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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백일장] 퓡거(ffinger)
게시물ID : readers_1469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081023
추천 : 5
조회수 : 2050회
댓글수 : 15개
등록시간 : 2014/08/12 13:2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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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만약에 우리의 시대가 극단적으로 치달아, 문화마저 가치가 없다고 여기게 된다면 그들은 카메라를 빼앗아 갈 것이고, 붓을 빼앗아 갈 것이고, 마이크를 빼앗아 갈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국엔 끝까지 문화를 추격해야 한다면 그들은 나무를 빼앗아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빼앗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평등하게 사용하는 것이기에 그들이 문화를 강탈하고 격하시키고 소멸시키려 할지라도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언어입니다. 말은 이야기가 되고 노래가 되며 그림이 되고 영화가 됩니다. 책이란 문화의 마지막 피난처입니다. 가장 원초적인 것에 기본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게시판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그저 열린 마음으로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퓡거(ffinger)












081023






 새끼손가락이 잘렸을 때,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는 고통 속에서 소리를 지르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바로 내 눈 앞에 보이는 커다란 스테인레스 영업용 냉장고 왼편은 냉동고니까 그 안에는 얼음이 가득 있을 거라고. 만약 얼음이 없다면 단단하게 얼려진 고기라도 상관없다. 망할, 제발, 그저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것만 있으면 손가락을 다시 붙힐 수 있을거라고.’ 왼편에 서서 내 관자놀이에 총구를 대고 있는 사내와 정육점에서 냉동된 고기를 썰 법한 크고 네모난 칼을 들고 있는 사내 둘의 복면 속 눈빛을 향해 나는 소리쳤다.

"저는 그냥 치과의사에요!!! 제발 살려주세요!!!"

총을 들이밀고 있는 사내가 내 얼굴에 명함을 내민다.




'마음과 마음 치과'



                                                      원장 김명언


                                               Tel : 032-XXX-XXXX

                                              Fax : 032-XXX-XXXX

                                               HP : 010-XXXX-XXXX




 "알아. 씹새야. 그러니까 약은 어디로 빼돌렸냐고." 명함을 내민 이가 내게 얼굴을 들이밀고 말한다. 그의 입에서 나는 악취는 자주 흡연을 하며 정기적으로 치과에 방문하지 않는 이들에게서 나는 냄새다. 그리고 나의 새끼손가락에서 나온 피는 이제 무수히 많은 칼자국이 패여 있는 도마라 부르기엔 거대한 통나무 위를 적셔가고 있다. 

 "그러니까 저는 모른다니까요!!!"

 "그럼 돈은 왜 처먹었어?"

 "그냥 왔으니까요!!!"

 "세상에 그냥이 어딨어. 이 씹새끼야." 칼을 든 사내가 내리쳤다. 정말 무심하단 생각이 들 정도로 내 약지는 맥없이 잘려나갔다. 온 몸이 찌릿찌릿하고 내가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경련이 몸을 감싸지만 차라리 어디론가 떠나버리길 바랬던 정신은 올곧게도 고통과 담담히 마주하고 있었다.

 "으악!! 씨발!! 아!! 씨발!"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욕이 나오는 만큼 머리의 닿아있던 총구의 압력도 강해졌다. 칼을 내리쳤던 사내가 다시 칼을 들었다. 형광들의 불빛이 칼에 닿는 걸 보았는데, 칼의 날이 정말이지 너무 예리할 정도로 올 곧게 갈려있었다.

 "말해. 빨리. 말하라고!!!"

 "말할께요. 말할께요. 말하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나는 부들거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말은 할 수 있었다.

 "제가 썼어요. 2억 2천만원은 썼고 나머지는 집안 장롱에 있으니까 제가 최대한 빨리 갚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살려주십쇼." 이젠 눈물도 나지 않는다. 고개의 떨림만이 강해질 뿐.

 "돈 말고 약이 어디있냐고 물었잖아. 내가." 총구의 힘으로 나의 고개는 오른편으로 더욱 기울었다.

 "그건 무슨 말인지 도저히 모르겠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칼이 떨어졌다. 중지가 잘려나갔고 칼날은 검지의 반까지 파고들었고, 나는……. 무언가를 들었다. 초점이 맞지 않아 빙글 빙글 도는 바닥을 바라보고 피이잉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고 있었지만 그 소리를 뚫고 나오는 그들의 외침 중에 한 마디를 들었다. 좆됐다고. 그리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누워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삑삑대는 소리가 들렸고 차츰 눈이 주변을 식별할 수 있을 땐, 내가 누운 자리의 오른편에서 아들을 안고 있는 아내가 보였다. "여보…." 나의 목소리가 조금은 거칠게 들린다.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충혈 되고 퉁퉁 부은 눈 밑은 내가 싫어하는 그녀의 모습인데.

"여보! 괜찮아요?" 그녀는 한손으론 정우를 안은 채로 일어나 나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내가 그 말을 묻기 전까지 나는 내가 악몽을 꾼 것이라 생각했다. 아들과 아내가 옆에 있었고 모든 것은 제자리였으므로. 

"어떻게 된거지……." 아직도 조금은 거칠게 느껴진다. 입이 좀 메마른 것 같다.

"모르겠어요……. 저는 모르겠어요…." 그녀가 훌쩍이기 시작한다. 나는 나의 오른손을 서서히 들었다. 내가 충분히 볼 수 있을 만큼. 붕대가 칭칭 감긴 오른손. 그곳에는 엄지와 붕대로 싸인 검지만이 있었다. 그리고 눈앞이 서서히 검어진다.

"김명언씨? 김명언씨?" 흰색 가운을 입고 차트를 든 이가 나를 부른다.

"좀 나아지셨나요?" 전혀.

"손가락은 어떻게 된 겁니까?" 나는 최대한 차분히 물었다.

"안타깝게도 너무 늦었어요. 일행분이 손가락을 가지고 다시 방문하셨을 땐 이미 조직이 괴사를 시작한 상태여서 봉합은 어려웠습니다. 일행분이 얼음에라도 손가락들을 담아서 가지고 오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그래도 다행힌 점은 상처의 부위가 깨끗하게 잘려나갔기 때문에 엉덩이의 피부조직은 조금만 떼어냈다는 거죠."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이 씹새끼야??"

"음……. 사람을 불러올께요? 김명언씨.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는 잽싸게 자리를 떴다.

왼손으로 리모콘을 쓰는 건 처음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의 생각보다 금세 적응했다.

오전 11시. 하나 같이 따분하다.

 오전 11시 30분. 검은 선그라스에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풍채가 좋은 스킨헤드의 중년 사내가 찾아왔다. 이 더운 여름에 정장을 입고 다니다니.

" 안녕하세요. 김명언씨." 굵직한 목소리다.

 "우선 제 소개부터 하죠." 그가 상의 안에서 자그마한 명함집을 꺼낸다. 촘촘히 자개로 새겨져 있는 명함집이였는데, 충분히 고급스러워보였다.


(주)카르보닐제약

마케팅팀장

허 억



 "진짜 이름이 허억입니까?"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예." 그가 이번엔 지갑을 꺼냈다. 명함집과 같은 무늬의 자개로 된 지갑. 운전면허증엔 그는 60년생이였고 영등포구에 산다는 것과 이름이 허억이란 것을 알았다.

 "맞네요."

 "예. 맞습니다." 그의 썬그라스 속 잘 보이지 않는 눈빛과 그의 굳게 다문 입술 때문에 패인 주름을 통해서 내 분노가 살짝은 눌린 것을 나는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마케팅 일을 하실 것 같진 않게 생기셨는데, 무슨 일로 오셨나요?"

 "우선 이번 일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저희가 보상을 해드리고……."

 "보상? 보상? 이보쇼. 나 치과의산데? 보상? 당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한 건지 알아? 당신이 지금 내 고통을 이해하…." 나는 분노가 차오른다.

 그가 자신의 양손을 들었다. 그는 양쪽의 새끼손가락이 없었다.

  "선생님. 일부는 이해할 것 같습니다." 분노는 금세 식었다.

  "그것에 대한 합의는 제가 할 수는 없고 저희 회장님께서 선생님을 한번 뵙자고 하십니다. 괜찮으시면 오늘이라도 가능하십니다."

 "아뇨. 내가 가고 싶을 때 가겠습니다." 분노는 다시 결정(結晶)이 된다. 나는 이를 악물고 말한다. "내가 가야한다고 느낄 때."

 그는 미동도  없이 담담히 답한다.

 "그럼 언제든지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명함은 가지고 계시다가 방문 시에 데스크에 보여주시면 안내해 드릴 겁니다. 그리고 이 병원은 저희 회사에서 운영하는 것이니 원하시는 대로 이용하시면 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문을 나섰다.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의 적힌 말 '나의 천사'

 "여보. 어딨어?"

 "응? 나 집에 있는데?"

 "왜 집에 있어?"

 "아, 그 병원의사분들하고 병원책임자분이 이번 사고와 관련된 일은 죄송하다고 그러면서 이번 일 수습하고 당신 건강문제는 책임지고 돌려놓겠다고 그러던데? 당신하고 얘기가 된거라면서. 아냐?"

 "아…. 맞아. 정우는?"

 "당연히 같이 있지. 영상 통화할까?"

 "아냐……. 곧 퇴원해서 집으로 갈테니까 어디가지 말고 집에서 기다려. 알겠지?"

 "당신 괜찮아?"

 "어. 괜찮아."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 지난 이틀에 대해서 생각했다. 레고 블록을 맞춰가듯.

 전망이 좋은 1인실. 벽에 걸린 그림. 적절히 배치된 화분들. 편안히 볼 수 있는 TV. 아내를 위해 지급된 편안한 침대와 의자. 그리고 아들을 위한 요람. 무엇보다 아침, 점심, 저녁. 끼니를 먹을 시간과 어떤 것을 먹을지에 대해 묻고 갔다. 간병인 혹은 간호사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당시에 나는 그런 것에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어제 저녁 식사를 곰곰이 되짚어보니 이상한 점은 더 두드러진다.

 저녁 식사는 와이프와 아들에게도 지급되었다. 어제 저녁 식사 같은 경우엔 아들에겐 이유식이 아이엄마는 까르보나라. 나는 어제 저녁에 된장찌개를 먹었다. 병원에서 된장국이 아니라 뚝배기에 찌개를 끓여서 가져다주었다. 아직까지 수저를 오른손으로 잡기엔 통증이 약간 있어서 서투른 왼손을 사용하다가 흘렸을 때 처음 병실에서 밥을 먹은 것처럼 아이엄마의 도움으로 먹게 되었지만.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자 생각은 잠시 끊어졌다.

 "선생님. 점심은 언제 드시겠어요?"

 시간은 12시를 향해간다.

 "지금 먹죠."

 "어떤 걸로 드시겠어요?" 그녀가 나를 향해 상체를 숙이고 묻는다. V로 패여진 셔츠 안으로 그녀의 가슴골이 보인다.

 "예?" 넋을 놓고 있던 나는 다시 되묻는다.

 "어떤 걸로 드시겠어요?" 그녀의 고르고 하얀 치아가 보이고 그것은 곧 그녀의 웃음으로 번진다. 그녀는 젊고 매력적이다. 옅은 화장이 그녀를 더욱 빛나게 한다.

 "아……. 메뉴판이 있나요?"

 "죄송하게도 여긴 음식점이 아니라 병원이기 때문에 메뉴판은 없네요. 이걸 어쩌죠." 그녀가 안타까워하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그럼 젤 비싼 걸로 주세요."

 "예. 다른 건 필요한 것 없으시고요?" 그녀가 웃으며 말한다.

 "일단은 그것만 주세요." 나는 머뭇거리다 답한다.

 15분 뒤 그녀가 들고 온 것은 버터를 발라 노릇하게 구워진 바게트 조각들과 캐비어였다.

 "오늘은 이게 제일 비싼거라네요. 이거라도 드시겠어요?" 그녀가 묻는다.

 "아……." 나는 입속에서 맴도는 말을 하지 못했다.

 "바꿔드릴까요? 최대한 빨리 해드릴께요."

 "아뇨. 아뇨." 그녀가 선반에 접시를 놓고 나의 아내가 앉던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오늘은 제가 간병인이에요. 지금 오른손이 불편하셔서 식사하시는데 어려움이 있으시다고 들었어요.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그녀가 묻는다.

 "아, 물론이죠."

 식사의 시작은 그녀가 바게트 위에 캐비어를 얹어서 나의 입속에 넣어주는 것이었다. 감칠맛이 돋을 만큼 바삭하면서 부드러운 바게트와 톡톡 터지는 철갑상어 알의 풍미를 세 번째 조각까지는 느끼면서 먹었지만, 네 번째부턴 깊게 패인 가슴골에 자꾸 눈이 돌아갔다. 내 물건은 이미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식사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이루어졌다.

 "이제 더는 못 먹겠어요. 생각보다 배부르네요. 이거." 내가 말하자 그녀는 접시를 담아온 쟁반에 담았고 침대의 선반을 내려주었다.

 "이거 식사하셨냐고 묻지도 않고 저만 먹어서 미안하네요." 내가 미안해하며 말하자 "아뇨. 아뇨. 사실 저 다이어트 중이라. 채소만 먹어서요." 그녀가 웃으며 답한다.

 "거기서 뺄 살이 대체 어딨어요? 와, 연예인보다 더 예쁘신데요."

 "무뚝뚝한 분이신 줄 알았는데, 재밌는 분이시네요." 그녀가 소리내어 웃으며 말을 이어간다.

 "더 필요한거 있으신가요? 물이라도 가져가 드릴까요?"

 "음……. 얘기 좀 할 수 있나요?"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이죠! 제가 오늘 간병인이라니까요. 원하시는 건 다 해드려야죠. 제가 할 수 있는거라면요." 그녀는 들고 있던 쟁반을 테이블 위에 놓고 의자에 다시 앉았다.

 "알바하시는거에요?"

 "뭐……. 비슷한거죠? 돈을 받으니까요." 그녀는 어떤 말에도 웃으며 답한다.

 "음…. 원래는 뭐해요?"

 "뭐 남들하고 똑같죠. 시험준비하고 레포트쓰고. 지금 같은 경우엔 친구들이랑 여행도 가고."

 "그럼 이건 단기 알바랑 비슷하네요. 그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머릿결에선 향기가 난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적에, 학원에서 봤던 여자애랑 비슷하게 생기셨어요."

 "혹시……. 칭찬인가요?" 그녀가 묻는다.

 "아. 당연하죠. 정말 예뻤거든요. 아마 걔 때문에 학원생이 늘었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하하." 그녀가 소리내어 웃는다. 나는 흥분한 채로 말을 이어갔다.

 "한번은 발렌타인데이 날 받은 초콜렛을 다 못 들고 가서 전 학원생에게 다 나눠주고 갔어요. 원생이 70명이 넘었는데도요. 그 정도로 인기가 많았어요."

 "선생님도 받으셨어요?"

 "제가 준 걸 돌려받은 셈이죠. 3년이 훌쩍 가더라고요. 다른 대학교에 가서 더는 못 보게 됐지만. 짝사랑이란 게 다 그런 거죠. 그죠?"

 "음……. 후회하시는 것처럼 들리네요. 용기내서 고백이라도 해보시지 그러셨어요?"

 나는 왼손을 들어 나의 턱밑에서 흔든다.

 "보시다시피 제가 좀…."

 "못생기긴 하셨죠. 하하하." 그녀가 고개를 젖혀질 정도로 웃는다.

 "……."

 "오……. 죄송해요. 어쩌죠. 무례하게 굴 생각은 아녔는데."

 "아니에요. 맞는 건데요. 뭐. 하하하." 내가 웃자 그녀도 다시 얼굴이 조금은 펴졌다.

 "저는 대신 공부를 열심히 했죠." 란 말을 내뱉었을 때 나는 나의 손가락이 두 개 남은 오른손을 바라봤다. 남은 두 손가락으로 펜은 잡을 수 있겠지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내 안의 어떤 변화가 생겼다. 날카롭고 예리한 불길.

 "뭐든지 해준댔죠?"

 "그럼요."

 "섹스도? 블로우 잡(펠라치오의 속어)도? 여성 상위도?"

 그녀는 나의 세가지 물음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원하신다면요."

 "얼마 받아요?" 그녀는 이 물음엔 답하지 않았다.


 병원을 나서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의 와이프는 아름답고 헌신적이나 잠자리에 있어선 정상위만을 원했고 나는 그것에도 만족했었다. 정우를 낳고 나선 그녀는 나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사실 알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그것에 대해 부정하며 내 자신이 모른 채하고 있었다는 걸. 그녀는 더 이상 나와의 잠자리를 원하지 않는다는 걸.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선 많은 갈등이 들었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낯선 이와의 성행위를 상상하다가도 다시 차근차근히 지워나갔다. 그래도 내가 가야할 곳은 집이였다. 집에 도착해서 많은 생각들 속에서도 허억이란 웃긴 이름을 가진 사내가 주고 간 명함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처음엔 상황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려고 했다. 이런 식으로.


 가설 1. 퇴근 길에 트렁크에 현금이 가득 든 검은 박스를 넣던 중 지하주차장에서 괴한 둘에게 납치되어 감금된 다음 손 발이 묶인 채로 고문을 당했다. 손가락 세 개를 잃었고, 그 뒤에 깨어났을 땐 병원이었다. 이 명함을 건네준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범죄란 사실을 경찰에 알리는 것.

 가설 1의 결점 : 가설2를 통해 경찰에 알리는 것 또한 답이 아님을 알게 됨.

 가설 2. 우선 경찰에 알리지 않고 `그들`에 대해서 내 나름의 추적을 통해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 이유를 찾아보는 것. 그러나 단지 인터넷으로 검색해본 결과가 `그들`은 기업이고 신약을 개발하는 회사이며 매년 놀라울 만큼 성장해오고 있는 그룹이기에 조사하는 범위는 매우 한정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

 가설 2의 결점 : 나는 형사가 아니라 치과의사라는 것.

 가설 3. 명함에 적힌 대로 `그들`을 찾아가는 것.

 가설 3의 결점 :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다는 것.

 가설 3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 회장이라는 사람이 나에게 호의적일 것이며, 합의점을 찾아가길 원한다고 했기 때문에. 물론 이것도 나의 추측일 뿐이지만 가설 4가 두 시간째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가설 3을 선택하기로 했다.

 신음하고 괴로워하며 자음은 원활히 썼지만 모음은 독수리타법으로 고생고생하며 작성한 문서의 마지막 장이 프린터를 통해서 나왔을 땐, 시간은 이미 새벽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와이프는 중간중간마다 나의 상태를 물었고 그때마다 나는 되돌려 보냈다. 서재를 나와 거실을 지나서 안방문을 조심히 열고 들어섰을 때 와이프와 아들은 이미 잠이 든 채였다. 나는 소파에 가서 눕는다.

 욱씬거리는 손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지만 TV는 켜지 않는다. 어느새 어둠에 적응한 눈에 천장 벽지가 들어온다. 끝없이 이어지는 패턴이 주방까지 연결되어있다. 이사를 하면서 벽지를 고른 것은 와이프였다. 나와 결혼을 해준 사람이었기에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받아들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패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피로함과 무게감이 한없이 느껴졌기 때문에. 

 결국엔 잠을 자는 둥 마는 둥하며 아침을 맞이했다.

 내가 서재에서 서류를 챙길 때에도, 화장실에서 어렵사리 왼손으로 머리를 감을 때에도, 안방에 들어가 옷장에서 옷을 꺼낼 때에도, 와이프와 아들은 자고 있었다. 나는 서류가방에 파일을 넣고 집을 나섰다.

 테헤란로 한복판, 거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 곳이라 부를 만한 곳에서 왼손엔 서류가방을 들고 택시에서 내렸다.

 "아저씨. 잔돈 받아가쇼."

 내가 아무런 대답도 없자 그 목소리도 계속해서 쏟아지는 차들의 행렬에 따라 곧 사라졌다.

 데스크에서 명함을 내밀었을 때, 여자의 안내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을 때, 비서를 통해서 잠시만 기다리란 말을 들었을 때, 어쩌면 택시에서 내렸을 때 나는 후회하고 있었다.

 금액을 더 올려서 썼어야했다고. 그러나 평생을 점에 푹 빠져계셨던 나의 어머니는 늘 신년이면 나에게 이런 얘길 하셨다.

 "명언아. 너는 천운(天運)이 따르는 사람이야. 죽을 고비도 부드럽게 넘기는 운이지. 여복은 모르겠다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결혼을 하면 해방될 거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말을 전화로 듣게 되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다. 바보 같은 생각이 끝났을 때 문이 열렸다.

 그는 젊었고, 활기차보였으며 좋은 향기가 났다. 그의 입에선 어떠한 악취도 나지 않았다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네요." 그가 말했다.

 "저는 이렇게 젊은 분이 회장님인 줄 몰랐네요."

 "제가 알기론 우리는 같은 나이에요." 그가 웃으며 말한다.

 "서른 여섯?"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딱히 칭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나는 단호히 말했다.

 그는 여전히 웃으며 나를 정면에 있던 그의 자리대신 왼편에 자리한 소파로 이끈다. 그의 웃음에서 경멸이나 비열함을 찾아보려했지만 그런 것은 보이지 않고 따뜻한 환대와 진심어린 미안함이 느껴져 내 감정은 그나마 약간 위안을 받았다.

 "올라오면서 봤는데 다른 층은 죄다 크던데 여기는 생각보단 좀 좁네요." 문을 열고 들어온 그의 비서를 그가 제지하면서 말한다.

 "예리하신데요. 양쪽 벽을 좀 줄인 거에요. 공간이 너무 크면 메아리가 돼서 돌아오니까 귀찮겠죠?"

 그녀의 비서가 문을 닫고 다시 나갔다. 내가 앉은 자리에선 서울 도심 한복판의 모습이 펼쳐져있었다. 마치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온 것처럼. 모든 것이 작게만 보였다.

 "뭐 마실거라도 좀 드릴까요? 티? 아니면 드링크?"

 "물이면 됩니다." 다소 딱딱하게 말했다.

 그가 잔 두 개를 가져와 맞은 편에 앉으며 말한다.

 "정말 유감이에요.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우리 쪽 일에서 이번에 실수가 좀 있었어요. 정말 개인적으로 사과드립니다."

 "사과면 답니까? 병신 만들어 놓고? 뭔 놈의 제약회사가 사람을 납치해서 손가락을 자른답니까?"

 그가 잔을 입에 갖다 대며 손가락으로 그의 책상 위편을 가리킨다. 그곳엔 이런 글귀가 써있었다.

 '仕事をしていないと、ご飯も与えてはいけない(일을 하지 않으면 밥도 주지 말라)'

 그 밑엔 비슷한 글씨체로 한 글귀가 더 있었다.

 'そして盗む者を厳しく処罰せよ(그리고 훔치는 자는 엄하게 처벌하라.)'

 "우리 아버지가 쓴 건데 지금은 회사방침이 되었죠. 밑에 건 제가 쓴거에요." 그가 잔을 내려놓고 경박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간다. "그러니까 선생의 손가락이 잘린 건 말 한마디와 오해가 더해져서 나온 부산물인거죠. 그럼 짧게 말합시다. 우리. 거래를 하는거에요. 당신의 손가락의 가치를 따져보자는거죠."

 나는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일단은 당신의 손가락을 되돌릴 수는 없더라고요. 알아보니까. 발가락을 잘라서 손가락으로 이식해도 되긴 한데, 그건 저도 싫을 것 같고……. 제가 시킨 일이니 제 손가락 세 개를 자를까요?"

 나의 입속으로 들어가던 물이 그에게 뿜어졌다. 그는 차분히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저는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그저 보상을 원하지, 같은 걸 해달란 말은 아니에요." 나는 다급히 양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농담이였는데 정말 자르라고 할까봐 겁이 났었거든요. 하하하." 그가 아무런 악의도 없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금전적인 보상이 우선은 필요하겠네요. 그렇죠? 당분간은 일을 못 하실테니."

 "당분간이라뇨? 저는 평생을 오른손잡이로 살았는데 단박에 왼손으로 치과치료라도 합니까?"

 "워. 워. 진정해요. 제가 잘 아는 분이 인공으로 손가락 세 개정돈 복원해 줄 수 있어요."

 "아뇨. 아뇨. 섬세한 작업이에요. 제가 무슨 노가다 뛰는 사람인줄 아세요? 저는 치과의사란 말입니다."

 "음…. 괜찮으실텐데." 다급히 그의 말을 끊었다.

 "저는 예전의 제 손가락이 그리운거지 대신할 기계가 필요한게 아닙니다!" 나는 분노해서 나의 가방 속 파일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

 "읽어보시죠."

 그는 파일을 들고서 그가 앉고있던 의자로 돌아가 그것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가 전화기의 버튼을 누르면 비서가 들어와 그에게 마실 것을 가져다 주었고, 나의 긴장은 서서히 조바심으로 번져갔다. 그것의 증거로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고 다리를 조금씩 떨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나에게 물었다.

 "당신 손가락이 잘릴 걸 대비하고 살았나요?"

 "그럴리가요."

 "이걸 언제 준비한거에요? 그럼?"

 "어제 꼬박 쓴겁니다."

 "그 손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찬찬히 살펴보니까 댁이 수학을 잘하시네. 그래프며 어쩌구 저쩌구, 고려해야할 사항. 등등등. 수학을 하시지 왜 치과의사를 하셨소?"

 "수학자는 결혼하기 쉽지 않으니까."

 "하하하하하." 그의 방이 울리도록 그가 크게 웃었다.

 "당신 똑똑하네. 아까울 만큼. 정말 22억이면 됩니까?"

 "정확히 얘기하면 22억 1462만원입니다만 62만원은 깎은 거에요."

 "근데 당신이 하나 계산을 잘못한게 있어."

 "그럴리가요."

 "우리가 당신한테 건넨 돈은 6억 1천만원이였거든."

 "아닙니다. 6억 5백만원이였어요."

 "아냐. 아냐. 6억 천만원이야."

 "아닙니다. 6억 5백만원이였어요."

 "아니라니까. 2010년부터 짝수해에는 천만원을 더 주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6억 천만원이 맞아."

 "아닙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액수에 대해서 소리쳤고 수화기를 던지자 문을 열고 비서가 들어왔다.

 "내려갈꺼야. 3층으로. 옷 좀 주게." 비서는 그의 마이를 들어주었고 그가 옷을 입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나에게 말했다.

 "이따가 부르면 오세요. 아시겠죠?"

 10분 뒤, 비서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3층이 아닌 지하 5층. 제일 윗층에서 제일 마지막 층으로.

 그의 비서가 비밀번호를 누르자 문이 열렸다. 두꺼운 철문이 양 옆으로 열리고 그가 양팔을 벌린채 환영의 표시를 하고 말했다.

 "드디어 오셨네요. 기다리느라 힘들었어요. 들어오세요. 어서."

 그곳은 마치 감금실이자 실험실처럼 보였다. 각각의 방이 나뉘어져 있었고 천장부터 바닥까지 네모난 공간은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유리막을 통해 우리는 그곳을 볼 수 있었는데, 각각의 방마다 벌거벗은 채로 쭈그린 채 앉아있는 남자들이 넷 있었다. 그들이 우리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구석에 웅크린채로 그저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여기부터 A, B, C, D에요."

 유리창 위, 천장과 벽의 남은 공간에 노란색으로 페인팅된 글씨도 각각의 방마다 A, B, C, D라고 적혀있었다.

 그의 손짓에 문밖에서 기다리던 비서가 사라졌다.

 "A는 그 지역을 담당하는 새끼. 그러니까 인천이죠. B는 그 밑에서 일하는 새끼, 아마 아실꺼에요. 총 들고 있던 놈. 그리고 C는 B의 밑에서 일하는 새끼. 얘도 아실꺼에요. 클레버로 댁 손가락 자른 애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D는 배달한 새끼."

 "당신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겁니까……."

 "아직 아무 짓도요. 여기는 엄밀히 말하면 우리의 가족들이 벌을 받는 곳이에요. 여기 버튼들 보이죠?"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엔 방방마다 유리창 밑에 설치되어있는 빨간버튼들이었다. 그것은 누르기 좋게 피아노 건반처럼 눕혀져있었고 그 버튼들의 위엔 저마다 심볼이 있었다.

 "여기 보시면 숟가락이 엑스 쳐져 있죠? 이걸 누르면 밥이 안나와요. 여기 번개마크 보이죠? 이걸 누르면 바닥에서 전기가 흘러…."

 "당신 뭐하냐고!" 내가 소리치자 그는 나의 오른손목을 잡고 흔들어댔다.

 "죄 없는 이의 손가락을 잘랐으면 벌을 받아야지요. 아닙니까?"

 나는 생각한다. 그 예리하고 날카로운 불길이 떠오른다.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가 나의 손목을 놓아준다.

 "성자(聖者)시네. 종교가 있소?"

 "아니. 종교는 없는데 이렇게 까진 바라지 않으니까."

 "당신 좋을 대로 해요. 나야 뭐 우리 식구들이 다치는 건 싫으니까." 그가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잠깐만!"

 나는 C앞에 다가선다. 번개버튼을 누른다. 그가 껑충껑충 뛰면서 소리친다. 계속해서 살려달라며 절규한다. 나는 버튼에서 손을 뗀다. 그러자 그가 바닥에 풀썩하며 쓰러진다. 그의 머리가 솟구쳤고 몸에선 약간의 김이 나온다.

 "이것봐라…. 괜찮다면서요?" 그가 놀란듯 묻는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그에게 보여준다.

 "쟤가 조금만 잘못했으면 검지도 날아갈 뻔 했거든요. 그건 좀 열받거든." 그가 웃으며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엘리베이터에 탄 뒤 나는 그들이 이제 다시 돌아오는거냐 물었을때 그가 내게 말했다.

 "일단 A, B, C는 돈에 무관해서 바로 나올꺼에요. 그러나 D는 아니에요. 우리 회사는 규율이 있는데 그걸 안 지키면 엄벌에 처하는게 원칙입니다." 그는 나를 바라보지도 않고 말한다.

 "내가 생각해보니까 계산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 오백만원을 아내에게 줬던 것 같아요."

 "그래요? 정직하셔야 될텐데."

 "정직한 건 아닌데. 정확하지도 않으니까."

 "음……. 그럼 D와는 대화로 풀어가 보죠." 그가 날 바라보며 말했다. 엘리베이터는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그럼 그 금액이면 충분히 합당한 보상이라 이거죠?" 소파에 마주 앉은 우리는 합의점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낙관적인 금액은 아닙니다. 당신 말대로 합당한 보상은 맞겠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말끝을 흐린다.

 "그래요. 맞아요. 당신 말이 맞아요. 내가 대강 훑어봤을 때도 그리 낙관적이진 않아요. 건물 임대료나 가게를 한다는 것도 변수라는게 많기 때문에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저는 더 비관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네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난 당신이 마음에 들어. 정직한 점이. 뭐랄까…. 야누스적인 면을 갖고 있는 점이 나와 닮았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어때요?"

 "저는 당신을 모르는걸요." 나는 물잔을 입에 갖다댄다. 그의 눈빛을 응시한채로.

 "에이. 우리 솔직해집시다. 그럼 내 얘기를 하나 할께요. 어때요? 들을 의향이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당신이 50억이상을 제시했을 때 지하에 데리고 가지 않고 지불할 의향이 있었고, 당신이 100억이상을 제시했다면 지하를 보여주고 당신이 집에 가기 전에 죽였을꺼야."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당황하지 않으시네?" 그가 멋쩍은 듯 웃으며 말한다.

 "뭐 그런 것도 고려하고 오지 않았겠어요?"

 그가 한참을 웃다가 답한다.

 "내가 말했잖아. 수학을 했었어야 돼. 당신은."

 그의 일정 때문에 자리는 곧이어 끝났고 그는 한마디를 남기고 문 밖을 나섰다.

 "다시 보게 될 겁니다."

 집에 돌아와서 핸드폰으로 통장 잔고를 보고 있는 손이 부들거린다. 다리가 부들거리고 입은 이미 엄지손톱을 물어뜯고 있다. '입금 - 2,209,620,000.'

 입금자명도 입금된 시간도 없이 입금된 금액. 그것도 정확히 그가 말한 그대로. 장롱 속 3억 8천 5백만원을 합치면 내가 그에게 제시한 금액과 동일하다. 물론 사라진 5백만원을 제하면. 그리고 또 하나 나는 그에게 나의 통장번호 조차 알려준 적 없었다.

 "여보?"

 "응?" 나는 고개를 돌려 주방에 있는 와이프에게 답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몇 번이나 불렀는데?"

 "아냐. 아무것도."

 "준우야. 빠빠먹자." 거실에서 놀던 아들이 일어나 아장아장 엄마에게 다가간다. 나도 식탁에 앉는다.

 "여보. 어젠 왜 병원에서 안 잤어?"

 "응?"

 "어제 말이야. 나 일어났을 때 당신이 없었잖아."

 "아……. 그거? 그 병원 원장님이랑 당신 담당의사쌤이랑 같이 와서 피곤할텐데 들어가서 쉬라고. 병원에 있는 건 아이한테도 별로 안좋다고 그럼서. 친절히 집까지 데려다 줬는 걸. 그치? 준우야. 그치? 준우야." 그녀는 아들을 달래면서 말한다.

 "아, 참. 당신 차보다 훨씬 좋은 차타고 집에 아주 편안~히 왔어."

 복잡한 기분이다. 생각해야할 게 너무 많다.

 "당신은 내가 손가락이 세 개가 없어졌는데 앞으로 막막하지도 않아?"

 "당신 보험금이 20몇 억이라면서. 그치? 준우야. 그치? 준우야." 이번엔 아이가 입가에 흘린 이유식을 닦으며 말한다. 와이프는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다.

 "그럼 다시는 쓰지 못할 내 손가락들은 고작 20억짜리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한참 뒤에야 서재 문을 살며시 와이프가 열었다.

 "여보……. 화났어?" 그녀가 조심스레 묻는다.

 "내가 무슨 생각이 드는 줄 알아?"

 그녀는 방문 고리를 잡은 채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당신은 치과의사의 와이프가 되려고 나랑 결혼한 것 같아." 그녀가 다가와 살며시 나를 감싸 안는다. 그녀의 티셔츠 속 유방이 나의 등에 닿는다.

 "오늘 준우 빨리 재울까?" 그녀가 말한다.

 "아니. 필요 없어."

 내 안의 날카롭고 예리한 불길은 결정화(結晶化)되고 뚜렷한 형태를 갖는다. 몇 십년 전에도 있었고 몇 년 전에도 있었고 3일전에도 있었지만 가슴 속 깊숙이 팽개쳐진 채 먼지만이 수북히 쌓여가던 그것이 고작 3일로 선명함을 되찾았다.

 "나가."

 그녀가 말없이 방문을 나설 때, 나는 그녀의 눈을 응시한 채로 물었다.

 "보험금 받는 건 누가 얘기해줬어?"

 "차 태워준 사람이 얘기하던데?" 그녀의 목소리가 냉랭하다.

 "대머리였어?"

 "그건 왜 물어?" 아직도 차갑다.

 "묻는 말에 대답해."

 "포니테일였는데…." 그녀의 말끝이 흐려질 때 나는 그녀의 눈길조차 버렸다. 문은 닫힌다.

 차라리 병원에서 남아있던 것이 더 나앗겠다는 생각으로 밤을 설치다 동이 틀 때가 돼서야 겨우 잠이 들었던 나에게 핸드폰의 소리는 가혹할 정도로 크게 울렸다.

 "여보…세요…." 머리맡에 있던 핸드폰을 겨우 붙잡고 슬라이드했다.

 "아이고. 선생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목소리가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다.

 "저 담당의 박병철입니다. 봉합한 거 소독도 하시고 그러셔야죠. 그냥 냅두면 안좋습니다. 헤헤."

 "아……. 거기 멀잖아요……. 그냥 집 앞에 가서 할께요. 끊겠습니다." 빨간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에 그가 다급히 소리친다.

 "아뇨. 아뇨. 그냥 집에서 나오시면 차가 있으니까 타고 오시는 길에 수면도 좀 취하시고 오시면 되죠."

 통화가 끊어지고 한참 뒤에야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보. 준우야." 아무런 대답도 없다.

 "여보!"

 냉장고에 다가가 음료칸 문을 열려는데 쪽지가 하나 자석으로 붙어있다.

 '나 준우 데리고 친정 다녀 올께'

 "아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얼굴에 물칠이나 하고 밖을 나서자 그 의사의 말처럼 차가 아파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선그라스를 낀 말총머리의 사내와 함께.

 "타시죠." 말총머리가 말한다.

 "이 더위에도 양복을 입고 다닙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엉덩이의 소독이 끝나고 그저 손가락의 흔적들만 남은 자욱들을 처음 보게 되었다. 동그랗게 봉합된 세 곳이 손등의 색깔과는 달랐지만 세심하게 상처를 꿰멘 것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소독이 끝나고 붕대를 감을 때 익숙한 두 얼굴이 찾아왔다.

 "어이고. 명언씨. 여기서 뵙네." 회장이 반가운 목소리로 말한다. 그 옆의 허억이라는 이름의 중년 사내도 함께였다.

 "어디 다치셨어요? 병원엘 다 오시고."

 "무슨 일이던 AS가 생명이죠. 아닙니까?" 허억은 웃지 않는다.

 붕대가 다 감기고 간호사가 나가자 그는 의자를 끌어와 앉는다.

 "내가 얘기 좀 했으면 하는데…." 회장이 말을 꺼낸다.

 말총머리는 운전수였고 허억은 앞자리에 앉았다. 물론 회장과 나는 뒷좌석에 앉았다.

 "내가 아직 이름도 얘기 안했네. 네이버에 치면 나오긴 하는데 내 이름은 최민숩니다. 반갑습니다." 그가 왼손을 뻗었다.

 잠깐은 그가 농담을 한 줄 알았다.

 "아니. 진짜로." 그가 웃으며 말을 이어간다.

 "다들 한국에서 내 이름을 말하면 웃으면서 의심해. 인터넷에 치면 기업인이 나오고 배우가 나오는데 그 기업인이 나라니까?"

 "뭐 알고 있겠지만 나는 김명언입니다."

 "말 나온 김에 아는 명언 하나 알려줄래요?"

 "농담이오?"

 "아니. 진짜로."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불현듯 떠오른 말로 화답했다.

 "인간은 인생이 어떻든 복수를 꿈꾼다."

 "와……. 이름이 아깝지 않은 분이구만. 하하하. 누가 한 말이에요?"

 "글쎄요. 기억이 잘……."

 "뭐 그럼 김명언씨가 한 명언으로 합시다. 어때요? 하하하." 그가 웃으며 말한다. 차는 국회의사당을 지났다.

 그의 집에 들어섰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기업회장 쯤 되면 대저택 같은데 살줄 알았는데…."

 "에이. 그건 꼰대들이나 좋아하는 거고 나는 도시가 좋아서."

 그가 양복을 벗고 넥타이를 풀며 말을 이어간다.

 "이제 서로 말 좀 편하게 합시다. 나는 79년 양띱니다."

 "나도 79년 양띱니다."

 "그럼 편하게 어디 앉아. 뭐 마실 거라도?"

 "아니. 별로. 근데 왜 여기 사는 거야? 더 넓은데 가서 살아도 되잖아."

 "여기 층 전부 다 내 수족들이 살거든."

 "아……. 층을 전부 다 산거야?"

 "아니지. 건물을 산거지."

 나는 잠시 잊고 있었다. 그의 존재를.

 그가 냉장고에서 초록색 병을 꺼내 병마개를 열며 물었다.

 "내가 일자리를 하나 소개시켜줄까 하는데." 내가 나도 모르는 새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나보다.

 "아, 생각해보니까 이거 순서가 잘못됐네. 다시 말할게. 나는 나의 아버지를 굉장히 존경해. 왜냐하면 남들이 갖지 못한 걸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 뭐랄까…. 예지? 아닌데. 그 가려지고 숨겨진 것을 잘 보는 걸 한국말로 뭐라고 하더라?"

 "직관(直觀)?"

 "아 맞아. 쵸칸이야.

 그가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고 갈증이 좀 사라졌는지 시원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간다.

 "제약사업은 우리 집 가업인데 나의 아버진 재일교포 2세였어. 쵸칸…. 그러니까 직관이지? 직관으로 조부의 사업을 아버지가 크게 번창시켰지."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인다. 조금씩 갈증을 느끼지만 참고 그의 얘기를 듣는 게 낫겠다 싶어 가만히 있었다.

 "마실래?" 그가 초록색 병을 건넨다. 나는 냉큼 받아든다.

 "그래서 내가 이제 가업을 물려받았는데…." 그가 말하는 중간에 그에게 물을 내뿜었다. 나는 턱으로 흐르는 물을 손으로 닦아내며 물었다.

 "뭐야 이거?"

 그가 크게 웃는다.

 "탄산수를 안 먹는구나?" 나는 그저 멍하니 고개만 끄덕인다.

 그가 의자에 걸쳐져있던 넥타이로 얼굴을 닦으며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을 이어간다.

 "하긴 그게 호불호가 많이 갈리긴 하지. 명언아. 갈증이 나면 냉장고에서 뭐든 꺼내 먹어." 그가 뭐든 편하게 하라는 듯 가볍게 손을 저으며 제스처를 취한다.

 "뭐…. 잠시 끊어졌던 말을 이어가자면, 아버지는 10년에 돌아가셨어."

 나의 표정이 어두워졌었나보다.

 "하하. 여든 하나까지 사셨으니 살만큼 살다가셨어. 새끼들 하나하나 다 챙겨주고 편안히 가셨으니 걱정말라고. 친구."

 "음……. 어쨌든 유감이네."

 "뭐…. 확실히 말하고 싶은 건 내가 느끼는 존경심은 인간적인 그리움이 아니라 그의 능력에 대한 동경일 뿐이야. 좋은 아버지는 아녔으니까. 일년에 얼굴을 두 번 보면 많이 본거였다니까?"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창 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간다.

 "나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어. 아버지의 말을. 누구를 믿어야하고 누구를 믿지 말아야 하는지. 누가 적인지. 누가 아군인지. 나는 아직까진 모르겠어."

 그는 잠시 숨을 고른다.

 "어떤 날은 회사로 향하는 길에 차를 세우고 미친놈처럼 지나가는 사람에게 묻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 그랬는데 니가 나타난거지. 빵!!하고."

 그의 목소리가 갑작스레 커졌다가 이내 사라진다.

 그는 테이블에 올려져있던 탄산수를 한 모금 마신 뒤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속삭이듯 말한다.

 "그러니까 내가 일자리를 하나 줄 테니까 함께 일해보자고. 보상은 섭섭지 않게 할 테니까. 앞으로 집세나 받아먹고 사는 거 얼마나 따분하겠어?"

 일단은 잠이 부족해 쉬어야겠다는 말로 그의 제안을 미뤘다. 그는 그의 오피스텔에서 자도 된다는 둥, 여자를 불러준다는 둥의 얘기를 하며 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거절한 채로 집을 나서기 전 멈칫했다가 뒤돌아서서 그에게 물었다.

 "근데 내가 목이 마른지 어떻게 알았어?"

 그가 웃으며 답했다.

 "그게 바로 직관이란 거지." 그의 말을 끝으로 문 밖을 나섰다.

 "어디든 계시네요." 그에게 물었다. 그는 고갯짓으로 옆을 가리킨다.

 "아……. 영등포에 사셨었죠. 옆집에 사시는 거네요."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걸음을 옮기자 그는 나보다 한 발을 앞서 걷기 시작한다. 그의 발걸음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다. 마치 뒤에서 나의 걸음을 보고 맞춰 걷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는 나를 위해 엘리베이터를 잡아주었다. 문이 열리고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지 않게 막고 말했다.

 "어이. 젊은 양반. 도시를 헤매며 다니는 놈들은 자기가 늘 선택을 한다고 생각하며 살지. 고작 점심메뉴나 결정할 수 있는 주제에. 무슨 말인지 알거야." 다소 느릿한 어조로 이야기를 끝냈다.

 나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못했는데도 문은 닫혔다. 1이란 버튼을 누르면서 그 불안감이 다시 엄습해왔다. 통장계좌에 들어온 돈. 도시에서의 돈이란 사랑이자 신앙이며 자기 자신이자 목숨이었다. 불안은 이제 해일이 되어 덮쳐온다. 선택이란 애초에 없다. 아마도 그런 걸지도.

 말총머리가 아파트에 내려주고 그의 차가 떠난 뒤, 그 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다 집으로 들어왔다. 집은 아직도 비어있는 채였고 계좌의 돈도 그대로 였고 거실의 테이블에 널부러진 신문들도 그대로였다. 침실에 들어가 잠을 청한다. 잠은 오지 않는다. 집 앞 슈퍼에 나갔다.

"던힐요."

"어떤 걸로 드릴까요?"

"파란거요."

 담배를 끊었던 건 그녀가 결혼을 인질로 두고 나에게 꺼냈던 협상카드였다. 치과의사가 담배를 피는게 말이되냐는 식의 얘기로 시작해서 아직 낳지도 않은 아이에게 해롭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6년만의 연기가 현기증을 일으킨다. 기침은 하지 않는다. 해일이 닿기 전에 피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도 잠깐은 들었었다. 나는 그 답이 맞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자 나의 머릿속 생각은 점차 모습을 바꾸어간다. 그 파도를 유유히 타고 끝내 모래사장에 닿는 나를 상상한다. 숨이 차고 가슴이 부풀었다가 가라앉음을 반복하는 와중에도 다음 해일을 기다리는 서퍼가 된다. 햇볕에 살이 까맣게 타 살가죽이 부분부분 벗겨져 가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저 다음 해일을 기다리는 서퍼에게는.

 "마지막으로 연봉협상을 해야겠지?" 고용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 그가 첫 번째로 꺼낸 말이었다.

 "근데 말이야……." 고심 끝에 말을 이어갔다.

 "나는 회계사가 아닌데 어떻게 일을 하지?"

 "단기간에 필요한 것을 배울 수 있게 해줄게. 적임자가 있으니까 걱정말라고 친구. 우선 머니부터 어떻게 할껀지 정하자고. 내가 봤을때 연봉 3억에 성과가 있을 때마다 10억 어때. 정년은 50. 은퇴 후엔 연금을 인플레를 감안해 연봉의 반을 지불하고. 근데 일본어 잘 해?"

 "아니. 전혀."

 "그럼 통역사도 붙혀줘야겠네."

  친정에 간 마누라덕분에 집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곱게 늙어 아직 정정한 노인과 젊은 사내와 함께.

 "여기 할아버님이 뭐라는 건가요. 몇 마디는 알아듣겠는데 정확히는 모르겠네요." 젊은 사내가 내 물음에 답했다.

 "교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야마모토 야츠오라고 하시네요. 반갑다고요."

 잠시 정적이 흐르고 서로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시작됐다.

 "뭐라신건가요?" 내가 물었다.

 "이건 틀린 거고, 이 경우엔 맞는 거라 하시네요."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지만 그의 강의가 훌륭한 만큼 나도 그것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마치 스펀지처럼. 교육은 교수가 이제 이정도면 되겠다는 말로 마무리가 됐고 단지 3일에 나는 회계사 비스무리한 존재가 되었다. 나의 재능 혹은 민수의 직관이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최상층에 도착해 회장실의 문이 열렸을 때, 내가 어느 곳에서 일을 하게 될지 알게 되었다. 접견인과 얘기를 나누기 위한 소파와 테이블은 사라진 뒤였고 두툼하고 검은 파일들이 책상에 쌓여있었기 때문에.

 나의 책상에 앉자 그가 말을 이어갔다.

 "A부터 N까지 무작위로 1998년부터 지금까지의 회계장부야. 이상한 점을 찾을 때 마다 나에게 알려주면 돼. 니가 이 일에 적임자란 것을 난 확신해. 왜냐하면 너는 이것에 대해 어떤 편견도, 선입견도 없으니까."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나갔고 나는 일을 시작했다.

 회장은 오고 가는 시간도 많았지만 나와 나누는 대화를 나누는 시간들 또한 많았다. 어떤 날은 12시가 넘어서 함께 회사 밖을 나서기도 했다. 둘이서 밥을 먹고 술을 먹는 날도 점점 잦아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정신적으로 말라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작은 균열로 인해 퍼지는 충치균처럼 그의 정신을 조금씩 갉아먹는 듯이 보였다. 그저 작은 균열이.

 나는 그에게서 많은 것을 듣게 되었다.

 그의 조부는 한 사람과 손을 잡고 담뱃잎을 제조하고 팔았었는데 규모가 점점 커질 때 쯤, 2차대전의 종전을 알리는 원폭 두 개가 일본에 떨어졌다. 그 중 하나가 떨어진 나카사키에 있었던 조부는 티끌하나 남지 않고 말 그대로 소멸됐다.

 그의 뒤를 이은 회장의 아버지는 조부가 남긴 재산으로 다른 시장으로 눈을 돌린 것이 제약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히로뽕을 팔아서 큰 재산을 모았다. 그의 아버지는 오리지날 야쿠자였다. 재산을 모으면 그 재산으로 다른 시장을 뚫었고 버블경제가 꺼질 때 쯤엔 슬기롭게 처분해 위기를 피해갔다. 그것을 제대로 피해가지 못한 야쿠자들은 그의 아버지 밑으로 하나둘 흡수되기 시작해 그의 아버지는 어느덧 전설적인 존재가 되어있었다.

 한번은 늦은 새벽까지 계속된 술자리에서 한껏 꼬부라진 혀로 그가 말을 말했다.

 "그뤄니까 이 새끼들이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엔 슬금슬금 빼먹는거야. 내 아버지가 이뤄놓은걸. 내가 모룰줄알고? 빠가들. 한국놈들이고 일본놈들이고 뒤섞여가지고 이젠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어. 이런 씨부럴."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술상에 머리를 쳐박았다. 썬그라스를 낀 사내 둘이 그를 부축해 자리를 나갔다. 그의 자리를 허억이 대신 채웠다.

 "보자는 이유가 뭐냐." 그가 물었다.

 "얘기 좀 하자고요." 나도 술이 한껏 취했지만 나는 대학시절 사발식에서도 유일하게 온전하게 자리로 돌아갔던 놈이다. 허억과 나는 이야기를 나눈다.


아마도 거기서 근무한지 2주가 됐을 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와이프'

 "어. 무슨 일이야."

 "정말 화 안 풀꺼야?"

 "난 화 안 났는데?"

 "난 당신 목소리만 들어도 알아. 당신이 화가 났는지 아닌지."

 "꺼져. 그냥."

 "뭐?"

 "귀가 쳐먹었냐? 꺼지라고."

 잠시 정적이 흐른다.

 "이혼해."

 "틈만 나면 그 개소리네! 서류 갖고 와. 도장 찍어줄테니까."

 "준우는 어떻게 할껀데."

 "니 좆대로 해."

 "당신 왜 그래……. 무섭게."

 "아, 미안하다. 너는 좆이 없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많이 변했네. 명언이." 회장이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모니터를 보고 있는채로 말한다.

 "글쎄……. 모르겠어."

 그가 혼자 재밌다는 듯 킥킥대다 묻는다.

 "일은 어때. 잘 되가?"

 "뭐…. 조금씩 눈에 보이는 것 같기도 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의 책상으로 다가와 서류를 뒤적인다.

 "이야……. 오늘이 무슨 날인줄 알아?"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인센티브 받는 날이야! 축하해." 그가 환하게 웃으려 노력한다. 작은 균열이 결국엔 치아의 뿌리를 썩게 한다. 대부분의 경우에 환자들은 너무 늦게 치과를 방문해 결국엔 그 자리는 빈자리만이 남는다. 임플란트를 박기엔 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그들은 치과를 떠났었다.

 "오늘 한잔 해야지? 니가 쏘는 걸로 하고. 어때?" 그가 묻는다.

 "그러자. 내가 거하게 한잔 쏠게."

 "와. 오늘 어떻게 놀까? 여자 좀 끼고 놀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답한다.

 "전에 나 퇴원하기 전 날 여자. 불러줄 수 있어?"

 "당연하지! 친구를 위해선데. 그정도야 기꺼이."

 그는 책상에 앉아 서류를 꺼내 펼치고 전화를 건다. 카타로그에 있는 가구를 고르는 것처럼 까다롭게 몇 가지를 묻는다. 그리고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아……. 이걸 어쩌지. 걔 유럽으로 여행을 가서 12월이나 되야 올 것 같다는데……."

 "상관없어. 나는. 걔보다 나은 애들은 있을거 아냐?"

 "그걸 말이라고. 오늘은 일찍 나가자고. 오늘 나도 일정이 없거든."

 그가 버튼을 누르자 비서가 들어와 옷을 입도록 도와준다.

 "지금 4신데?"

 "시간이 무슨 상관이야? 내가 먹겠다는데."

 "그러자고. 그럼." 비서는 이제 나의 옷도 거들어준다. 우리는 밖으로 나섰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그는 허억을 헉삼촌이라고 불렀다.

 "헉삼촌은 말야. 내 대부 같은 거야.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지켜줬거든. 믿을만한 사람일꺼야. 그럼 그렇고 말고. 아가씨들. 오늘 내 친구한테 잘해줘. 명령이야. 이건. 안그럼 바다에 던져버릴꺼야."

 젊은 아가씨들은 웃으며 화답한다. 천장에 달린 미러볼의 현란한 불빛들처럼 별 의미도 없는 소모의 대화들이 계속해서 오간다. 그러다 그가 그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취했을 때 얘기를 하나 꺼냈다.

 "요새는 말이야……. 캬. 술이 달구만. 약을 누가 사는지 알아? 정치하는 새끼들, 망치 몇 번 두드려서 남을 깜빵에 쳐넣는 새끼들 이런 새끼들이 사간다고. 쓰레기 같은 놈들. 그럴거면 대체 뭐하러 법이 있는거야? 지들끼리만 해쳐먹는거지. 퉷. 개만도 못한 놈들." 그는 많이 취했다.

 그는 한 잔을 더 마시고 이 말을 끝으로 다시 테이블에 고개를 쳐박았다.

 "우리 약은 죽여주지. 러시아, 쿠바, 미국에도 가고 유럽에도 가고, 북한에 김정은도 처먹으……." 그가 끌려가고 나는 계산을 위해 웨이터를 찾았다.

 웨이터는 그저 웃으며 손을 젓고 다시 나갔다. 나는 호텔에 여자넷과 들어섰고 동이 트도록 그들과 몸을 섞었다. 흰 옷에 핏자국이 튄 것만 같다. 역겹지만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공복감에 쓰레기통을 뒤지는 부랑자. 나는 그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도시 한 복판에서 아침에 비치는 해를 맞이한다. 빌딩들이 햇살을 잘라낸다. 이제는 해가 떠있는 벌건 대낮에도 도심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나의 그림자가 조금씩 길어진다.

 다음 날.

 "근데 왜 돈이 나에게 온거지?"

 그가 의자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우리는 소득 신고가 끝나는 8월에 계약된 정신과에 돈을 보내. 일년치를. 근데 그 새주소라는 걸 D라는 새끼가 착각한거지. 원래 왠만한 병원은 자리를 옮기지 않거든. 특히 정신과는 더. 근데 이사를 가서 찾아갔는데, 니가 하던 뒷 건물에 같은 이름으로 병원이 하나 더 있었어. 그래서 럭키 세븐 핑거가 된거야. 니가. 바보같지? 하하하." 그가 크게 웃는다.

 "우리가 만든 약을 그들에게 납품하고 정신병은 있지만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거지. 그들은 현금을 챙기고 우리는 우리의 약을 다시 회수해서 재조합하면 완벽하게 행복을 불러주는 약이 되는 거지."

 "재밌는 세상이였네. 내가 살고 있던 세상은."

 "알면 알수록 재밌는 거지. 그런데 말야. 검은 박스에 마크가 박힌 스티커를 붙혀서 돈을 보내는 게 좀 구식같지 않아? 다른 방식으로 바꿀만한게 없을까?"

 "스티커?"

 "어. 스티커가 붙어있잖아. 그가 한쪽 벽에 붙은 민화를 가리킨다.

 그곳엔 상의를 벗은 채 불룩 나온 배를 탐욕스럽게 내놓고 긴 송곳니를 두 개 가진 귀신의 그림이였다.

 "스티커를 못 본 것 같은데…."

 "아냐. 무조건 붙혀서 나가게 되어있어. 프로세스가 있단 말이야."

 "그래……. 내 착각일꺼야."

 아마 내 기억에 그와 나눈 사담(私談)은 여기까지였던 것 같다.


한 달이 되었다.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급히 볼 일이 있으니 사무실로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한 시간 뒤에 사무실에 들어섰고 그녀의 비서가 그의 겉옷을 받아주었다. 그는 베스트도 풀지 않고 내가 정리한 자료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두 시간동안 내가 정리한 자료를 읽었고, 다시 또 읽었다. 그리고 나에게 담배 한가치를 빌릴 수 있느냐 물었고 나는 라이터와 함께 담배를 건넸다.

 연기가 금세 흩어진다. 쾌적한 공기는 계속해서 유지된다. 그는 한 시간동안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다 전화기의 버튼으로 비서를 호출했다. 그가 상의를 입기 위해 등을 돌리는 동시에 문이 열리고 총성이 울렸다.

단 한발의 총성.

 허억은 정확히 그의 관자놀이에 대고 총을 쏘았고 그는 맥없이 고꾸라졌다. 비서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문을 닫고 나간다.

 "뒷처리는 다른 애들이 할꺼야. 나가자."

 "제 지문은 좀 지워야 하지 않겠어요?"

 그는 회장의 손에 총을 쥐어준다. 흘러나오는 피를 밟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걸음을 옮긴다.

 "너는 원래 여기 없던 거야."

 내가 짐을 챙길 때까지 그는 기다렸다. 이번엔 나란히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그가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눈치챘지?"

 "아이……. 저번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인터넷만 할 줄 알면 뭐가 잘못됐는지 알 수 있다고요."

 "정확히 말해."

 "그러니까 이 회사는 돈세탁을 하는 거잖아요. 그죠?"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저기에 있는 고작 일부의 장부인데도 그것의 300%가 넘는 돈을 세탁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냐."

 "3할타자는 있어도 30할 타자는 없잖습니까? 공 하나 치고 분명히 일루타인데 3루까지 누가 주자를 가게 해주냐고요. 홈런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았지?"

 "장부에 써있는 숫자가 엔화라는 걸 알았으니까."

 "똑똑한 놈이긴 하군."

 "아뇨. 인터넷만 할 줄 알면 되요."

 "아니. 그거 말고."

 벨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춰선다. 둘은 같이 엘리베이터에 탄다. 관자놀이에 총구가 닿는다. 트리거가 당겨진다. 연기도 피도 총성도 없이 엘리베이터는 1층으로 향한다. 둘은 회사 밖으로 나간다.

 "태워줘?" 그가 묻는다.

 "그래요. 얻어 타고 가죠."

 인천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대화는 이어진다.

 "근데 죽이기까지 해야 되요?"

 그는 한참을 말이 없다가 대답한다.

 "내가 명언하나 해줄까?"

 "어떤거요?"

 "모르는 게 약이다.

 "하하."

 "근데 넌 왜 믿지 않았냐?"

 "요즘 세상에 우연을 믿는 사람도 있답니까? 주식으로 개미가 100억 벌었다는 얘기보다 허황되구만. 하하하."

내 웃음이 멎어갈때쯤 그가 말한다.

 "지금은 평화의 시대야."

 "그렇긴 하죠."

 "이제 어떻게 할꺼냐." 그가 묻는다.

 "암스테르담에 가려고요."

 "거긴 뭣하러."

 "잘 모르시나본데 거기가 죽이는 곳이에요. 어르신."

 "아까 넌 죽었잖아."

 "에이. 우리 그러지말죠. 돈은 언제 들어와요?"

 "아까 문자 받았을 때 넣었어. 그정도면 충분한 거 맞아?"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더 달라 그러면 진짜 죽일꺼잖아요."

 "똑똑한 놈이군."

 나는 웃는다. 차는 한번도 막히지 않는다.

 "22억 그냥 다 주지 그랬냐."

 "미쳤어요? 돈은 돈입니다. 어르신. 아파트도 줬는데 돈까지 다주라고요? 제가 뭣하러요." 그가 그제서야 웃는다. 한참을 웃다가 말을 꺼낸다.

 "꼬맹이새끼가 오야붕하고 다른게 뭔지 알아?"

 "직관이 부족한 것?"

 "멍청한 놈이군. 지가 얘기한 것도 금세 잊는구만."

 "말을 이렇게 잘 하시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야쿠자를 하지 그래."

 나는 손을 설레설레 저었다.

 "저는 개죽음당하긴 싫습니다. 어르신."

 그가 웃는다. 나는 내리려다 그에게 묻는다.

 "마지막으로 약속한 건 지켜주실꺼죠?"

 "어이. 그만하면 됐어. 암스테르담이건 중국이건 빨리 꺼지기나 해."

 "알겠습니다. 하하." 이 말을 끝으로 그의 차는 떠났다.


퇴근을 하려던 한 중년 여성이 납치당한다.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의자에 팔 다리가 묶인 채로 검은 복면을 쓴 두 사내와 대화를 시작한다.

"왜 이러세요……. 저는 평범한 시민이에요……."

그녀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고 있는 이가 종이를 보고 답한다.

"아냐. 틀렸어." 크고 네모난 칼을 들고 있는 이가 내려친다. 도마라기엔 너무 커다란 통나무 위로 칼이 떨어지고, 그녀의 새끼손가락이 잘린다.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의자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누런 액체가 바닥까지 흥건하게 적셔간다.

"살려줄꺼니까 그건 걱정 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똑바로 해."

종이를 든 복면의 사내가 총구를 그녀의 관자놀이에 댄 채로 말을 이어간다.

"두 번째, 죄를 지은 적이 한번도 없나?"

"정말요!!! 무단횡단도 한 적 없어요!!! 살려주세요!!!" 그녀가 울고 불며 애원한다.

"틀렸어."

"으악!! 제발!!"

칼은 떨어지고 약지가 맥없이 잘린다.

"세 번째. 정신차려. 씨발년아. 어이. 정신차려." 칼을 들고 있던 이가 준비해두었던 물을 한바가지 끼얹는다.

"정신차리라고. 잘 들어. 흠흠. 세 번째. 500만원을 훔친 적이 있나?"

그녀가 입을 벌린 채로 그를 응시한다. 어느새 물을 끼얹은 복면의 사내는 칼을 들고 서있다.

"1, 2, 3."

"잠깐만요! 잠깐만요!!!"

"늦었어. 씨발년아." 중지가 잘렸다.

"마지막. 어이. 잘 들어. 정신차려야 니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열손가락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꺼야."

그녀는 경련 속에서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총을 든 사내가 냉동고의 문을 연다. 그 속에는 얼음이 가득 들어있다. 얼음 한 팩을 꺼내 도마 위에 세 손가락을 넣는다.

 "마지막이야. 잘 대답해. 니 손가락 하나당 가격을 매긴다면 얼마?"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버린다. 그녀는 몸의 격렬한 떨림 속에서 말을 조심스럽게 꺼낸다.

 "오…백?"

 "병신. 하나를 못 맞추네."

 한 명의 사내는 실신한 그녀를 차에 실었고 다른 한 명의 사내는 다른 차에 타면서 그녀의 손가락이 든 얼음팩을 보조석에 던진다. 둘의 차는 서로 다른 길로 흩어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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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출간된 글은 아닙니다~~~ 장편 쓰다 가끔 지치면 날을 잡아 하루를 단편을 쓰는데 나중에 책으로 단편들을 엮을 때 수정 좀 하고 다듬어서 내려고요.. 그저 재미로 봐주셨음 좋겠습니다.. 

 제 나름 항변이자 글의 주제는

 지금의 사회는 자기 자신까지도 스스로가 소모적인 존재로 타락시킬 수 있게끔 만들어졌다. 가치나 신념보다 확연히 다른 이유를 대며 합리화하는 모든 이들의 타락 중 한 개인(도시에서 살아가는 남자, 이중적인 면으로 여성을 소모품과 같은 형태로 표현했지만 글의 요소로써 그럴 뿐 비하의 의미는 없습니다. 제 생각도 전혀 다르고요.)에 선택에 초점을 맞춘 글이다. 그리고 그 타락과 연관되어 있는 묽게 희석된 친일파의 씨앗(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폭이 두개 떨어졌지만 그들은 살아남았다)이 곳곳에 남아 사회를 어지럽히지만 누구도 중죄할 수 없다. 아군도 적도 이젠 묽어졌으니.

지루한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무리는 좋아하는 학자의 말을 조금은 제 식대로 꼬아서 끝내겠습니다.

'망각하는 자에게 저주가 내릴 것이니, 그것은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니라.'

우리는 세월호를 잊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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