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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에 참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라 투척해봅니다.
본문은 영상 제작을 목적으로 작성했던 대본입니다!
출처에 유튜브 영상 주소를 추가해놓겠으나, 글이 편하신 분은 글로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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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여러분의 과거 혹은 미래로 가 있다면 어떠실 거 같나요?
예를 들면, 10년 후로 가 있다거나 10년 전으로 가 있다거나.
시간 여행이라면 시간 여행일 수 있는 이런 일.
여기 이런 일을 겪는 사내가 있습니다. 눈을 감았다 뜨면 과거 혹은 미래의 자신으로 이동하는 남자. 다만, 언제 이동할지 알 수 없고, 어느 시점으로 이동할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요.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오가는 남자의 이야기.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입니다.
이 이야기는 정말정말정~말 특이합니다.
작품은 한 화자를 통하여 '빌리 필그림'이라는 남자의 생을 들려줍니다.
그런데 이 사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데 그 내용이 아주 뒤죽박죽이에요.
전쟁 중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다음 장면에서는 결혼식 이야기가 나오고, 심지어 나중에는 자신이 죽기 전 장면도 나와요.
눈을 감았다 뜨면, 갑자기 미래 혹은 과거로 이동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거죠.
게다가 그 와중에 외계인에게 납치된 이야기도 나옵니다. 트라팔마도어인에게 납치되어 트라팔마도어 행성에 가서 동물원의 동물처럼 구경거리가 되어 지내기도 하죠.
이렇듯 작품은 빌리 필그림이라는 인물의 예고 없는 시간 여행을 보여주며 빌리의 일생을 조망합니다.
잘 이해가 가지 않으실까요?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보죠.
빌리의 시간 여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트라팔마도어인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트라팔마도어인에게 시간은 단속적인 직선의 형태가 아닙니다.
이 존재들은 시간을 동시에 살아요. 과거, 현재, 미래를 한 점에 놓고 사는거죠. 의식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닌 이것이 그들이 시간을 인식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니 이들에게 시간의 구분은 의미가 없습니다. 간단히 말하여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현재와 다름없으니까요.
이런 삶을 산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삶을 산다는 것과 같습니다.
미래의 일들은 현재에 이미 체험되어 모두 예정된 것이 되죠.
돌발 행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단 한번에 결정된 시간이 아니니까요.
다르게 행동하면 미래가 바뀌는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영원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이미 모든 일들은 고정되어 나타나는 것이죠.
이들의 시간은 언제나 그래왔고, 언제나 그럴 것이죠. 이는 바뀔 수 없습니다.
이에 관해 아주 재미있는 장면이 있는데요. 빌리에게 트라팔마도어인이 우주의 끝에 대해 말해주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우주가 어떻게 끝날지 알고 있어요─" 가이드가 말했다. "거기에 지구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지구도 사라져버린다는 것 말고는." "어떻게─도대체 우주가 어떻게 끝납니까?" 빌리가 말했다. "우리가 터뜨려버리죠. 우리 비행접시의 새 연료 실험을 하다가요. 트라팔마도어의 어떤 시험 비행사가 시동 단추를 누르고, 그 순간 우주 전체가 사라집니다." 뭐 그런 거지. *** 빌리가 말했다. "그걸 안다면 그걸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그 조종사가 단추를 누르는 걸 막을 수 없나요?" "그 조종사는 늘 그걸 눌렀고, 앞으로도 늘 누를 겁니다. 우리는 늘 누르게 놔두었고 앞으로도 늘 놔둘 겁니다. 그 순간은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제5도살장, 문학동네 150) |
트라팔마도어인에게 잡혔던 빌리도 그들과 시간을 동일한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빌리는 자신 삶의 모든 순간을 이미 살았고, 살고 있고, 살게 되는 거죠. 전쟁 포로였던 시절과 심지어 그가 죽는 순간까지 모든 시간을 구조화된 상태에서 동시에 살아갑니다.
기묘한 빌리의 시간 여행, 이제 조금 이해가시나요?
이 작품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사건은 '드레스덴 폭격'입니다. 작중 화자도 그렇고, 화자가 소개하는 빌리 역시 전쟁 포로로 붙잡혀 드레스덴에 갔던 경험이 있죠. 그곳에 폭격이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작품은 말합니다. 드레스덴은 주둔 병력도 거의 없는, 위험한 군사 시설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고 말하고있죠.
결과적으로 폭격은 일어나고 1945.2.13~15. 드레스덴에 있던 사람들은 지옥을 경험하게 됩니다.
빌리는 이때 지하 고기 저장고에 있었어서 살아남고, 폭격이 끝나고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폐허가 된 도시를 보게 되죠.
그러나 진실은 조금 다릅니다. 작품에서는 위처럼 드레스덴에 특별한 군사시설이 없었다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실제 당시 드레스덴에는 다양한 군사시설이 존재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드레스덴에 폭격이 이루어진 것은 전쟁 시기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다만 당시 폭격이 군사시설이 밀집된 곳보다 도시의 중심부에 주로 집중되었다는 점에 논란이 있죠.
당시 드레스덴 폭격으로인한 사망자는 작품 내에서는 David Irving의 1963년 저서 The Destruction of Dresden에 따라 13만 5천명 정도로 나오나 이 역시 사실과는 크게 다른 수치입니다. 2010년 조사에 따르면 최소 22,700에서 최대 25,000명 정도라고 하네요. Irving 역시 1966년 타임즈에 보낸 편지에서 기존 주장을 철회했었고요.
그러나 어쨌든 『제5도살장』이 말하는 바는 여전히 의미가 있습니다. 이 사건의 가장 하이라이트를 에드가 더비의 총살(폭격이 끝나고 폐허 속에서 찻주전자를 훔쳤다는 이유로)을 꼽는 화자의 말은 전쟁의 부조리함을 잘 보여주죠. 빌리는 그가 경험한 전쟁의 모든 과정에서 영문도 모른 채 끌려다니고, 모든 죽음은 희극적으로 혹은 무미건조하면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작품에서 100번도 넘게 반복되는 표현으로 분명히 나타나고요. 누군가 죽는 묘사가 나올 때마다 반복되는 한 마디. 'So it goes.' '뭐 그런 거지'
'반전' 앞선 논지로 『제5도살장』은 대표적인 반전소설로 꼽힙니다. 이는 『제5도살장』이 당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여론에 힘입어 크게 주목받았던 이유기도 하죠.
이와 관련되어 조금 동떨어져있다고 생각이 드는 빌리의 시간 여행 역시 깊이 생각해보면 반전이라는 키워드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빌리는 끝없는 시간 여행으로 전쟁을 계속해서 경험합니다. 그에게 전쟁은 한 번이 아니라 영원한 상태와도 같죠. 어느 순간으로 흐를지 모르는 자신의 인생의 모든 구간을 무작위로 경험하는 빌리. 그의 시간 여행은 탄생부터 죽음까지라는 자신의 닫힌 세계를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전쟁은 영원하고, 전쟁으로 인한 고통 역시도 영원하죠. 실제 전쟁을 경험한 이들이 PTSD로 평생을 시달리는 것처럼 말이죠. 전쟁의 부조리함과 평생을 지속되는 끝없는 고통. 이 역시 『제5도살장』이 반전소설로 읽히는 이유입니다.
운명론 혹은 결정론, 자유의지에 대한 의혹을 던지는 작품 『제5도살장』
많은 작가들의 작품들이 그렇듯 이 작품도 커트 보니것의 자전적 요소를 많이 담고 있습니다.
커트 보니것 본인이 드레스덴 폭격의 생존자였거든요. 빌리 필그림이 살아남았던 것처럼 커트 보니것도 당시 지하 고기 창고에서 폭격을 피해 살아남았죠.
그 자신의 경험을 살려 아주 재치있는 방식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다만, 이런 뒤죽박죽의 시간 이동은 처음에 낯선 감각을 주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점차 선명해지는, 마치 퍼즐을 맞추듯 맞춰가는 이야기는 시간이 갈수록 아주 재미있었어요.
모든 것이 예정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어떠실 것 같나요?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내 모든 노력 역시 예정되어 있는 삶. 어차피 변하지 않는다면, 매사에 최선을 다 할 필요는 없어 보이지 않나요?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게 예정된 삶을 살아간다는 건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모든 게 정해져있다면 나는 그 순간 그 이상도 이하도 할 수 없죠. 그게 유일하고도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니까요.
바꿀 수 없는 삶, 그러나 바꿀 수 없기에 최선을 다하는 삶.
아이러니하죠? 뭐 그런 거죠.
준비한 『제5도살장』 이야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제멋대로의 시간 여행을 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 흥미가 생기시나요?
언제든 질문이나 다른 의견은 환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