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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Robot
게시물ID : panic_998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냥이박사
추천 : 13
조회수 : 1526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9/02/24 20: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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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ot
 

  2056년의 가까운 미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환경 파괴와 취업난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다. 인류는 각성기를 거치게 되고, 그로 인해 환경은 비약적으로 개선된다. 하지만 얻은 만큼 잃을 것도 있다고 했던가? 오랜 환경오염은 출산에도 영향을 끼치게 됐다. 거기다 인류는 취업난과 빈부격차가 좁혀지지 않자 출산을 꺼려하게 된다.
  그래도 사람들의 가슴속에 콩알만큼이나마 자식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남아있었다.
 

1
  커다란 포도 농장이 펼쳐져 있다. 공중에서 윙- 소리를 내며 물을 뿌려대는 드론과 포도나무 사이를 돌며 잔가지를 쳐내는 인간형 로봇이 보인다.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쬐는 어느 오후였다.
  어디선가 날개 짓 소리가 들려오더니 까마귀 5마리가 포도나무 위를 서성이다 앉는다. - 하는 소리와 함께 까마귀들은 혼비백산하며 날아간다. 5마리였지만 4마리만 날아가는 것을 보면 남겨진 한 마리는 다신 날지 못할 것이다.
총구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거구의 몸이지만 샤프한 느낌을 주는 각진 안경을 낀 박현우가 총을 들고 있다. 농장을 운영하는 사람답지 않게 그의 피부는 하얗다. 아마도 그의 눈에 보이는 드론과 인간형 로봇의 영향일 것이다.
  이런 건 자동으로 못 잡나? 투덜대며 돌아서는 현우는 총을 어깨에 둘러멘다. 10년차 베테랑 농부인 현우는 오늘도 포도송이를 무사히 지켰다고 안도한다. 어려서부터 농사를 짓고 싶었던 그는 투덜대긴 해도 만족하며 살아간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현우의 전화기에 메시지가 도착한다. 현우는 메시지를 읽고는 표정이 굳어버린다. 그의 어깨가 축하고 쳐져버린다.
  아빠- 하고 저 멀리 언덕에서 현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현우가 고개를 들자 양팔을 휘저으며 달려오는 진호가 보인다. 와락 안기는 아이는 현우의 배밖에 오지 못하지만 힘찬 기운이 있다. 현우와 달리 진호는 까무잡잡하다. 밖에서 놀기 좋아하는 성격 탓이다.
   “아빠, 나 이번에 1등 했다.”
   “뒤에서?”
   “? 선생님이 벌써 연락했어? 치사하네.”
   “그래도 체육은 진짜 1등이던데?”
  진호는 복싱 자세를 취하고는 현우에게 달려든다. 현우는 진호의 장난을 받아주며 복싱 스파링 흉내를 낸다. 현우는 메이웨더, 진호는 파퀴아오 라고 임의로 정한 뒤 저마다 주먹을 휘두른다. 수십 년 전 벌어졌던 졸전이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것이었다. 언덕 위로 노을이 진다. 두 부자는 언덕 위에서 가상의 복싱을 벌인다.
 

  하얀 집. 마당에는 갖가지 기계들이 세워져있다. 포도농장을 날던 드론과 인간형 로봇, 트랙터까지. 전형적인 농부의 마당이다. 현우와 진호는 마당을 지나 집으로 들어간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접시가 깨진다. 현우의 눈에 티브이를 보며 입을 막고 있는 김시연이 보인다. 현우의 아내이자 진호의 어머니인 여자다. 현우는 그녀를 보며 긴 생머리에 큰 키, 어딘가 개구쟁이 같은 눈빛은 여전하다고 생각한다.
  “여보, 나 어떡해?” 라고 말하는 시연을 향해 현우와 진호는 답 대신 빤히 그녀를 바라본다. 현우는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 가 불길한 예감을 느낀다.
   “내 비트코인...”
   “?”
   “폭락해버렸어...”
  수십 년 전에 경고했던 것을 아내가 해버린 것이다. 현우는 시연을 진정시키며 소파에 앉힌다. 그는 시연을 겉모습과 달리 어딘가 덤벙대는 기질이 있는 여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워할 순 없는 사람이다.
  현우는 20대 초반 무렵, 자동화 농장 세미나에서 시연을 만났다. 현우는 농경대 학생으로서, 시연은 과선배의 집요한 구애를 피해 세미나에 참석한 것이었다. 현우는 저도 모르게 시연을 힐끔 쳐다본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괜히 인간형 로봇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그렇게 흘러가나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뭘 그렇게 쳐다보냐? 이 변태자식아.”
  이것이 그녀와의 첫 정식 대면이었다.
 

  현우는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한다. 호박을 큼직하게 자르고, 게와 새우로 육수를 우려낸다. 먹음직하게 자른 두부와 버섯을 넣고 끓이자 된장찌개가 완성된다. 현우는 쇠꼬챙이에 꽂아둔 양고기까지 다 익자 뒤주에서 포도주를 꺼내든다. ‘진호네 와인이라는 상표명이 보인다. 으레 자영업을 하는 이들이 자식 이름을 거는 것처럼 현우 또한 진호의 이름을 상표로 내걸었다.
  현우는 그날 이후 시연과 티격하며 정이 든다. 명분은 과제를 위해서였지만 그들은 과제보단 데이트에 몰두했다. 그러다 덜컥 진호를 가지게 됐다. 아이를 가지는 것이 힘든 시대였다. 현실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나 무척 낮은 확률이었다. 그들은 이것이 기적, 혹은 운명이라 여기며 결혼을 하게 됐다.
  먹음직스런 저녁 한상이 차려진다. 저마다 시장했던지 허겁지겁 밥을 입으로 구겨 넣는다. 당신 요리 솜씨는 여전하네, 하며 시연이 감탄한다. 현우는 시연의 잔이 비자 포도주를 가지러 뒤주로 향한다. 거실에 켜져 있던 티브이에서 광고가 나온다.
  자식 갖기 힘드시죠? 여기 베이그 박사가 개발한 아이 로봇이 신상으로 나왔습니다.
  ‘별게 다 나오는군.’ 이라 생각한 현우는 포도주를 뒤주에서 꺼내든다.
 

  현우와 시연은 침대에서 잠든 진호를 내려다본다. 아까 전 밝았던 그들의 얼굴은 침울해 보인다. 현우는 말없이 흐느끼는 시연의 어깨를 손으로 감싼다.
   “진짜 내일 해야 된다고 연락 받은 거야?”
   “그래, 내일이야.”
  현우는 믿지 못하겠다는 시연에게 전화기를 들어 건넨다. 시연은 메시지에서 무언가를 본 뒤 입을 막는다. 현우는 착잡한 기분을 느끼며 잠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다음날. 커다란 대학병원이 보인다. 디자인에 힘을 썼던지 우주선과 같은 형상이다. 현우와 시연은 구급차에서 잠든 진호와 함께 내린다. 진호는 들것에 실린 채 응급실을 거쳐 중환자실로 옮겨진다.
  “오늘 냉동보관 하시면 시기적으로 괜찮습니다.” 교수가 사무적으로 말한다. 현우 부부는 교수와의 면담을 위해 진료실에 들어와 있다. 현우의 눈에 특수 보존 의료과 교수라는 직함이 들어온다. 방에는 갖가지 작은 동물들이 캡슐에 보관되어 전시돼있다. 현우는 어딘가 기괴한 느낌을 받는다.
   “이 병의 치료제가 언제 나올지는 여전히 모르는 거죠?”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확답은 못 드립니다. 다만 냉동보관을 통해 그날까지 기다려볼 순 있죠. 그것이 몇 년이 됐든, 백 년이 됐든.”
  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인다. 교수는 부부를 번갈아보며 대답을 기다린다. 현우는 태블릿에 저장된 진호의 사진을 넘겨보다가 고개를 든다.
   “냉동보관... 동의하겠습니다.”
 

2
  집으로 돌아온 지 한 달이 지났다. 시연은 말을 잃었다. 현우는 시연을 웃게 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고안해 시도하지만 허사였다. 시연은 진호가 머물던 방에 들어가 방문을 걸어 잠그곤 했다. 방안에는 진호가 남겨져 있었다. 그의 책상에는 모형 축구공과 복싱 글러브, 환하게 웃고 있는 가족사진이 놓여있었다.
  현우는 잠긴 진호의 방 앞에 주저앉는다. 시연을 불러보지만 침묵만이 흐른다. 현우 또한 시연만큼이나 슬프지만 자기마저 슬픔에 빠지면 안 된다며 마음을 다잡는다. 하지만 언덕위에서 진호와 장난치던 때를 떠올릴 때면 왈칵 눈물을 쏟곤 했다.
  현우는 뒤주에서 와인을 꺼내 병 채로 들이킨다. ‘몇 년, 혹은 백 년이라...’ 라고 나지막이 소리 내던 현우는 티브이를 멍하게 바라본다. 티브이에서 베이그 박사가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는다.
  기억이 곧 영혼입니다. 영혼이 없는 아이 로봇에 기억을 옮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곧 영혼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현우의 멍했던 동공이 확장된다. 마치 세상에 숨겨진 진리를 발견한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현우는 진호의 방에서 나오는 시연을 붙잡고는 티브이 앞으로 데려간다. 말없이 티브이를 보던 시연은 그래서 뭐? 라는 눈빛으로 현우를 쳐다본다. 그러다 현우의 의중을 알게 된 듯, 현우의 가슴을 강하게 밀쳐낸다.
   “당신, 미쳤어?”
   “그래. 미쳤다고 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생각해봐. 우리 진호... 가망이 있다고 생각해?”
   “그게 부모라는 사람이 할 소리야?”
   “잘되면 몇 년이라고 했어. 근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우리 현실을 직시하자. 현실적으로 그건... 백 년 정도 걸리는 치료제야. 그때 우린 이 세상에서 먼지가 되는 거고.”
   “꺼져, 당신하고 말 섞고 싶지 않아.”
  시연은 현우의 정강이를 발로 차고는 집밖으로 나가버린다. 현우는 아픈 정강이를 부여잡고 시연을 따라가려다 문 앞에서 멈춰 선다. 티브이에선 베이그 박사가 계속해서 설명을 진행 중이다.
 

  먼지가 날리는 어느 공터다. 현우는 은밀히 누군가를 회색 차에 태운다. 그 누군가는 아이 로봇과 함께 뒷좌석에 앉아있다.
   “이렇게 급하게 모시게 돼서 죄송합니다. 베이그 박사님.”
  현우는 뒷좌석에 앉은 베이그 박사를 힐끔 쳐다본다. 보라색 정장차림에 머리는 초록색으로 염색한 강렬한 인상이었다. 현우는 티브이에선 저런 차림이 아니었는데, 하고 생각한다. 베이그 박사는 계속해서 손톱 소지를 하며 입으로 후후 불고 있다.
   “아내 분은 동의를 안했다고요?”
   “, 워낙 반대가 심해서... 몰래 이렇게 모시게 됐습니다.”
   “, 그럴 수 있겠지만... 뒷일은 감당 못합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가망이 없는 아이들 중에서도... 연고가 없는 아이들의 기억을 주입하곤 하는데... 자기 자식의 기억을 넣는 경우는 처음이네요.”
  현우는 멋쩍게 웃지만 뭐라 답은 하지 못한다. 현우는 차를 세운다. 진호가 냉동보관 된 병원에 도착한 것이다.
 

  현우와 베이그 박사는 간략한 절차를 거친 후 냉동보관실로 들어간다. 여러 아이들이 상품처럼 진열돼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우는 한참을 헤맨 끝에 캡슐에 보관된 진호를 발견한다. 아이의 표정은 편해보였다. 잠시 감상에 젖어있을 때, 베이그 박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작업을 진행한다. 접착기를 캡슐 유리에 붙이고 또 다른 접착기를 아이 로봇의 머리에 붙인다. 그리고 복잡한 디스플레이에 나타난 숫자를 이리저리 키패드를 눌러가며 조작을 가한다.
   “저기, 잠시 만요.”
   “왜요? 마음이 바뀌셨습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아까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기억을 주입하면 되돌릴 수 없어요. 만약 되돌린다면... 뭐 그럴 일은 없겠죠. 백 년이 걸리는 치료제니까.”
  베이그 박사는 시계를 힐끔거리며 현우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한다. 현우는 짧은 찰나에 시연과 진호와 쌓아왔던 추억들을 떠올린다. 일상을 되돌리고 싶다는 마음이 작은 불씨로 번지다 점점 커져간다. 그것이 산과 같이 커질 때 진호는 결심한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베이그 박사는 마지막 입력을 끝낸다. 아이 로봇의 눈이 번쩍 빛나기 시작한다. 로봇의 눈동자에 필름처럼 현우 가족의 모습들이 스쳐지나간다.
  10%... 25%... 30%... 베이그 박사가 중얼거리며 진행 상황을 말한다. 현우는 이것이 옳은 선택인 것인가? 끊임없이 갈등한다. 마침내 100% 라는 베이그 박사의 말에 현우는 지그시 눈을 감는다. 베이그 박사는 현우의 손에 경고 표시가 있는 매뉴얼을 쥐어준다.
 

  현우는 아이 로봇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상황을 설명한 그는 뺨이라도 맞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꼭 감는다. 하지만 시연은 그를 지나쳐 아이 로봇에게 향한다.
   “여기에 진짜 우리 진호가 들어있는 거야?”
  예상치 못한 반응에 현우는 말을 더듬으며 그렇다고 답한다. 로봇은 진호와 너무나 흡사했다. 시연은 로봇을 이리저리 더듬어본다. 진호의 까무잡잡한 피부, 눈 밑의 점, 얼굴을 살짝 꼬집어보기까지 한다.
   “너무 똑같아서 소름 끼쳐.”
   “뭐가 소름 끼쳐? 엄마.”
  로봇이 시연에게 말을 건다. 시연은 화들짝 놀라 로봇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다. 현우는 시연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엄마, 오늘은 나도 포도주 마셔 봐도 돼?”
  시연은 여전히 당황하며 입을 떼지 못한다. 현우는 자신을 원망스런 눈빛으로 쏘아보는 시연을 웃으며 외면한다.
   “그래, 오늘 아빠한테 술 마시는 거 배워볼래?”
  현우는 뒤주로 뛰어가서는 포도주를 꺼내든다. 시연은 로봇과 현우를 번갈아 쳐다본다. 로봇도 시연을 멀뚱멀뚱 쳐다본다.
   “뭐라 불러야 되지...? 그래 진호야, 그건 엄마가 가르쳐줄게.”
  마침내 시연이 웃으며 입을 뗀다. 현우는 시연의 미소에 안도감을 느낀다.
 

  로봇은 정상적으로 학교에 나가기 시작한다. 현우 또한 포도 농장을 운영하며 까마귀 쫓는 일, 드론 및 인간형 로봇을 손보는 일을 평소처럼 해나간다. 그리고 노을이 질 때쯤 저 멀리 언덕에서 달려오는 로봇을 보며 벅찬 설렘을 느낀다.
  언덕에서 장난을 치며 집으로 돌아오면 시연이 부자를 맞이한다, 또다시 무언가 실수를 저지른 시연의 모습은 현우의 가슴속에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각인시킨다.
 

  현우는 시연과 함께 침대 위에 잠든 로봇을 내려다본다. 그 모습은 마치 냉동보관 되기 하루 전의 진호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다.
   “이 아이도 꿈을 꿀까?” 하고 시연이 묻는다.
   “기억은 곧 영혼이라고 했으니까. 이 아이는 곧 진호야.”
   “그래, 진호 맞아. 진호가 기분 나쁠 수 있으니까... 우리 정확하게 진호라고 불러주자.” 시연은 말을 마치곤 현우의 어깨에 기댄다.
 

3
  2년이 지났다. 현우는 여전히 포도농장을 운영하고, 로봇과 장난치고, 옹기종기 모여 저녁을 먹는다. 현우와 시연은 2년의 세월동안 조금씩 주름과 새치가 늘어난다. 변하는 겉모습처럼 쌓이는 기억에 따라 생각도 조금씩 변화한다.
  하지만 로봇은 여전히 2년 전 그대로였다. 매일 아침이면 로봇은 어제의 기억을 잃었다. 현우는 베이그 박사에게 문제점을 재기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뻔했다. 그 정도의 기술력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현우는 2년 전의 기억에 갇혀 사는 로봇이 안타깝다 생각한다. 그렇지만 밖에서 놀기 좋아하고 복싱 스파링을 즐기는 모습은 영락없는 진호였다. 체육 빼고 나머지 과목을 뒤에서 1등 하는 것까지.
 

  그날 밤이었다. 평소처럼 저녁을 먹는 현우네 가족. 현우의 이런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연은 로봇을 보며 싱글벙글한 표정이다.
   “엄마가 소시지 좀 더 구워줄까?”
   “, 10개만 더 구워줘.”
  현우는 적당히 먹으라는 말과 함께 물이 든 잔을 들이킨다. 문득,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참았던 말이 불쑥 튀어나온다.
   “우리 진호, 올해 몇 살이지?”
   “12.”
  시연은 밥을 입으로 가져가려다 멈칫한다. 시연은 애써 웃으며 탁자 밑에서 현우의 정강이를 발로 찬다.
   “그렇지. 12살 맞지?”
   “. 아들 나이도 몰라?”
  현우는 시연의 따가운 눈총을 피해 밥을 억지로 삼킨다.
 

  늦은 밤. 현우와 시연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다. 티브이에서 무언가 나오고 있지만 현우의 눈과 귀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그 말을 왜 꺼내는 건데?” 하고 시연이 묻는다.
   “2년이 지났어, 2. 다른 아이였으면 14살이라고. 근데 지금 저 모습은 뭐야? 12?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저 아이에게 진호의 기억을 넣은 건 당신이야. 당신이 그런 소릴 하면 안 되지.”
   “나도 이제 모르겠다. 진호는 맞지만 진호가 맞는 건지.”
  시연은 대꾸 없이 한참을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러다 뒤주로 향한 그녀는 포도주를 꺼내온다. “한 잔 할까?”
 

  시간이 꽤 흐른다. 부부는 말없이 포도주만 들이킨다. 현우는 시연이 무언가 고심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녀는 큰 결심을 할 때면 이렇게 말없이 포도주를 마시곤 했다. 이번에는 어떤 일인 걸까? 진호를 처음 가지고 난 뒤 그녀는 말없이 포도주를 마시곤 결혼을 제의했었다.
   “치료제가 나왔대.”
  마침내 입을 뗀 그녀의 말이었다. 현우는 술에 취해 헛소리를 들은 건지 재차 묻지만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진호의 치료제가 나왔다.
   “이제 와서 그게 어쨌다는 건데?”
   “뭐가 어째? 우리 아이잖아. 진호.”
  현우는 한숨을 쉬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다.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현우는 시연을 지긋이 내려다본다.
   “알잖아. 그 애는 이제 기억이 없는 거.”
  시연은 말없이 포도주를 들이킨다. 연거푸 계속해서 들이키자 현우는 시연의 손에서 잔을 뺏어든다. 그러자 시연은 다시 현우의 손에서 잔을 되찾는다.
   “당신이 말도 없이 저 아이를 데려온 것처럼, 나도 이번엔 그냥 데리고 올 거야. 둘 다 내 자식이니까.”
  현우는 더는 말이 안 통하는지 집밖으로 나가버린다. 밤하늘에 인공별처럼 떠있는 드론들이 화려한 묘기를 부리고 있다. 현우의 검은 눈동자에 별빛들이 아른거린다. 그리고 이내 그 별빛들은 물기를 머금고 흐릿해진다.
 

  한 달이 지났다. 냉동보관 됐던 진호가 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자식이 집으로 돌아왔지만 현우는 기쁘지 않았다. 진호의 기억은 이미 아이 로봇에게 옮겨진 후였기 때문이다. 현우는 2년만 더 기다려볼 걸, 하고 후회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현우는 2년 전의 기억에 갇힌 로봇과, 기억을 잃어 부모도 못 알아보는 진호를 보며 착잡함을 느낀다.
  로봇은 진호를 보며 경계하기 시작한다. 방을 함께 쓰게 됐지만 진호가 자신의 물건을 건드리지 못하게 위협을 가한다. 정작 진호는 딱히 관심이 없는 듯 잠만 잘 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누구였는지 호기심을 가지며 앨범을 찾아보긴 했지만.
 

  트랙터가 고장이 났다. 현우는 엔진으로 고개를 들이밀어 너트를 조이고 기름을 체인마다 덕지덕지 바른다. 문득, 부품 하나를 가져와야겠다고 판단이 선다. 하지만 꽤나 깊이 몸을 넣었던지 다시 빼기가 힘들었다. 끙끙 거리고 있을 때 진호의 목소리가 들리며 부품을 쥔 작은 손이 엔진 속으로 들어온다. 현우는 그 덕에 엔진 수리를 빨리 끝마칠 수 있었다. 현우는 자신에게 부품을 가져다 준 건 로봇일지, 진호일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제 보여준 걸 기억하네? 넌 누구니?”
   “저요? 저는 그냥 전데요.”
  현우는 비록 진호가 기억은 없지만 하루하루 기억이 쌓여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로봇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밤. 현우는 박사에게서 받았던 매뉴얼을 펼쳐본다.
  * 경고 * 어떠한 일이 있어도 빼낸 기억을 다시 되돌리지 말 것. 그럼 로봇은 죽고 아이에게도 불행한 일이 생길 것이다.
 경고문에 심취했는지 현우는 뒤에서 다가온 시연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죽는다고?”
  시연의 물음에 현우는 황급히 매뉴얼을 감춘다. 시연이 재차 묻자 현우는 말을 돌리며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당신... 저 아이를 죽일 셈이야?”
  현우는 답을 하지 않으려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얘기를 해야겠다고 결심이 선다. 그는 차분하게 시연을 소파에 앉힌다.
   “맞아. 매뉴얼에 적힌 그대로야. 기억을 다시 되돌리면... 저 아이, 아니 로봇은 죽어.”
   “아무리 어제 일을 기억 못한다지만... 2년 전의 진호가 맞잖아.”
   “우린 과거 속에서 사는 게 아니잖아? 당신도 진호가 자라는 걸 보고 싶잖아?”
   “맞아. 미치도록 보고 싶어. 우리 마당에 심겨진 앵두나무도 자라나는 걸.”
  시연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뗀다. “하지만 저 아이도 진호인걸.” 부부는 한동안 한참동안 논쟁을 벌인다. 로봇에게 기억이 심겨져 있으니 진호가 맞다, 진짜는 기억은 잃었지만 그래도 진호가 맞다 는 식의 말들이 오고간다.
  그들이 논쟁을 벌일 때, 두 아이는 거실 구석에서 처음부터 엿듣고 있었다. 진호는 대수롭지 않은 듯 귀를 파고 있지만, 로봇은 당황한 나머지 입을 꾹 다문 채 머리를 긁적인다. 진호는 로봇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난 기억이 안 돌아와도 상관없어. 신경 쓰지 마.”
  로봇은 금세 울 것 같은 표정이 된다. 그러다 진호를 보곤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진호를 밀쳐내고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현우는 어디선가 우당탕탕 소리가 들려오자 시연과의 대화를 멈춘다.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하자 로봇이 진호의 목을 조르고 있는 모습이 들어온다. 현우는 황급히 로봇을 진호에게서 거칠게 떨어뜨린다. 로봇은 벽에 부딪혀 아파하지만 다치지 않았다. 시연은 이 상황에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손으로 막는다.
   “엄마, 아빠. 나 엄마 말 잘 들을게. 어제 일을 기억 못한다면 꼭 기억해볼게. 그러니까 나 죽이지 마요.” 하고 로봇은 눈물을 왈칵 쏟으며 애원한다.
  현우는 이 상황에 별다른 반응이 없는 진호와 애원하는 로봇을 보며 누가 진짜 사람인지 혼란이 온다. 급기야 로봇은 현관문을 열고 집밖으로 나가버린다.
 

4
  현우는 주저앉은 시연을 침대에 눕혀 안정시키고는 집밖으로 나온다. 드론을 작동시켜 탐색모드를 켠 후 로봇을 검색 목표로 지정한다. - 하는 소리와 함께 드론은 불빛을 내뿜으며 날아간다. 현우는 드론이 안내하는 방향에 따라 걸어간다.
  잠시 후 드론이 한 장소에서 맴돌기 시작한다. 로봇을 찾아낸 것이다. 현우는 포도농장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그는 로봇이 이곳으로 도망쳤다는 게 서글프다는 생각이 든다.
  현우는 진호의 이름을 부르며 농장에서 로봇을 찾아 나선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하는 수 없이 드론의 도움을 받아 정확한 위치로 안내받는다.
  그의 눈에 포도나무 아래 웅크리고 있는 로봇이 들어온다. 현우는 저 로봇이 진호일까? 로봇일까? 잠시 의문을 가지며 로봇을 응시한다. 로봇은 여전히 흐느끼는지 어깨가 들썩인다. 현우는 말없이 로봇의 옆에 털썩 앉는다. 그리고 드론을 하늘 높이 올려 자동으로 움직이게 만든다.
   “진호야, 저기 밤하늘 좀 볼래?”
  로봇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 밤하늘을 바라본다. 드론이 지나간 자리에 빛줄기가 남아 선으로 이어진다. 그 모양은 별모양이었다. 로봇은 그제야 배시시 웃어 보인다. 현우와 로봇은 한동안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한물간 복싱 경기 이야기부터 학교에서 있었던 일, 된장찌개 맛에 대한 품평과 엄마가 저지르는 실수에 대한 이야기까지.
   “이제 피곤해. 아빠 나 집에 가서 자고 싶어.”
  로봇이 하품을 하며 손으로 입을 막는다. 현우는 그 모습이 시연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로봇과 함께 언덕을 오른다. 드론이 불빛으로 그들을 비추자, 현우와 로봇은 각자 복서가 되어 가상의 복싱 스파링을 벌인다. 현우는 로봇의 해맑은 미소에 어딘지 모를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집에 도착했다. 시연은 현관문을 활짝 열고는 로봇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나선 꼭 안아준다. 현우는 뒤주에서 포도주를 꺼내려다 도로 집어넣는다.
 

  거실에 홀로그램으로 떠있는 시계가 01:20을 가리킨다. 새벽이다. 현우와 시연은 매뉴얼과 함께 기억 이동기기를 손에 든다. 살며시 진호의 방문을 열자 곤히 잠든 두 아이가 보인다. 현우는 진호의 손목과 로봇의 손목에 이동기기 줄을 감는다. 그리고 디스플레이를 꺼내들어 매뉴얼에 적힌 암호를 키패드에 입력한다. 하지만 그때 로봇이 잠에서 깨어나 이 광경을 목격한다. 로봇이 발버둥을 치자 현우는 로봇을 거구의 몸으로 눌러버린다. “여보, 빨리 마지막 암호 입력해.” 다급한 현우의 말에 시연은 심호흡을 하며 암호를 입력한다. 그러다 마침내 한 글자만 남겨두었을 때 시연은 로봇과 눈이 마주치고 만다. “미안해.”
  마지막 암호가 입력되자 로봇의 눈동자에 필름 같은 기억들이 스쳐지나간다. 그 순간 옆에서 잠들어있던 진호의 눈도 떠지며 눈동자에 필름이 새겨진다. 하지만 누군가는 죽을 슬픈 운명이었던가? 로봇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물을 흘린다. 왜 아들을 죽이는 거냐며 울부짖는 로봇은 이내 멈춰버린다. 그리고 진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잠이 든다. 현우는 잠든 진호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이제는 죽어버린 로봇에게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진다.
 

  다음 날. 현우는 로봇을 마당에 구덩이를 파서 묻어준다. 이것이 로봇이지만 아들의 영혼이 머문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현우는 간단한 장례를 마친 뒤, 진호의 방문을 연다. 그의 눈에 시연이 진호의 옷을 입혀주는 모습이 들어온다. 마침내 진짜 진호가 돌아온 것이다.
  그날 이후, 진호는 하루하루를 기억하며 로봇과는 다른 진짜임을 증명해낸다. 현우의 마음속에 응어리는 저절로 풀려버린다. 때때로 시연이 마당 앞에 묻힌 로봇 앞을 서성일 때면 마음이 아프지만 과거가 아닌 미래를 위한 결정이었다고 애써 위로한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날인가부터 밖에서 놀기 좋아하던 진호는 방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어떤 때는 한밤중에 나가 한참동안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현우는 그때마다 진호가 포도농장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을 찾아내곤 했다. 그는 진호의 이러한 모습을 볼 때마다 얼마 전에 죽은 로봇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진호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잠든 저녁. 현우는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에 짜증이 난다. 이 시간에 누굴까? 조용히 거실로 나가 전화기를 바라보자 발신인에 베이그 박사라는 이름이 떠있다. 통화를 받는 사이 어두운 그림자가 시연이 있는 방안으로 들어간다.
현우의 귀에 베이그 박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박현우 씨, 접니다. 베이그. 별일 없죠?”
   “,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입니까?”
   “로봇에게서 생체 신호가 없어서 말이죠. 혹시... 기억을 되돌린 겁니까?”
  현우는 베이그 박사의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 한숨과 함께 경고성 메시지가 전해져온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 잘 들으세요. 경고문에도 적혀있었듯이 기억을 되돌릴 경우 로봇이 죽게 되지만... 아이에게 불행한 일이 생길 것이라는 말, 기억해요?”
  현우는 어렴풋이 그 경고문을 기억해낸다. 그땐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진호를 되돌리는 일이 우선이었으니까. 베이그는 말을 이어서 계속 한다.
   “그 경고를 해놓은 이유가... 로봇이 죽을 때의 기억도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 자식을 죽이는 부모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 소리입니다. 이런 기억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제정신일 것 같습니까?”
  찢어질듯 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시연이 있는 방이었다. 현우는 전화기를 내팽개치고 방으로 달려간다.
  현우의 눈에 칼을 든 진호가 들어온다. 진호가 든 칼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바닥에는 피가 홍건하다. 현우는 재빨리 진호의 칼을 뺏어 던지고는 시연을 바라본다. 그녀는 무사한지 걱정이 앞서지만 어딘지 이상하다. 시연의 몸은 상처하나 없이 깨끗한 것이었다. 현우가 진호를 내려다보자 그의 가슴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현우는 당황하며 앰뷸런스를 호출하곤 진호의 가슴에서 나오는 피를 막아보려 애쓴다. 시연은 패닉에 빠져 바닥에서 번져가는 피를 더듬거린다.
   “진호야, 정신차려봐. 진호야. 너 왜 그랬어? ?”
  현우가 절규하며 외친다. 그러자 진호는 가쁜 숨을 내쉬며 무언가 내뱉으려 애쓴다. 현우는 진호의 입가에 귀를 갖다 댄다. 아주 작은 소리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사실은... 아빠, 엄마를 죽이고 싶었거든? 그런데... 어느 순간 아빠랑 엄마가 이해됐어. 그래서 용서를 하고 싶었는데... 내가 아빠, 엄마에게 죽은 기억이... 내가 로봇으로 살았던 기억이, 내가 나답지 않게 만들었어. 난 진호야? 아니면 로봇이야?”
   “그걸 말이라고 해. 넌 내 아들 진호지.”
  이 말을 들은 진호는 눈을 뜬 채로 숨을 거둔다. 진호의 눈동자에 현우가 가득 차있다. 현우는 진호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며칠 뒤. 베이그 박사는 구속되어 포토라인 앞에 서게 된다. 온 국민 앞에 고개를 조아리며 연신 사과를 건넨다. 죄목은 사기죄였지만, 본질적으로는 인간 윤리에 대한 인류의 형벌이었다. 화려했던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초라한 행색만이 매스컴을 탄다.
  한 시민단체가 인간을 인간답게라는 구호를 외치며 광화문 거리를 행차한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은 존엄하며 기계와 연계할 수 없다며 힘껏 외친다. 이 모든 것을 티브이로 지켜보던 현우는 집밖으로 나간다.
  마당에 우뚝 솟은 두 개의 무덤이 보인다. 현우는 마당에 눕혀진 두 개의 비석에 이름을 새기기 시작한다. 마침내 이름이 다 새겨지고, 비석은 무덤 앞에 놓인다. 두 비석명은 동일했다. 현우에게 가장 소중했던 그 이름.
  현우는 총을 어깨에 둘러메고 포도농장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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