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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중기에 성리학이 들어왔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통치 철학으로서 존재했지 일반백정 사이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던 비성리학의 사회였다.<div>그러다가 성리학자인 정도전이 이성계의 도움을 받아 조선을 건국하고 썩어문든 불교를 민간에서 밀어내기 위해 성리학을 민간에 전파하기 시작한다.</div><div>이 덕분에 민간에 성리학이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이는 높은신 분들의 전유물이었다. 태종이 첩의 자식때문에 왕자의난을 겪은 후 적서차별 문화를 도입했지만 이 역시 민간에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일례로 제사는 남녀 구분없이 윤회봉사라고 해서 돌아가면서 모셨고 이에 따라 재산 또한 균등상속되었다. 족보 또한 남녀 구분없이 연령순으로 기재되었다. 혼인제도 또한 솔서혼, 남귀여가혼, 서류부가혼이라하여 처가살이가 흔하게 나타났다. 장가간다는 표현 또한 장인집에 들어간다는 표현이다.</div><div><br></div><div>그런데 이는 조광조의 등장으로 판세가 바뀌기 시작한다. 지방 사림 출신이었던 조광조는 중종반정이후 세조의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중종에 의해 등용된 사림이었고 더 많은 사림을 양성하기 위해 송나라의 여씨향약이라는 지방자치단체제도를 도입해 성리학의 문화를 지방 곳곳에 배급한다. 이후 이 기조에 따라 이황은 예안향약, 이이는 해주향약, 파주향약이라는 것을 만들어 여씨향약을 조선에 실정에 맞게 개정하였고 이것을 기준으로 전국의 모든 사림이 자기 지역에 성리학 문화를 보급하기에 이른다. 사실 여기까지는 문제 될것은 없다. 이 당시 사림은 원리원칙을 준수하고 이성적으로 지방자치를 이끌어 나가며 민중이 성리학을 받아들이는데 큰 역할을 한다. <div>하지만 임진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중화사상, 화이론에 철학적 타격을 받으면서 조선의 성리학은 뒤틀리기 시작하며 송시열이라는 산림의 등장으로 하여금 교조화되기에 이른다. 여기에 숙종대에 환국을 겪으면서 당파싸움이 격해지면서 편나누기을 위해 족보학이 발달한다. 이에 더해 신분제가 동요되어 중인 출신의 양반, 신향의 출현은 족보학에 매달리게 만든다. 조상의 은덕외에는 내세울게 없던 향반(당파싸움에 져서 낙향안 양반)과 몰락한 양반인 잔반들은 족보학에 열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이성적이고 실천적이던 초기 조선 성리학은 모든 것에 차별을 두는 오래된 성리학을 꺼내들어 남녀차별, 적서차별을 심화시킨다. 성리학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아직도 무력으로 서열을 정하던 시대였기에 적자에게 최고 서열을 몰아주는 문화를 꺼내 신향과 구차한 차별을 두려고 했던 몸부림이엇다.
이후 여자가 시부모댁으로 들어가는 시집이 정론이 되었고 장자우대, 양자제도, 부계위주, 선남후녀의 족보가 만들어진다. 과부는 재가가 금지되고 , 효자와 열녀는 표창을 하사받았다. 신분제 동요되고 여러가지 자본주의적 모습이 태동하던때에 이에 대한 반향으로 우리네 양반들은 이러한 퇴보적인 문화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