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을 거쳐 남조 유송(劉宋) 문제의 치세인 일명 '원가의 치(元嘉之治)'에 이르러서는 남조의 상업활동은 상당히 번창하고 있었습니다. 5세기 중엽에는 어용상인이 궁중과 정부기관에 빈번하게 출입하고 있었고 이런 어용상인 중에는 일명 '은행(恩倖)'이라고 하여 권력자에게 아부하여 신임을 얻은 한문(寒文) 무리들도 생겨났었습니다.
남조 역대 왕조의 수도였던 건강의 남쪽 입구에는 진회(秦淮)라고 하는 운하가 있어 양자강과 동방 삼각주 지대에 통해 있었습니다. 이곳은 남조 최대의 상업 중심지였고 후세에는 홍등가로 번영하여 유명해졌습니다. 이러한 상인들은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은행들에게 뇌물을 건네주어 관직을 받거나 혹은 상업상의 특권을 허가 받았습니다. 계속 뇌물을 바치는 상인들처럼 은행들도 계속 뇌물을 거두어들었습니다. 은행들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 직접 양자강 하류의 삼각주 지대로 파견되어 체납세금과 임시과세를 징수하였는데 이러한 직책을 '대사(臺使)'라고 하였습니다.
대사가 된 은행들은 그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리사욕을 채웠습니다. 징세권을 마음껏 이용하여 뇌물을 받고, 뇌물이 현금이 아닐 경우에는 그 지역 지방관과 결탁하여 곧 팔아 치우거나 혹은 다른 지방으로 옮겨 돈으로 바꾸었습니다. 대사들의 이러한 악랄한 징수는 민중을 피폐화시켰고, 그것은 남조 시대의 전반적인 문제였지만 특히 남제(南濟)시대에 큰 사회문제로 대두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막대한 재산을 축적한 은행들은 황족들의 저택을 능가하는 큰 집에 살면서 저택 안에는 운하를 만들어 기녀를 태우고 뱃놀이를 하고 새로운 옷과 소지품 등이 만들어질 때마다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러한 은행들의 경제력은 유송의 건국 이후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귀족 세력을 능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인층을 배경으로 한 은행들의 세력 확대는 당시 남조가 차지한 강남의 생산력이 증가하고 물자교환과 화폐유통이 증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화폐유통이 증가하자 화폐가 크게 부족해지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5세기 전반의 송나라 정부나 민간 모두 화폐가 부족했었습니다.
※ 사실 송 무제 영초(武帝 永初. 420-422) 연간에 시중의 백성들이 구리를 모아서 5수전(五銖錢)을 주조할 것을 건의했지만 조정의 신하들은 대다수 반대했습니다. 범태(范泰)와 같은 인물은 돈의 통용여부는 돈이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고 여기고 돈의 주조를 반대했었습니다.
「무릇 화폐는 무역하기 위하여 존재하고 많고 적음은 상관이 없으며, 옛날에 귀한 것도 오늘날에는 천한 것이 될 수 있으므로 피차간에 공용하는 것이 하나의 법도이다. 그러나 관리와 백성들로 하여금 골고루 통용하게 하면 부족함을 근심할 필요가 없다. 만약 꼭 필요한 물건으로써 국가에서 널리 거두어 사용해야 할 것은 거북의 껍데기나 조개껍데기와 같은 종류라도 옛날부터 사용하였다. 구리를 사용하여 물건을 만들고 그 도구의 사용처 또한 광범하다.…… 물건에는 쓸모가 있어야 하는데 즉 귀하고 천한 것이 모두 같이 쓸모 있는 자원이 되고, 물건에는 마땅함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백성의 집과 국가에 수요가 있을 때 공급할 수 있다. 지금 꼭 필요한 물건을 훼손하여 시행되지도 못하는 돈을 만들면, 화폐를 주조하는 관점에서는 공적은 적어서 만드는 수고로움을 보충하지 못하고, 화폐를 사용하는 관점에서는 임금과 백성이 모두 곤란하게 되니 실질적으로 계산해 보아도 손해는 많고 이익은 적은 것이다. (송서 권60 범태전)」
그러자 송나라 정부는 유통되는 화폐의 양을 늘리기 위해 화폐의 질을 점점 악화시켜 법정가치는 그대로 두면서 수량만 증가시키는 방법을 취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는 민간에서도 화폐 주조가 가능케 만들었고 그레샴의 법칙이 작동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양화는 은폐되거나 깎여나가 점점 질이 나빠지게 되었습니다. 화폐의 안쪽이 깎여져 나가면서 나중에는 거위 눈알만한 구멍이 뚫린 화폐 즉 '아안전(鵝眼錢)'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되자 화폐제도는 대혼란에 빠져들었고, 물가는 급등하여 465년에 이르러서는 상거래조차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 송 문제(文帝) 원가(元嘉) 7년(430년)에 4수전(四銖錢)이 주조되었습니다. 무게 역시 4수(四銖)였습니다. 이것은 남조에서 최초로 주조한 돈이었습니다. 그리고 효무제(孝武帝) 효건(孝建) 연간(454-456년) 이래로 전서(錢署)를 설치하고 돈을 주조했지만 모양이 얇고 작았으며 테두리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민간에서 가짜 돈을 주조하였고 시중에 유통되는 돈들은 점점 작아져 나중에는 상업 거래에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송나라 정부는 양질의 화폐만 유효하다는 법령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세금 납입시에는 양질의 화폐만 받았습니다. 그러자 곧 숨겨져 있던 양화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 가치기준이 회복되어 혼란은 가라앉았습니다. 하지만 송나라 정부는 부족한 화폐를 새로이 발행하여 화폐부족을 완화시키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뒤이은 남제정부는 오히려 가혹하게 화폐를 걷어들여 국가재정의 40% 정도가 화폐로 채워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남제정부의 긴축정책은 농민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이 정부에게 경고한 말
「최근 화폐는 귀해지고 물가는 하락하여, 지금 물가는 이전에 비해 대부분 반값으로 떨어졌다. 농민은 고생고생하며 생산에 주력해도 현금 수입은 적다. 그나마 손에 쥔 화폐는 깎여나간 질나쁜 화폐뿐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정기적으로 세금을 거둘 떄 양질의 화폐로만 납입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 민간에는 좋은 화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결국 농민은 이리뛰고 저리뛰며 자기들이 갖고 있는 나쁜 화폐 두 닢을 좋은 화폐 한 닢으로 바꾸어 세금을 낼 수밖에 없다. 가난한 농민들은 갖고 있는 나쁜 화폐는 액면가가 같더라도 값은 반이므로 그들이 받는 고통은 더욱더 심해진다. 반대로 양질의 화폐를 가진 부자는 점점 더 큰 부자가 되어간다.」
※ 남제(南濟) 고제(高帝) 건원(建元) 4년(482년)에 공의(孔顗)가 돈을 주조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삼오(三吳 : 오군吳郡, 오흥군吳興郡, 회계군會稽郡) 지역은 나라의 관문으로 근년에 큰 물난리를 당했으며, 곡식을 사들여도 비싸지 않았는데 이것은 천하의 돈이 적어서이지 곡식이 풍부하여 하찮게 여기게 된 것이 아니므로 상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돈 주조의 폐단은 중량의 가볍고 무거움이 수 차례 변한 데에 있다. 돈이 무거우면 사용하기 어려운 것을 근심하게 되고, 사용하기 어려우면 폐단이 없게 된다. 돈이 가벼우면 돈을 몰래 주조하게 되고 몰래 주조하면 폐해가 깊어진다. …… 구리를 아끼고 제조기술을 사랑한다는 것은, 돈이 쓸모 없는 물건이지만 교역을 원활하게 소통하고 돈을 가볍게 하려고 노력하면 수량이 많아지고 노력도 덜게 되어 쉽게 만들 수 있어서 근심을 덜어 주게 됨을 말한다. 한이 오수전을 주조하고부터 송 문제에 이르기까지 4백여 년간 제도는 있기도 없어지기도 하였지만 5수(銖)의 가볍고 무거운 것을 법으로 정하여 화폐의 편리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부(錢府)를 개설하고 들여오는 쇠붙이를 감독하여 쇠틀의 주조를 많이 하였고 무게는 5수(銖)로 하며 나머지는 한대의 법도에 따르게 하였다. (통전 권8 식화지)」
덧붙여 남제의 고제는 여러 군과 큰 도시의 구리와 석탄을 한 곳으로 모으려고 했지만 고제 사망과 함께 그 정책은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남제정부가 거둔 양질의 화폐는 물론 재정지출로 사용되었습니다. 정부를 구성하는 황족*관료*은행 그리고 이들에게 밀착한 어용상인 등은 양질의 화폐 소유자이자 사용자가 되어 더 많은 돈을 벌어들었습니다. 이에 반해 중앙정부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악질의 화폐 떄문에 손해를 보았습니다.
※ 출처 :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위진남북조사 (노관), 위키백과
※ 예전에 쓴 글을 거의 그대로 복사한 거라 .. 그리고 추천에 제한 시간이 걸리니 글에 추천을 하고 싶어도 참 힘드네요.. 반대야 뭐 닥반러들 때문이라도 제한을 둔다치더라도 추천까지 제한 시간을 두는 건 좀 아닐런지 ...