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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와 승천 ( Master and Mastery )
비전에 관하여 -----------by D. K
완전해지기 위해서 완전을 보아야 한다. 존재의 상승 소용돌이 위에 있는 자들의 목표는 오리지널 모나드인 '아앰 프레젠스'의 완전함이다. 완전(perfection)을 생명의 목적으로서 생명의 법칙(law)으로 받아들임은 '이니셰이션(비전 initiation-" i-niche-i-action ")'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이니셰이션은 'I AM'을 시인하는 것이, 자아됨의 앎 (awareness of selfhood)을 가진 것이 '신의 일체를 보시는 눈(all-seeing-eye-of-God)'의 'niche(자리)'안에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의로운 'action행동'을 세울 목적으로 자리 잡을 때 시작된다. -----------------
이 얘기는 '인간 오라' 2부에 나오는 것으로 아직 번역되진 않았습니다. 금방 이해가 안 가시더라도 그냥 마음에 담아 두시기 바랍니다. 대사들의 가르침을 읽는 족족 이해 하긴 어렵습니다. 즉각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일단 마음의 다락방에 넣어두고 넘어가라고 대사들은 말합니다.
그렇게 마음에 담아둔 것은 내면의 화두로 남아서 우리가 점차 나아가다 보면 확연히 이해할 때가 이르게 됩니다. 이해가 안된다고 거기에 매달리다 보면 대사들의 가르침은 한 장도 제대로 넘기기 어려울 겁니다. 이는 다른 경전에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저도 완벽히 이해하진 못하지만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드리지요. '아앰'을 시인하는 것 또는 '자아됨의 앎'을 가진 것은 우리들의 영혼을 말합니다. 신의 일체를 보시는 눈은 완전함을 보는 눈으로 우리의 완전한 이미지를 보고 있습니다. 그 눈의 자리는 바로 '세 번째 눈'입니다. 거기에 자리 잡는다함은 완전함을 존재의 목적이자 존재의 법칙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리스도와 '아앰 프레젠스'의 영역으로 그곳에 나의 완벽한 이미지가 간직되어 있습니다. 땅은 영혼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우리의 완벽한 이미지가 표출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바른 행동을 세우기 위해 '신의 일체를 보시는 눈'의 자리에 자리잡음은 완전함을 향해 자신의 총력을 다함을 뜻합니다.
또한 완전함을 존재의 법칙으로 본다함을 제가 이해하기론 카르마를 통해 나를 가르치려는 구루(하느님)의 안배는 완벽한 것이기에 나는 나에게 다가오는 그 무엇이든 스승의 손길로 보고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내게 불리해보이는 어려움 속에서도 누구를 원망하지 않으며 그 이면에 계 신 스승의 사랑을 보려고 할 때 거기서 진정한 비전이 시작되지 않겠습니까?
비전은 단순한 교훈의 전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상승으로 인한 자아의 확대, 그로 인한 능력의 확대가 수반되는 과정입니다. 어려움을 회피했을 때와 이겨내었을 때 사람이 어떻게 다르겠습니까? (대사들은 보는 것은 곧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완전을 보면 완전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신을 보면 사람으로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을 보면 신이 된다는 얘깁니다.)
"생명은 우리에게 그런 도전들을 주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도전들을 받아들임으로써만 우리세계의 실질적인 주인이 될 수 있으며 우리의 '신적인 미래'를 물려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카르마란 것은 사실은 자기가 구동시킨 에너지이지요. 그 에너지가 어떤 형태로 돌아올지는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고 그에 대해 대비도 할 수 있습니다. 사주니 액땜이니 하는게 다 그와 연관이 있습니다만, 대사학에서는 '우주시계 (Cosmic Clock)'란 것으로 그 양상을 예측합니다. '우주 시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소개하도록 하고, 여기서는 나쁜 카르마에 대비하는 법에 대해 얘기하지요.
카르마의 법칙은 물리적인 법칙처럼 냉혹합니다. 그야말로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입니다. 사소한 생각이건 느낌이건 어떤 행위건 우리가 밖으로 보낸 모든 것은 우리에게 되돌아옵니다. 사람을 해칠 때 실질적인 가장 큰 피해자는 해친 당사자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카르마의 냉혹한 법칙이 더 이상 냉혹해지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의 법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잘해보려는 영혼의 카르마를 줄여주거나 소멸시켜 주거나 그 떨어지는 시기를 연기해 주는 겁니다. 연기된 카르마는 그 영혼이 자신의 나쁜 카르마를 스스로 갚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을 때 다시 내려오게 됩니다. 이 물질계는 우리 영혼들의 학습장이고 실험실입니다. 실험실에서 실험하다가 얼마든지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류를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습니까? 용서는 이런 실패한 실험의 결과들을 돌이킬 수 있게 하고 다시 새로 시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시행착오는 우리 영혼의 특권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죄사함이라고 하는데 대개 이것은 카르마가 유예된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렇게 유예된 카르마는 언제고 반드시 자신이 갚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다 갚아 주셨다고 하지만 갚아준 게 아니라 예수께서 그 카르마를 대신 져 준 것입니다. 그렇게 대신 져 준 카르마는 그 영혼이 성장하여 스스로 질 수 있게 되면 다시 내려옵니다.
그래서 기독교 성자들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체험한 이후에 아주 고통스런 질병에 걸리기도 했던 것입니다. 죄의 용서, 즉 카르마가 없어지거나 연기되는 것은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그냥 가만히 있는다고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를 받는 비결은 먼저 내가 모두를 용서하고 그 다음에 신에게 나의 죄의 용서를 비는 겁니다. 그래서 참회는 가장 중요한 수행 중에 하나입니다.
카르마가 용해되는 죄의 용서는 성령의 작용인데 이때 발생하는 것이 바로 '바이올릿 불꽃'입니다. 이것의 변환 작용에 의해 나쁜 카르마가 변화되어 본래의 순수한 에너지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충분한 양의 카르마가 변환되면 그때는 그게 떨어져도 별 큰 어려움없이 이겨나갈 수가 있게 됩니다. 이렇게 미리 카르마를 변환시키는 것이 심판을 앞당기는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이것이 카르마를 다루는 가장 과학적인 방법입니다.
나쁜 카르마는 우리의 몸을 이루는 전자와 원자 사이의 공간을 막고 있는 타르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몸 속으로 자연스런 에너지의 흐름을 차단하지요. 이래서 의식의 불명료함, 혼란스러움, 신체적 결함 등을 생기게 하지요. 바이올릿 불꽃은 이런 타르들을 태워버려서 모든 세포와 원자, 전자들이 숨쉴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쁜 카르마의 타르들이 제거되면 될수록 에너지의 유통이 활발해지고 그에 따라 의식의 상승과 신체적 건강의 회복등이 따르게 되지요. 그러면서 잠재된 영적 감각들도 서서히 회복되지요. 한마디로 바이올릿 불꽃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하느님 사이를 좁혀주는 에너지이지요. (사소한 부정적인 생각이나 느낌도 나쁜 카르마가 됩니다. 그래서 매일 저녁에 그날의 죄에 대해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는 행위가 중요한 거지요. 그냥 넘어가면 나쁜 카르마가 자꾸 누적되어 나중에는 산처럼 쌓입니다.
선의의 거짓말같은 행위도 카르마가 되긴 하겠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미친 결과지요. 그래도 거짓말은 나쁜 카르마를 만듭니다만. 안락사등도 이기적 목적으로 남을 죽이는 것과는 다르겠지만 아무튼 하늘의 저울은 정밀합니다. 플러스 마이너스 정확히 계산됩니다. 피치 못해 안락사를 시켰다면 다 계산에 들어 갈 겁니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구세주인 이유는 인류의 집합적인 카르마를 자신의 빛으로 지탱해 줌으로써 사람들이 다시 계속 환생하고, 어느 정도는 자기 카르마의 짐을 덜고서 살아갈 수 있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 전대의 화신들인 석가모니 부처나 마이트레야 등도 그렇게 사람들의 카르마의 짐을 져서 인류가 계속 환생하면서 자기 빚을 갚아 나갈 수 있게 해온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2천년 동안 그 짐을 져오고 있는데 문제는 그 짐을 더 이상 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류 전체의 카르마가 급작스럽게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그게 바로 '암흑 주기(dark cycle)'입니다. 이때 떨어지는 카르마는 인류가 25,800년간 쌓아온 나쁜 카르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더 이상 인류 전체의 죄의 짐을 지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때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때가 유례없는 환난의 때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계시록의 예언대로 그 때는 '주의 크고 두려운 일이 임하는 때'인데 지금이 바로 그 시기입니다. 이러한 '두려운 일'은 인류의 카르마가 싸이클을 따라 떨어지면서 벌어지는데 계시록에 그것은 '네 마리의 말의 기수'가 달리는 양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카르마로 지구는 온통 파괴되어 다시금 원시시대로 전락할 것입니다.
그 카르마는 엄청난 자연재해, 극심한 기근, 대규모적인 경제적 붕괴, 질병의 만연, 전쟁에 의한 대량 파괴등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도 막을 수 있습니다. (그 많은 카르마를 예수 1인이 짐질수 있었던 것, 그게 바로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신과 함께라면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신을 떠나서는 어떤 일도 가능하지 않다고 그럽니다. 우리가 이나마 살아있어 활동하는 건 신께서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의 힘에 눈을 돌려 그것을 바로 사용할 때 가능합니다. 그러나 현재 인류의 전반적인 경향으로 볼 때 그런 일이 인류 전체에게 일어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소수의 헌신적인 사람들이 자신에게 있는 신성의 힘을 인류의 카르마를 변환시키는 데 쏟는다면 대규모적인 파멸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보면 최소한 열 명의 의인들만 있었다면 그 도시의 파괴를 막을 수 있었음을 알 것입니다. 그 일화에서 의인의 역할은 '빛의 기둥'인 것입니다. 의인의 역할은 스스로가 빛의 기둥이 되어 그 도시의 전체적인 카르마를 지탱하는 것입니다.
신과 온전히 하나가 되어 일할 때 그 사람의 모든 챠크라에서 방사되는 신의 엄청난 에너지는 한나라 혹은 대륙 전체에 어둠의 힘을 감소시키고 빛의 작용을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은 몇 만년간 누적된 카르마의 빚을 단숨에 갚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기의 때는 기회의 때이기도 합니다. 대사들은 지금은 '물리적 비전(physical initiation)'의 때라고 말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때에는 고요히 자아를 성찰하여 자아의 본성을 깨우치는 때였다면 지금은 '행동'해야 하는 때란 얘기겠지요. 인류의 카르마가 떨어져 사람들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마당에 고요히 명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암흑주기가 더욱 어려운 것은 이 시기를 틈타서 어둠의 세력들이 기승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때가 얼마남지 않은 걸 알기 때문입니다.)
만일 대규모의 파괴로 인해 그동안 쌓아온 문명이 다 날아가 버린다면 나중에 우리가 다시 태어났을 때는 아마도 구석기 시대가 한참 진행중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가르침들은 아마도 다 날아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 잃어버린 가르침들을 회복하려면 아마도 다시 몇 천년이 지나야 하겠지요.
만일 이 시기를 대규모적인 파괴없이 넘긴다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가르침들은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이고 후대에 태어나는 이들은 보다 쉽게 이런 가르침들을 접할 수 있을 겁니다. 만일 우리가 이 생애 승천하지 못했다면 나중에 다시 태어나도 쉽사리 과거에 알았던 가르침들과 연결되겠지요. 그래서 못했던 일들을 마저 다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우리에게 제일 시급한 과제는 구세주의 일에 동참해서 대규모적인 파국을 저지하는 겁니다. 그래서 대사들은 많은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에 필요 한 행동의 길인 '카르마 요가'를 제자들에게 촉구하는 것입니다.
대사들과 더불어 이웃을 돕는 이러한 일은 아마도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내면에서 했던 맹세일 겁니다. 그래서 남을 도우려는 마음은 여러분들의 내면적인 충동이 되었고, 그 충동 때문에 道라는 것을 찾진 않았습니까? (카르마 요가는 행동의 요가이고 자기를 잊고 중생(그 안에 계신 신)에게 봉사함으로써 완성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래요. 여러분은 빛의 전사가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지구를 구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