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지우고 싶은 기억을 말끔히 지워드립니다! 악몽과도 같은 그날을 과거 지우개를 이용해서 지워 보세요.자~이렇게 달력의 날짜를 지우개로 삭삭 지우면 여러분의 기억도 말끔히 포맷이 되는거죠. 오늘만 특가행사 들어갑니다. 단돈 999,900원. 무이자 12개월의 혜택까지 드립니다. 금액이 부담이셨던 분들 오늘이 절호의 기회입니다.지금 서둘러 전화하세요!재고수량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쇼호스트의 언변에 홀리기라도 한듯 지현은 멍하니 있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 기억들을 지워줄 수 만 있다면 돈은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다.
며칠 뒤 택배상자가 도착했다.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달력과 자그마한 지우개가 상자안에 들어 있었다.
지현은 96년도의 다이어리를 꺼내 뒤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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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은 그룹 아이돌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던 시기였다. 쉬는시간이면 둘둘 셋셋 모여앉아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아이돌의 노래를 들으며 따라 부른다거나 어설픈 안무를 하며 자기들끼리 킥킥댔다.
그때였다.
옆반 유정이가 지현의 어깨를 탁탁 쳐댔다.
"야.니가 이 반 36번 맞지??"
"응.맞는데.왜?"
"왜긴 왜야.이년아. 남 뒷담화 그렇게 하고 다니니 좋냐?? 불만있음 직접 말하지 쪽팔리게 음악감상실에다가 뭔짓이냐고?"
"음악감상실?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이 뻔뻔한 년 좀 봐라?음악감상실 36번 자리에 내 이름이랑 욕 칼로 판거 떡하니 보이는데! 그걸 못봤다고??눈이 있으면 가서 쳐 확인하던가.아무리 봐도 그런짓 할 년은 너밖에 없어. 다른반 36번들은 얼굴도 모르는 애들이고"
그때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지현은 반사적으로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방금 어떤일이 일어난건지 머릿속의 사고회로에 혼선이 온것 같았다. 도덕선생의 목소리는 저 멀리서 앵앵되는 한밤의 모기 소리처럼 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현은 왜 자기를 콕 집어서 지목했는지 알 수 없었다.36번들이 앉는 자리에 욕이 씌여있다고 해서 그게 지현이라는 증거는 될수없다.
하지만 지현이 실제로 그일의 주범인가하는 진실과는 상관없이 그 날 이후로 많은 것들이 변하기 시작했다.쉬는 시간에 이어폰을 나눠 듣던 친구들은 지현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도시락을 같이 먹던 친구들은 노골적으로 지현이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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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은 다이어리에서 그날의 기록을 찾고 있었다.
'하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여름쯤이었던것 같은데'
6월×일의 칸에 빨간글씨로 죽고싶다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X일을 기준으로 앞 이틀을 지웠다. 아마 그 일이 있고나서 당일보다는 다음날이나 다다음날 친구들의 반응을 보고 그렇게 적은게 타당하다 생각해서이다.
관자놀이 부분이 지긋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후에 지현의 기억속에는 친구들의 갑작스러운 냉담한 태도들만 기억에 남았다.
'왜일까?왜 다들 갑자기 나에게?'
지현은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할 순 없지만 너무나 급작스럽게 변한 친구들의 기억에 가슴이 아려왔다. 지현은 주저없이 아까 지운 날짜뒤로 한달가량의 날짜를 지웠다.
다시한번 머리가 지긋이 아파왔고,그녀는 이 통증이 기억이 없어지는 과정이라 생각하며 애써 안도하려 했다.
이제 그녀의 기억엔 여름방학에 혼자 집을 지키며, 외로워했던 자신만이 남았다. 보통의 방학이라면 친구들과 머리에 염색을 해준다거나, 놀이공원에라도 놀러가는게 평범한 일상 중 하나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해의 여름방학은 달랐다.
지현은 이런 모든 기억이 깔끔하게 사라진다면 더 나은 인생을 살 수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부지런히 한해의 날짜를 지워가기 시작했다.
한달이 넘는 기간을 지워 나가던 지현은 갑자기 코와 귀에서 피를 흘리며 맥없이 쓰러졌다.
[과거 지우개 사용법 및 부작용]
1. 지우고 싶은 기억의 날짜를 지우개를 이용해 꼼꼼히 지워주십시오.
2.하루 두번,한번에 최대 3일치의 기억을 지울 수 있습니다.
※연속 일주일의 날짜는 한꺼번에 지우지 마세요. 뇌에 치명적인 무리가 가해질 수도 있으니 이점 꼭 유의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