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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양무제의 철전 유통 정책 - 시행과 실패
게시물ID : history_1468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8
조회수 : 56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3/14 08:03:28
남제 황실의 먼친척이었던 소연(蕭衍: 양무제)은 500년에 옹주(雍州)의 군단장으로써 남제의 황제인 동혼후(東昏候)를 타도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기 전에도 당대의 뛰어난 교양인들 중 한명이었습니다. 이전편에도 언급했던 경릉왕 소자량은 건강 서쪽 근교의 계롱산(鷄籠山)의 서저(西低)라는 저택을 만들어 당대의 교양인들을 모아 문화사업이나 사회사업을 했는데 소연도 이 그룹의 일원이었습니다.
 
소연은 이 소자량과 그를 중심으로 한 교양인들의 그룹에서 학문과 예술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치와 사회, 경제 전반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소연은 황제에 오르면서 기존의 왕조와는 달리 관용을 베풀어 이전 왕조의 사람들을 죽이지 않으며 '동진-송-제'의 왕조 교체 시기에 빈번하게 일어났던 살육을 끊어버립니다. 그리고 무(武)가 아닌 문(文)이 기초가 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렇게 해서 남조 최고의 전성기라고 부를 수 있는 양무제 치세가 성립되었는데 이러한 최고의 전성기 이면에는 어느 정도의 사회안정이 있었습니다.
 
양무제는 토지를 잃고 고향을 떠난 농민들에게 관유지를 주거나 조세를 감면하는 등 농사보호의 칙령을 내려 나라의 근간인 농민들을 보호를 꾀하였고 즉위 초에는 양질의 새로운 법정화폐를 발행해 유통시켰습니다. 이 법정화폐는 양무제뿐만 아니라 양나라 정부의 강력한 의지로 잘 유통되어 양나라의 경제발전과 사회번영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양 무제가 돈을 주조하였는데 모양은 외곽이 좋고 5수(五銖)의 글자가 있으며 중량도 5수였다. 또 다른 것도 주조했는데, 돈의 외곽을 없앤 것은 여전(女錢)이라고 했으며 두 가지를 같이 사용하였다. 백성들이 간혹 개인적으로 옛날에 주조된 돈(고전古錢)으로 교역을 하였으며, 화폐의 종류는 직백5수(直百五銖)*5수(五銖)*여전(女錢)*태평백전(太平百錢)*정평일백(定平一百)*5수치전(五銖稚錢)*5수대문(五銖對文) 등의 명칭이 있었고 중량은 일치하지 않았다. 천자가 여러번 조서를 내리기를 새로 주조한 두 종류의 돈이 아니면 결코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따. 그러나 이익을 쫓는 무리들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점점 심해졌다.(수서 권24 식화지)
 
 
이전의 송왕조나 제왕조하고는 다른 양나라 정부의 경제에 대한 적극적인 조치는 곧 경제성장에 좋은 자극을 주었고 상거래가 활발해지고 장강에는 대형 화물선들이 물자를 수송하며 왕래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경제 발전에 따라 화폐의 수요는 증가하고 있었는데 정작 화폐의 원료인 동(銅)의 부족으로 그 수요에 비해 공급은 턱없이 부족했었습니다. 그러자 양무제와 양나라 정부는 523년 기존의 법정화폐를 동전에서 철전(鐵錢)으로 전면적으로 전환한다는 전면적인 정책을 내놓았습니다. 과거에 후한 건국 이전에 공손술이 촉한에서 잠시 철전을 유통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대규모로 철전을 공급한 것은 최초였습니다. 이를 위해 양나라 정부에서는 관리에 대한 봉급은 모두 철전으로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이는 관리의 생활이 100% 화폐경제에 성립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철전은 초기에는 보조화폐로서 긍정적으로 작용했지만 민간에서 그 위조가 너무나 쉬웠기 때문에 530년대에 이르러서는 철전의 가치는 급속도로 하락했고 결국에는 철전 정책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 진통(晋通: 520-526)연간에 이르러 동전의 주조를 금지하고 다시 철전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철이 가치가 없고 쉽게 얻을 수 있어서 사사로이 주조하였다. 대동(大同: 535-545)연간 이후에는 철전이 있는 곳은 산과 같이 쌓여 있고 물가는 폭등하였다. 교역하는 자들은 수레에 돈을 싣고 수량을 셀 수 없어서 오직 관(貫)으로 말했다. 장사꾼은 간교하여 그것으로 이익을 추구하였다. 파령(破嶺) 동쪽에서는 80을 100으로 하고 이름하여 동전(東錢)이라고 하였다. 강주(江州)*영주(郢州) 위쪽에서는 70을 100으로 하고 서전(西錢)이라고 하였다. 수도에서는 90을 100으로 하고 장전(長錢)이라고 하였다.
 
중대동(中大同) 1년(546)에 천자가 조서를 내려서 완전히 100으로 통용하게 했다. 조서를 내려도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고 돈을 100으로 하는 자는 더욱 적었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35를 100으로 하기도 하였다. (수서 권24 식화지)
 
 
양무제는 송과 제의 실패한 통화정책에 실로 과감한 조치를 시켜 잠시 사태를 완화시켰지만 이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 완화한 상태속에서도 빈부의 격차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고 철전정책의 실패는 이 경향에 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농민들의 유망은 심해지고 도시의 실업자는 더욱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양나라는 겉으로는 번영하는 듯 보였지만 안으로는 계속 심하게 곪아가고 있었습니다. 상층부의 귀족들은 화려한 생활을 만끽했지만 그 이면에서는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유망 농민들과 실업자들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터진 후경의 난으로 인해 남조 왕조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온 사회적 병폐는 그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 출처: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위진남북조사(노관),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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