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기억들, 혼합매체, 60x55x30cm, 유성이
노래하다 울먹이다, 남숙이
-정남숙님께
서울 변두리에서도 변두리
사방 열 발걸음쯤 되려나, 안 되려나
작고 남루한 교회의 이전 예배.
초청 목사는
지하층에서 지상 층으로
올라 왔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고 너스레를 떨었고,
특송을 하기 위해 신도 앞에 선
남숙이와 나
몇몇 날 연습을 했지만
긴장은 매한가지.
나는 클라*로 오블리**를 하고
남숙은 씩씩한 목소리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는데,
뜬금없이 남숙이,
울먹이며 노래를 멈짓멈짓하는데
나는 얼마나 놀랐는지
살짝 진땀도 날 뻔했다네.
예배가 끝나고 '울먹여라'라는 나타냄표도 없는데
노래하다 울먹이면 어떡하냐고
웃으게 핀잔을 주었는데,
찬송하다 송아지 눈 닮은
과부 목사님을 보니
남숙이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나.
나를 '믿음의 유혹'에 빠뜨리는
'나쁜 예수쟁이'라고 남숙이를
매번 놀리지만
남을 위해 울어주는 것처럼
큰 북소리가 어디 있을까
큰 사랑이 어디 있을까.
찬송할 때 울먹이던 남숙이
그날은 하늘에서 방금 내려온
이쁜 천사 같기도 했네.
기쁨이 슬픔을 위로한다는 말이 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기쁨은 기쁨일 뿐이지요.
슬픔은 그 등가等價 이상의 슬픔만이 위로할 수 있지요.
슬프지 않은 사람이 아무리 슬픔에 들어가려고 해도 빗나갈 뿐이지요.
아픔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타인의 아픔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겠어요.
동참한다면 시늉만 내거나 위선이지요. 그냥 말뿐일 경우이겠지요.
그래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이 있을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비윤리적이거나 감수성이 빈약해서 그런 것만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타인과 섞일 수 없는 단독자이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아무리 사랑해도 귀하게 여겨도 사람은 사람에게 도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절망합니다. 남이 대신할 수 없는 슬픔이 있고 아픔이 있고 이별이 있는 게지요.
그러나 타인에게 가기 위해 무던히 애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슬픔이 아닌데도 타인의 슬픔에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자신이 슬픔을 간직한 사람이지요.
슬픔을 겪은 사람이지요. 그런 사람만이 타인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처럼 손잡고 데려오지요.
그래서 그 슬픔을 나눕니다. 슬픔이 슬픔을 만나면 한 슬픔이 또 다른 슬픔을 안아 줄 수 있습니다.
슬픔이 슬픔의 만나면 슬픔이 위로의 무지개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울먹였을 겁니다. 타인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지요.
깊은 슬픔의 강을 건넌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슬픔에 이르지 않은 사람은 슬픈 사람에게로 도달할 수 없지요. 눈물을 흘릴 수는 없지요.
이렇게 타인의 슬픔에 안타깝게 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천사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요.
클라*는 클라리넷, 오블리**(오블리가토 obbligato의 준말)는 보컬의 반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