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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공기는 차가웠다. 봄의 문턱을 넘었는데도 찬 기운은 여전히 옷깃을 여미게 했다. 담장을 타고 내리던 봄의 전령 개나리도 꽃 입술을 반쯤 오므리고 있었다.
수사본부 출입문이 열리더니 정형사가 대빗자루를 들고 나왔다. 어제 저녁에 비해 표정은 밝았지만 여전히 그늘이 존재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긴 한숨을 내쉰 다음 앞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그건 모든 일을 잊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겠다는 의도로 보였다.
막상 어둠을 뚫고 달려 왔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음을 다지고 다져 응급실 안까지 들어 서려했지만 끝내 들어서지 못했다.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한결 밝아보였다. 여러 종류의 크고 작은 링거가 그녀의 가느린 팔에 꽂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골이 났는지 상관치 않는 표정이었다. 그녀 곁에는 한 노신사와 오동호가 함께 있었다. 그들은 무슨 말인가 주고받았다. 순간 정형사는 자신도 모르게 형사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바로 옆 자리커튼으로 파고들었다. 그 곳에는 노숙자로 보이는 한 노인이 의식을 잃은 체 누워 있었다.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 관계자들이 그의 신원파악을 위해 자리를 비운 듯 싶었다. 정형사는 그를 방문한 사람처럼 행동하며 옆자리의 커튼 속에 그들의 얘기를 엿들었다.
나리는 자신이 잃어버린 메모리에 대해 자책을 하고 있었다. 노신사와 오동호는 괜찮다며 위로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좀처럼 마음을 풀지 못하고 자책을 계속했다.
“원장님 이거 어쩌면 좋죠?”
순간, 정형사의 눈빛이 빛났다. 그토록 궁금해 하던 당사자를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이 궁금했다.
그래서 커튼자락을 살짝 제키고 그를 쳐다봤다. 그는 놀랍게도 어제 응급실을 나설 때 고마움을 표시하던 사람이었다.
- 그렇다면 민국기........
정형사는 나름대로 확신하고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는 주위의 칭찬대로 인자해 보였다. 교육자 출신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자책에 또다시 위로를 했다.
“너무 걱정 말아요. 여기 오군이 저장해둔 것으로 대처했으니까.”
그리고 오동호를 쳐다봤다. 그러자 오동호가 고개를 조아리며 덧붙였다.
“맞습니다. 아버지 말대로 동호가 다 해결했습니다. 이래봬도 동호는 컴퓨터 박사입니다.”
그리고 그는 양손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시늉을 했다. 순간 정형사는 또 한 번 놀랐다. 잠복할 때 그가 아버지라 부르던 사람의 실체가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나가 직접 확인할 수 없어 다음 대화를 묵묵히 음미했다. 나리가 다소 안정된 톤으로 다시 말했다.
“그거 중요한 거 아네요?”
그러자 노신사가 여전히 부드러운 톤으로 말했다.
“그렇게 까지는...... 견기자가 요청한 보충자료야.”
“그렇다면 예정대로 특종기사가 나가는 겁니까?”
“아마도 그럴 거야. 지금쯤이면 견기자와 강변호사가 만나 법률적 검토를 하고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경찰 측에서 똥줄이 타 종결을 서두르겠지.”
“그럼, 동호 오빠도.......”
“그래. 이제 나리양의 건강 회복이 문제야. 유아원 개원을 언제까지나 미룰 수 없으니까.”
이때였다.
누군가 불쑥 들어섰다. 그는 자신에게서 나리를 인계 받은 남자 간호사였다. 정형사는 옆 동의 그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그의 팔을 끌어 응급실 밖으로 인도했다. 그는 왜 이러냐며 버텼다. 순간 정형사가 신분증을 내보이자. 그는 순순히 응급실 밖으로 따라 나왔다.
밖은 어둠에 온통 묻혀 있었다. 초승달도 구름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정형사는 가로등 밑으로 그를 인도했다. 그는 가로등 밑에 자리 잡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그쳤다.
“왜 이러세요! 인계하신 환자가 범인이라도 됩니까?”
“아니오. 상태가 궁금해서요.”
“그래도 이건 개인신상정보라서........”
“참고만 하겠습니다.”
그러자 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혈액 암이에요.”
“뭐라고요?! 백혈병이요.”
“네”
“그.... 그럼. 주....죽을.......”
“아닙니다. 나리님은 다행히 초기에 발견한데다. 몇 달 전에 골수 이식까지 받아 큰 무리는 없습니다.”
“그럼 어제는........”
“아네. 그건 과로나 운동부족으로 인한 쇼크증상이 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담당 선생님 말씀이 이번 치료가 끝나면 어느 정도 안정 궤도에 들 거라고 하더군요.”
“천만 다행이군요.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정형사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다가서며 물었다. 그러자 간호사는 할 말 다 했다는 듯이 돌아서려다 말고 쳐다봤다.
“골수 제공자가......”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제공자가 밝히기를 꺼려한데다 수여자 역시 불문에 부치겠다고 해서요.”
그러자 정형사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오동호 씨 맞죠!”
그러나 그는 긍정도 부정도 없이 서둘러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건 호출 신호가 오기도 했지만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정형사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따라 들어가서 정황을 다시 살필까도 생각했지만 간호사의 말에 마음이 풀려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때마침 택시 한 대가 들어섰다. 그는 묵묵히 택시에 올랐다.
그는 다시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건 마음의 부담도 덜었고 또한 민국기 교장과의 관계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그건 자신들을 압박할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수습할 길도 없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이미 신문발행이 시작됐을 테니까. 하지만 그대로 두 손 놓고 당하기만 있을 수 없어 자취방보다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것에 대처할 만한 자료들을 정리했다. 먼저 지금까지 수사를 토대로 사건관계도 상황판부터 수정했다. 이것저것 하다 보니 새벽 3시가 됐다. 정형사는 내일을 위해서 한숨 붙였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출근 시간 즈음에 일어나 이렇게 마당을 쓸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피곤하지는 않았다. 비록 쪽잠이기는 하지만 길들여 지다보니 어느새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뭐 이런 놈이 있어!”
“그러니까 말입니다! 의리라고는 좆도 없는 놈인데요?”
흥분된 어조에 놀라 쳐다보니 최반장과 박형사가 본청 후문에서 신문지를 들고 나오며 투덜거렸다. 두 사람이 출근길에 만난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본청 사무실에 들려 기사를 살펴보기 위해 각자 다른 신문을 들고 오는 길이었다.
정형사는 그들을 바라보며 머리를 조아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러자 최반장이 신경질 적으로 받았다.
“좋은 아침은....... 또 뒤통수 까였어!”
그러나 정형사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박형사가 정형사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왜 반응이 없어...... 그건 예상을 했다는 거야?”
“됐고!”
최반장이 말을 끊고 정형사를 쳐다봤다.
“컨디션은?”
“좋습니다.”
“그래. 들어가자고 간부님들 아침 조회가 끝나면 과장님이 곧 들이 닥칠 테니까!”
최반장은 할 말 다했다는 듯이 앞장서 본부 사무실로 들어섰다. 이어서 박형사가 뒤따라 들어갔다. 정형사는 빗자루를 출입문 뒤에 세워두고 들어섰다.
“뭐야?! 정형사 혼자 야근 한 거야?”
최반장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특히 달라진 상황판을 보고 놀랐다. 정형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써늘한 자취방보다는 이곳이 더 좋아서요.”
“이제, 베테랑으로 가시겠다. 어쭈구리 상황판도 다 정리하셨네?
박형사가 상황판 앞으로 다가와 자세히 살펴보며 말했다.
“네 잠도 오지 않고 그래서 어제까지 있었던 모든 걸 총망라해 정리 해봤습니다.”
“그럼, 조금 있다. 과장님 오시면 자네가 브리핑하면 되겠구먼.”
하며 최반장이 한마디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근데 말이야. 똥개 이 자식이 이렇게 압박한 것은 뭔가 카드가 있다는 건데. 박형사 생각은 어때?”
“지금까지 그쪽 형태를 보면 찰싹 달라붙어 지치게 만들겠다는 거머리 작전인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줄기장창 금치산자를 미끼로 대응하겠다는 거죠.”
그러자 정형사가 끼어들었다.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치고 빠지는 전략인 것 같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뭔가 흘려서 그걸 미끼로 되치겠다는 전략이오.”
“그럼, 어제 정형사가 습득한 것도?”
“물론입니다. 뭔가 거기에 대한 반응이 오리라 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박형사가 끼어들었다.
“그건 이미 왔지. 오늘 신문에 난도질을 했잖아요.”
그러자 최반장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허긴?”
정형사는 기사 내용이 뭔지 몹시 궁금해 물었다.
“뭐가 어떻게 났는데요?”
“우리 더러 헛물만 켜는 무능한 졸속 수사로 의혹만 키운단다.”
박형사가 기가 막힌다는 듯 자신이 들고 있던 신문을 내밀었다. 정형사는 받아 천천히 기사를 음미하며 살펴봤다.
“그들의 의도가 감이 와?”
최반장이 이런 정형사를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그러나 정형사는 묵묵히 다음 장을 넘겼다. 박형사는 보나마나라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정형사가 소리 내어 읽었다. 그건 소 타이틀이 아닌 본문의 뒷부분이었다.
“피해자 측에서 CCTV 증거를 수집해 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만 끌다 제2차 희생자가 발생함. 자세한 것은 주말에 발행되는 본사 자매잡지 ‘사건과 실체’에서 밝힘.”
“그래서 낭독하는 요가 뭐야?”
최반장이 답답하다는 듯이 정형사를 보며 다그쳤다. 그러자 박형사가 뻔한 것 아니냐는 투로 받았다.
“요는 뭐에요? 빨리 사건을 종결하라는 거죠.”
“정형사 생각은 어때?”
“저도 박 선배님과 같은 맥락이지만 전 조금 달리 봅니다.”
“뭘?!”
“예고라고 봅니다.”
“예고라니?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올 거라는 거야?”
“그렇습니다. 지금 정황을 살펴보면 이 사건의 범인은 황동팔이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그를 지목하는 증거가 속출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역으로 황동팔을 노린다는 거야?”
“아닙니다. 그들이 빠져나갈 유일한 통로인데 왜 죽입니까?”
박형사는 여전히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쳤다. 하지만 정형사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일종의 협박입니다.”
“협박이라니?”
“당신들이 늦장을 부리면 황동팔 역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거요.”
“그래도 우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죄책감을 담은 자살로 마무리 짓겠죠.”
“그렇다면 우리가 방조하는 것도 한 전략이라고 볼 수 있네?”
“결과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이때였다.
출입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수사과장이 들어서며 소리쳤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