는 언니들> '쎈마이웨이 17편'


 자신이 조종당하는 대인관계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누리는 유대감을 바라기도 한다. 이 두 가지 면모는 참으로 유지하기 힘든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자유를 원하지만, 동시에 관계를 원한다.

 



 얼마 전 지인 H와 사람이 사는 목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 주제는 H의 다음 말로 시작되었다. 

모든 사람은 다들 행복하려고 사는 거잖아. 

 나는 H의  이 말에 적잖이 놀랐다. 표정관리가 전혀 되지 못했다. 충격이었다. H는 굳어진 내 표정에 이 당연한 걸 가지고 왜 놀라느냐며 되려 충격을 받았다. H는 사람이 행복하려고 산다는 이 전제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H는 누구나 식욕을 느끼는 것처럼 인간은 다들 행복하려고 사는 거라며 행복론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H는 나의 섭식장애를 모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H의 말에 반박하고 싶은 것들이 한가득이다. 나를 비롯해서 내 주변의 사람들이 과연 행복하려고,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단연코 "NO!"다. 물론 개개인의 삶의 이유를 모두 '결국은 그 모든 것이 행복을 위한 거잖아. 그게 그 사람들의 행복의 가치인 거잖아.'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나는 내가 만나온 많은 사람들의 삶이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가 차마 없다. 

 처음 놀랐던 건 H가 이 전제를 굳게 믿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삶의 이유를 묻기 위해 세계일주를 하고 싶다는 꿈을 진지하게 품은 적이 있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한 문장으로 사람들의 삶의 이유를 확신하는 것이 놀라웠다.

 과장된 관용구가 아니라 정말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을 여럿 보아왔다.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며 하루하루 빚을 갚으며 살아가는 사람도 보았다. 무언가의 사명감을 갖고 살아가는 선구자도 있었다. 어머니를 생각해서, 엄마 때문에 죽을 수 없다는 사람도 있었다. 복수심에 불타 복수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고, 열등감 때문에 성공에 집착하며 사는 사람도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사는 사람, 만날 수 없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을 이루는 게 H의 말처럼 결론은 행복인 것 아니냐고 되묻는다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 생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절대 행복한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비록 내가 겉에서만 바라본 모습이지 그들이 행복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맞는 말이겠지만, 적어도 내가 곁에서 지켜보기엔 이렇다는 말이다.) 심지어 목표한 것을 이뤘다고 해서 행복해하기보다는 허탈함을 느끼며 더 깊은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더 자주 접했다. 


 삶을 살아가는 에너지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그렇게 힘을 얻고 빛을 발하며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본능. 그 일차적 본능인 먹는 것을 거부하는 나란 인간은 산다는 것 자체에 힘을 쏟는 것조차도 새로 배우고 익히며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인간의 욕구 5단계처럼 어쩌면 H는 행복에 가까운 사람. 나는 행복과는 조금 더 먼 쪽에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H의 전제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떠나, 그저 H는 다른 욕구들이(기본적인 욕구들, 생명, 안정, 소속, 사랑 등) 충족되었기 때문에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현재의 나를 비롯한 내 주위의 사람들은 생존의 욕구나 낮은 단계의 욕구들이 시급한 문제이기에 행복의 가치는 사치로 느껴질 정도인 것 아닐까. 아니면 진정한 자아실현의 목표가 너무도 거대해서 그것만을 위해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 욕구들을 무시하며 살다 보니 곁에서 지켜보기에 행복해 보이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감히 내가 그들의 가치까지 논할 주제는 못되지만 말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메슬로우의 욕구 5단계. ( 밑 단계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윗 단계의 욕구로 향할 수 없다는 것이 메슬로우의 이론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이뤄온 모든 성과는 사실 하나의 원트로 귀결된다. 나는 이 원트가 나의 진정한 욕구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깨달음 이후로 나는 한동안 매우 아팠다. 몸도 마음도. 그 모든 것들의 귀결은 단 한 문장.

내가 혼자이지 않기 위함.


 내가 단지 혼자이지 않기 위해서 그 모든 역경과 고난을 헤치며 살아온 거라니. 모든 진이 다 빠져버릴 정도로 허무하고 충격이었다. 솔직히, 나 자신에게 실망했다. 나는 그저 혼자이지 않기 위해서 대학을 나오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각종 공부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섭렵하고 직장에 다니며 늘 어딘가에 소속되려 했다. 단지 혼자이지 않기 위해서! 멋들어지게 말해왔던 나의 사명감, 꿈, 그 꿈을 이뤘을 때의 기분......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내가 혼자이지 않기 위해서라니 처참했다. 불쌍했다. 내가 불쌍해 보였다. 고작 혼자이지 않기 위해, 외롭지 않기 위해. 혼자라는 불안감에 맞서 싸우지 못하기에, 이런 나약함이 내 삶의 원천이었다니. 


 며칠이나 아픈 밤을 지새웠다. 그나마 내 원트를 이루기 위한 방법들이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방향이었던 것에 감사하자고 되지도 않는 위로나 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의 저 근본적인 원트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혼자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럼 그거 자체를 목적으로 두고 삶을 사는 사람이 되면 되지.' 누군가가 내게 왜 사느냐고 물으면 이제는 '혼자이지 않기 위해 살아요.'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되는 것일 뿐이야. 이 마음이 또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지만 (30년 넘게 혼자이지 않기 위함에 목숨 걸고 살아왔으니 쉽게 바뀌진 않겠지) 그것은 변화가 아니라 발전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나는 병원을 가는 것조차 나를 위해 간 적이 없다. 누군가의 관심을 받기 위해 가거나 (그러기 위해 감기 걸린 몸을 안고 추운 겨울에 몇 시간씩 산책을 할 정도였다.) 이제는 병원에 제 발로 가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기 위해 갔다. 이렇게 자존감이 낮고 타인의 리액션에 의해서 나를 느끼며 살아왔으니 지금 이렇게 아플 만도 하다. 이 모든 것은 나를 확신하지 못하는 불안에서 오는 것일까?


 자존감이라는 게 그렇다. 운전을 하는 모습에서도 나는 자존감을 찾아낸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차선 변경을 어렵지 않게 해낸다. 자신에 대해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좁은 골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다. 반면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옆과 뒤에서 쏟아지는 비난 (실제로 들리지도 않는)을 걱정하며 차선 변경에 진땀을 흘린다. (단, 운전경력이 동일했을 시)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물건을 다루는 것에도 자존감은 드러난다. 나는 휴대폰을 집어던지곤 했었다. 나는 내 물건을 (저런 값 비싼 것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야.라는 이상한 겉멋까지 들려있었다. 자랑하 듯 내 물건들을 함부로 대했다. 그러나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휴대폰을 아끼고 액정 보호 필름을 붙이고, 케이스를 씌었다. 나는 내 몸을 스스로 망가트리고 자랑하 듯 관심을 요구하고 있을 때 그들은 물건조차 자신의 몸처럼 아껴서 사용했다. 



 전 직장에서 내 전임자는 퇴사 이유가 여럿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큰 실망과 상처를 받았는데 이 또한 퇴사 이유에 큰 몫을 차지했다. 퇴사 전 아이들에게 어떤 큰 사건이 있었고 선생님들은 그 사건에 대해 아이들이 되도록 충격을 받지 않고 정서적으로 안정을 되찾기를 학수고대하며 노력했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 상처 받은 얼굴로 아이들이 자신의 사랑과 진심을 알아주기는커녕 따지 듯 의심했다고 말했다. 자신이 그동안 해온 진심과 노력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실망감과 허무함 등 여러 복잡한 마음을 안고 결국 그녀는 퇴사를 선택했다. 

 지금 누군가가 내게 가장 큰 잘못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나를 사랑하고 내게 진심을 준 사람들의 마음을 전혀, 단 1%도 믿지 못하고 모두 튕겨내 버리거나 이용했던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이 주는 사랑조차 받지 못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너무도 먼 여정일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도 당연히 서툴다. 사랑을 줄 수도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저 여러 모임과 단체, 학교와 직장에 소속되어가며 군중 속의 외로움을, 화려함 속의 고독을 느끼며 살아왔다. 그 단체들의 여러 가지 가치 기준에 나를 억지로 구겨 넣어가면서 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에 대해 결정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그저 나 자신이 나를 결정할 뿐이죠. - 엠마 왓슨


 지난 화에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이며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 내 치료에 동기부여가 된다고 말했다. 동시에 아직도 내가 잘게 자른 목표와 나의 생각들이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관심받기 위한 새로운 가면이라고도 인정하였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지금 이것이 나의 현주소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을 내가 인지하고 이해하고 있으면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흉내이면 어떠한가. 서론에서 언급한 A를 따라 핸드로션을 바르는 행위가 흉내이더라도 계속 따라 바르다 보면 내 손은 결국 부드러워질 것이다. 당장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어려우면 어떠한가. 내가 이렇게 나의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데. 앞으로 나는 나를 타자화 시키고 그 아이와 친해질 생각이다. 내가 타인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 안달복달 해온 그 모든 에너지를 나를 타자화 시킨 아이에게 쏟아부어 줄 것이다. 


 더 이상 남을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아이(타자화 시킨 나)가 좋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나에게도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다. 23살 이후로 선크림 이외의 것을 바르지 않겠다는 나의 결심은 (사실 이것조차도 너무 아름다운 중년의 여성이 선크림만 바르는 것을 따라한 것이었다.) 결국 있는 그대로의 내 얼굴을 더 사랑하고 싶었던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화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 중에 하나로 이런 일을 한다는 의미이다.) 지금은 확실히 그렇다. 화련 한 화장기술로 내 얼굴을 뒤덮는 것보다는 가벼운 터치와 건강한 생기로 예쁨을 넘은 아름다움을 갖고 싶다. 이렇게 숨어 있는 나를 사랑하는 마음들을 찾아내고 강화시킬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나를 위해 살고 싶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우선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을 흉내 내고 머리로 배워가면서라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어이없지만 내가 혼자이지 않기 위함이 내 삶의 목표라면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위해서 열심히 살 것이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삶의 목표가 바뀌지 않는다면 어쩌면 그것이 온전히 100% 진정한 내 삶의 이유이자 행복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지 않겠는가. 결국 선택과 결과, 그것을 어떻게 정의 내리느냐의 차이일 뿐일지도 모른다. 친하게 지내는 마흔을 훌쩍 넘긴 상담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지금, 이 시대에, 이 나라에, 이런 인종으로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이유. 내가 나란 사람으로 태어난 이유를 찾는 것.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실행하며 사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생을 살고 있는 이유이자 목적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나라는 사람으로 온전히 살아간다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다. 내 본성을 표현하기 위해선 먼저 나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나를 표현하기 위함에 있어 내게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그 모든 것이 내 속에서 설명이 가능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나만이 평가가 가능하다. 내가 온전히 혼자이지 않는 것이 결국 나의 진정한 욕구라면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그 아랫단계의 욕구들을 무시해선 안 될 것이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다 보면 그래서 1차적 욕구인 먹고 자는 것을 잘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직장에 소속되고 그곳에서 인정받으며 살다 보면 나는 내가 원하 듯 빛을 뿜고 따스함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사람 곁에는 그런 따스한 사람들이 몰려들 테니까. 내가 붙잡지 않아도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나는 혼자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https://brunch.co.kr/@aiyouri/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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