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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 불면과 공상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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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배터
추천 : 1
조회수 : 49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04/28 01:2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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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푸쉬킨의 소설 '오네긴'의 여주인공 타티아나는 귀족 집안의 딸이다. 시골마을에 살면서 할 일이 너무 없어서 한심한 로맨스 소설이나 읽고 시간이 더 남으면 공상밖에 할 일이 없었다. 그녀가 지성적인 인간이 아니었던 건 자극이나 변화없이 모든 일을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시에서 내려 온 청년 오네긴이 자신의 책을 도서관에 들여오고 나서야 타티아나는 그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그가 가져온 책을 읽기 시작한다. 그 책은 로맨스소설과는 다른 종류였다. 그 이후 장녀로써 집안에 도움이 되기 위해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선택을 하면서 더 성숙한 인간으로 변화한다.

시간이 많다 +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대로 된다 = 공상을 즐긴다 라면 이 세상에 저 공식을 위배하며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나처럼 한심한 공상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대체 뭐가 문제인걸까. 

나는 언젠가부터 내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을 막연하게 그리고 있었다. 이 집에서 떠나 누군가와 함께 살면서 많은 일을 상의하고 결정하며 웃고 떠드는 일상을 보내는 것이 내 막연한 미래였다. 이 때의 공상은 지금과는 달랐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얼굴도 없고 길이도 불명확한 존재가 그저 내 곁을 지키고 있다'정도 였다. 그런 불명확한 상상이 날 잠으로 이끌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거야' 라는 막연한 바람은 내 미래를 조금은 밝은 것으로 느끼게 했다.

내가 한동안 자면서 이를 서로 딱딱 부딪혔던 이유는 알고 있다. 새로운 변화를 앞두고 늙고 심약한 내 정신이 못미더워 느껴지는 불안때문이었다. 나는 곧 그 변화에 적응했고 더이상 이를 부딪히지 않는다. 그러나 근 일주일간의 불면은 도무지 이유도 알 수 없고 방법도 없었다. 잠이 들기 위해 적정의 온도를 맞추고 적당한 두께의 이불에 깨끗이 빤 이불보를 씌웠다. 잠이 들기 위해 고릉거리는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고 따뜻한 차를 마시기도 했지만 내가 불면에 시달리다 기절이라는 걸 하는 시간은 새벽 다섯시 부근이었다. 

오늘도 나는 불면할 것을 직감한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그게 무엇때문인지 안다. 
그건 오로지 그 애 때문이다. 그 애로 인해 내 미래가 조금도 밝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애를 처음 만났던 날 나는 그 애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고 데이트를 하는 꿈을 꿨다. 그리고 두 번째로 본 날은 그 애와 포옹하는 꿈을 꿨다. 나는 꿈이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이라는 프로이트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 순진한 인간으로서 내가 그 애의 옆 얼굴에, 머리카락에, 눈과 걸음걸이에 반했다는 걸 확신했다. 이건 전혀 잘못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마음에 들어하는 옘병할 사건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보통은 말아먹고 이불킥으로 끝나서 사람들이 기억하기 싫어하는 것 뿐이지. 
근 한달 간 -그런 것이 진짜 있다면- 페로몬을 뿜고 눈빛을 보내고 웃음을 흘리고 무작정 그 애의 의견을 긍정하는 한편 내가 어처구니없이 교통사고처럼 당한 이 사건을 부정하기 위해 그 애의 나쁜 점을 찾아내려 애썼다.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그 애의 특징들은 환상이라고 믿었고 그것이 깨지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물론 찾아내긴 했다. 그것이 그닥 결정적이지 않아서 내 생활에 막대한 폐를 끼치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동시에 좋아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지만 희귀하진 않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애인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있다.(2D일 지라도)  또 어떤 사람들은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을 하기도 하고 유전자를 반씩 모아 새 생명을 만드는 신의 역할을 대리하기도 한다. 

그 애가 나와 무척 닮았을 뿐더러 다르다는 걸 인식하면서부터 그 애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 이야기는 끊기지 않고 계속 되어 밤을 새면서도 계속 되고 내 뒷통수에 달린 나도 모르는 기억들을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애가 침대의 한켠을 차지하고 누워 딱 내가 가진 만큼의 따뜻한 온기를 내 옆에서 뿜뿜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구체적인 장면이 실현되기 바라면서 공상을 거듭한 것이 내 불면증의 기초였다. 여기서 거푸집에 시멘트를 붓고 앵커로 고정했다고 하더라도 그 위를 흙으로 덮고 아스팔트같은 걸 깔았으면 이 정도까진 아니었을 것이다.
이 공상이 절대 실현될리가 없다는 걸 알게된 후로 불면증은 1층을 짓고 2층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 또한 안된 것은 그 한계를 직접적인 의사표현이 아닌 간접적인 방식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음 속에서 '가망이 없네' '혹시 있지 않을까' '역시 없구나' '안되겠구나' '안되네' 의 단계를 밟기까지 난 그 애에게 내 상태을 설명 한 적이 없고 그 애는 눈치 빠르게 내 마음을 알아채지 못했고 따라서 '너랑은 죽어도 안되겠습니다'를 말하지 않았다. 

난 그 애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고 그 애는 들은 적도 없으니 당연히 거절도 못한 것이다.

난 이 사람은 그럴만한 상황도 아니고 또 날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것같지도 않다. 막힌 세면대를 망연자실한 눈으로 괜히 바라보듯 천천히라도 감정이 빠져나가길 기다린 후에 다른 사람을 찾는 게 현명한 인간의 처세라 할 수 있고 또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아니면 요즘 자유한국당 국회의원들처럼 그냥 회의실에 허락도 없이 침입해서 뻔뻔한 얼굴과 억양으로 깽판을 치고 나오는 수가 있겠지. 이렇게 되면 스무살때 고백을 서툴게 해서 이불킥하는 과거의 나로부터 진일보는 커녕 퇴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깽판도 나쁘진 않다.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나쁜 일일때도 있지.


이 불면증의 이름을 붙이려 한다. 그 이름은 '그런데'이다. 
'그런데 내 마음을 말하면 안되겠지?' '그런데 꼭 그래야 하나?' '그런데 안될거야'의 구린 순환고리로 인한 불면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 '그런데'가 너무 싫다. 정말 지긋지긋하다. 이제.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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